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가정폭력인가
* 사건의 대한 모든 내용은 실제 사건들을 기반으로 각색되었음을 알립니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굿 모닝, 베로니카"라는 고통스러운 드라마를 알게 되었다. 연쇄 약물 강간 사건과 동시에 가정폭력 사건을 다룬다. 가정폭력 사건 부분에서 피해자가 경험하는 피해들은 극 중 남편의 비밀 빼고는 내가 만나는 피해자들의 경험과 무서울 만큼 비슷하다. 브라질의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다들 어디서 배우는 것일까? 국제가정폭력학교 뭐 이런 게 있다면 차라리 낫겠는데 인간이 본능적으로 타인에게 저런 행위들을 한다고 생각하면 매우 끔찍한 일이다.
'더 글로리'의 현남은 인기가 많은 캐릭터였다. 가정폭력 피해자지만 발랄하고 모성애가 강하며 정의로운.
가정폭력에 대해서 굉장히 인상 깊은 말이 있다. '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 죽음에 이르는 가정폭력을 어떻게 예견하고 막을 것인가'(Snyder.D., 2021)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인데, "가정폭력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다"는 것이다.
극 중에서 현남에게 일어난 일들은 그녀가 겪은 것의 일부일 것이다. 그리고 현남은 그 과정의 마지막을 동은과 함께했다고 볼 수 있다. 현남'들'은 각기 다른 과정 중에 나를 만난다.
김현남씨는 당장 갈 곳이 없다고 했다. 남편이 잠든 사이에 몰래 도망쳐서 딸의 집이 있는 이곳으로 왔는데 와서 보니 사위 보기도 창피하고 딸 집에 공간도 없어서 알아서 하겠다고 나왔다고 했다. 기세 좋게 나왔으나 갈 곳이 없어 걷다가 나를 만난 그녀. 왜 나의 고객님들은 가족보다 나에게 솔직한 것일까. 그녀를 그날 하루 묵을 곳으로 안내하는 차 안에서 물어보았다. 왜 도망치셨냐고. 그녀는 울면서 한 문장만 반복했다.
'딸이 이만하면 내가 엄마 걱정 좀 안 하게 해달래서요.'
이현남씨는 변호사와 함께 나를 만났다. 언뜻 보면 모녀 사이 같은 모습이었다. 이현남씨는 연신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남편이 강제로 나를 덮쳤어요. 옷을 걷어 멍이든 팔을 보여주었다. 앙상했다. 바지도 걷어 보여주었다. 마찬가지로 하얗고 앙상했다.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약칭: 가정폭력처벌법)」에 포함되는 죄명은 점점 늘어간다. 사람들은 흔히 가정폭력이라고 하면 몸이나 물건으로 폭행하는 것, 언어적인 모욕과 협박 같은 것을 떠올리지만 실제로 가정이라는 공간에서는 너무 많은 범죄가 일어난다. 모든 범죄가 다 일어날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이현남씨는 그 중 강간 피해를 당했다고 했다. 그녀의 남편은 건설현장에서 '십장'으로 오랫동안 일했다고 했다. 그래서 힘이 세요. 나이가 많아도 꼼짝을 못해요. 이현남씨는 남편을 그렇게 묘사했다.
이현남씨는 마트 캐셔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남편이 한 번 현장에 나가기 시작하면 꽤 오랜 기간 집을 비우곤 했는데 자녀들은 다 커서 독립을 했고, 집에 있기는 심심하고 돈도 벌고 할 겸 해서 시작한 일이라고 했다. 남편은 반대했지만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서 싫은 소리를 들을 시간도 많지 않았다.
한 번씩 캐셔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과 밥을 먹고 맥주를 한 잔 할 때도 있었고 이현남씨는 즐거웠다. 그리고 이것이 남편을 화나게 했다고 했다. 그때부터 이현남씨가 외도를 한다는 의심이 남편의 마음에 싹텄다. 그날 남편은 밖에서 술을 한 잔 하고 들어왔다. 티비를 보고 있던 이현남씨에게 다짜고짜 성관계를 요구했고, 이현남씨는 싫다고 했다. 그러자 손이 날아오고 발이 날아왔다. 그대로 쓰러진 이현남씨를 남편은 강간했다.
그렇게 지옥같은 며칠이 지나고 이현남씨는 아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들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재산이 모두 제 아빠 이름으로 되어있으니까요. 이현남씨는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한없이 위축된 모습의 이현남씨를 보면서 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너무 보기 드문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은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대부분에서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남편을 고소하고, 이혼소송을 진행하고, 자녀들과의 관계도 미뤄두고, 적극적으로 자구책을 찾는 피해자. 너무 드물고 귀한 사람이었다.
이현남씨에게 중요한 건 안전이라고 생각했다. 이현남씨는 마트 캐셔 일을 하면서 번 돈으로 월세방을 하나 구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살던 집에서 짐을 빼오고 싶어했다. 그러나 남편은 협조하지 않았다. 이렇게 저렇게 연락을 취해봐도 도무지 닿지를 않았다. 겨우 남편의 변호사에게 연락해서 짐을 싸러 갈 테니 문을 열어놔달라고 했더니 자기 보는 앞에서 짐을 싸게 하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기가 찼다. 그래서 동행해드렸다. 얼마나 센 사람인가 궁금했기도 했다.
이현남씨를 숨겨두고 먼저 경찰관고 동행해 마주한 이현남씨의 남편은 눈을 부릅뜨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리를 비켜줬다. 이현남씨가 말한 것처럼 키는 작지만 돌덩이 같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나이 70을 곧 앞두고 배가 꽤 나온 장년의 남자였다. 그나마 검게 탄 피부가 이현남씨가 말한 것과 가장 일치하는 점이었다.
짐을 챙기는 이현남씨의 뒷모습을 보면서 감히 어떤 감정일까 알 수 없어서 쉽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짐을 다 챙기고 나오는 길에 괜찮으시냐고 겨우 물어보자 네, 한 마디만 돌아왔다.
정말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은 다 도와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자기 혼자 힘으로 살아본다고 하는 이현남씨는 외로워보였다. 우리는 연락을 참 많이 했고, 이현남씨는 그만큼 미안해 했다. 다친 몸과 마음을 치료할 병원비를 지원해드린다고 하면서 한 편으로는 보약 지어드시는 건 지원 안 된다고 설명해야 하는 것도 왠지 부끄러웠다.
그녀의 남편은 1심에서 징역 1년 8개월을 받았다. 그러나 법정 구속은 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가해자는 집의 도어락을 바꿔버렸다고 했다. 이현남은 남편이 구속되길 기다리고 있고 구속되면 집을 정리하려고 한다고 했다.
조두순이 출소했을 때와 같은 이유로 분노를 느꼈다. 왜 피해자가 거주지를 떠나야 하는가? 가해자에게는 수치가 없나? 가해자의 수치를 위해서라도 가해자가 거주지를 옮기는 게 당연하면 좋겠다.
오늘도 모든 감옥 같은 집 안의 현남들의 과정이 끝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