피고인의 방어권을 지켜줍시다
* 사건의 대한 모든 내용은 실제 사건들을 기반으로 각색되었으며, 피해자의 이름은 연합뉴스의 22년 9월 11일 기사 "[10년전N] 60년 통틀어 남자·여자 가장 인기있던 이름은?"에서 무작위로 따왔음을 알립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122317590001996
앞서 이야기했던 지혜의 후일담을 하려고 한다.
유진이와 지혜는 재판에 증인으로 소환되었다. 안 가면 벌금(과태료이다.)을 내야 한다는데 어떻게 하면 좋냐며 전화가 왔다. 혼자서는 못 가겠는데 아빠랑 같이 가기는 싫다고 했다.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지혜의 아빠는 나와의 대화에서 지혜에 대한 안쓰러움을 표현하긴 했으나 그 방식이 폭력적 언행이었던 사람이었다.
엄마와 따로 살긴 하지만 자주 만나고 있는 사이라 엄마랑 같이 가는 건 어떻냐고 물었더니 알겠다고 했다. 엄마를 먼저 떠올리지 않았다는 점이 내내 마음에 걸려서 법정 동행을 하겠다고 했더니 고맙다는 인사가 돌아왔다.
재판 당일 30분 정도 먼저 법원에 도착하여 지혜와 지혜의 엄마를 만났다. 법원 증인지원관의 안내를 받아 대기실에 앉아 있는 동안 엄마와 지혜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선 모녀는 친해 보이지 않았다. 지혜의 엄마는 내게 지혜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면서도 그렇게 안타까워 보이지는 않았다. 지혜가 보호받고 있는 것인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의문은 이전부터 들긴 했었다.
모녀간의 대화에 지혜가 나를 끌어들이면서 나는 의문에 대해서 답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알고 싶지 않았는데!!!!
지혜에게는 오빠가 있었다. 오빠는 지혜와 나이 차가 많이 났다. 이미 성인이 된 오빠는 아직 방황 중으로 보였다. 지혜의 오빠도 지혜와 마찬가지로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다. 피해자 간의 연대를 기대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달랐다. 지혜의 오빠는 지혜에게 또 다른 가정폭력 가해자가 되고 있었다. 지혜의 오빠는 술을 많이 마셨다. 술에 취했을 때마다 지혜에게 자신이 얼마나 가정폭력 피해를 많이 당했는지, 지혜는 자신보다 피해를 덜 입고 있음이 얼마나 억울한지를 토로했다. 그리고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된 후로는 지혜를 창녀라고 불렀다.
이 모든 게 지혜의 엄마 앞에서 일어난 대화들이었다. 이걸 대화라고 할 수 있겠냐만은.
지혜는 이 이야기를 내게 고자질처럼 말하면서 울었다. 이걸 진술하러 온 게 아닌데 오죽하면 아이가 여기서 이럴까 싶었다. 지혜의 엄마는 당황하며 내게 변명을 하고, 지혜는 다그치기 바빴다. 지혜에게는 아주 중요한 것이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게 되어 고통스러운 대기 시간이었다. 진술을 위해 법정에 들어서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옆에 있어줄 신뢰관계인으로 지혜는 날 선택했다.
법정에 들어서기 전에 지혜에게 그림을 그려 구조를 설명해 줬다. 다른 것보다 강조한 것은 무거운 분위기이고 너는 잘못한 것도 없지만 위축되고 긴장될 수 있는데 그건 이 법정의 구조가 그렇게 생겨서이고 처음 와 보는 곳이라 그렇다는 것이었다.
재판 방청을 취미 삼아 다니는 사람이 있을까? 방청이 취미면 좋겠지만 일로 방청을 할 때마다 느끼는 건 정말 적응이 안 되는 곳이란 점이다. 피고인 중에는 몸을 반으로 접다시피 숙이고 앉아서 우는 사람도 본 적이 있고, 증인들은 떨면서 말하지 않는 사람이 잘 없다. 공판 검사도 긴장한 티가 날 때가 종종 있다. 이런 곳에 굳이 젖살도 안 빠진 아이를 불러 앉혀서 이것저것 물어가며 가해자의 방어권을 보장해야 하는가? 모를 일이다.
지혜는 증언을 참 잘했다. 아무 말 못 하고 우는 어른들도 있는데 지혜는 긴장한 얼굴로 말을 잘했다. 옆에 앉아서 아이의 날개뼈 사이에 손을 얹어주면서 강한 아이구나 생각했다. 증인신문 말미에 판사가 피고인 측에 질문이 더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피고인의 변호사가 옆문 밖으로 나갔다. 그때부터였다.
지혜는 괜찮지 않아 졌다. 커진 눈으로 열려있는 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면서 지혜가 저 문 뒤에 피고인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다는 걸 알았다. 생각해 보니 아무도 지혜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법정에서 피고인이 퇴정하더라도 완벽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법정'에서만 나가있는 거라는 걸.
그렇게 증인 신문이 끝나고 법정을 벗어나면서 지혜는 막혀있던 뭔가가 터지듯이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아이의 등을 반복해서 쓸어주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굳이 이런 경험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아무리 괜찮아 보이는 증인이라도 증언을 위해서 수도 없이 많은 준비를 한다. 심리상담을 받고 있는 경우에는 증언을 하기로 한 것만으로도 여러 회기를 다루기도 한다. 피해자는 자신의 증언으로 인해 피해자가 혹시 처벌을 약하게 받거나 무죄가 나오면 어쩌나 걱정하고, 자신이 피해자처럼 안 보일까 봐 걱정한다. 이 때문에 스스로 많이 조심한다. 마치 판사에게 면접을 보는 것처럼. 아니 피해자가 그래야 하나?!
퇴근시간이 한참 지난밤에야 끝난 공판으로 깜깜해진 밤에 법원을 벗어나면서 지혜와 지혜의 엄마에게 오늘 저녁으로 꼭 맛있는 거 먹어야 한다고 웃으며 말하고 헤어졌다. 제발 그 아이의 엄마가 아이에게 맛있는 걸 사주길. 입은 깔깔하고 눈은 뻑뻑해도 따뜻한 저녁시간을 갖기를 바랐다.
헌법재판소에서 미성년피해자의 영상녹화된 진술이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결했다. 정확히는 「성폭력처벌법」 제30조 제6항이 위헌이라고 판결한 것인데, 이게 참 어렵다. 간단히 말하자면 미성년 피해자가 법정에 나와서 지혜처럼 진술하는 게 너무하니까 수사기관에서 진술하는 장면을 녹화한 것을 증거로 인정해서 법정에 안 나와도 됐었는데 그걸 이제 증거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그럼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건 무엇인가? 그게 존재한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범죄장면이 담긴 CCTV 영상이 어떤 이유로 증거로 인정되지 않게 되면 판결에 그 CCTV 영상은 관련이 없는 게 된다. 그러니까 미성년 피해자가 진술한 것을 영상으로 녹화해 둔 것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진술이 없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 조항은 조두순 사건으로 인해서 생겼다. 미성년 피해자에게 자신의 성폭력 피해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진술하는 게 너무하니까! 그런데 이게 우리의 헌법에 위배된다는 거다. 우리가 조두순 사건 피해자에게 했던 짓을 또 해야 헌법을 수호할 수 있다는 게 맞는가?
성인 피해자든, 미성년 피해자든 증인 출석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지혜를 계속 떠올리게 된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8613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