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현실
내가 교대를 다니던 시절 교대 등록금은 정말 저렴했다. 한 학기 등록금이 대략 200만 원 정도 됐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과외 아르바이트 몇 개 하면서 교내 장학금을 받으면 충분히 등록금을 충당할 수 있었다. 특히 나는 이공계 장학금으로 4년 내내 등록금을 전액 면제받으면서 교내 장학금을 받아서 넉넉하게 대학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등록금 고지서에 0이 찍혀있는 걸 보면서 아버지께서 싱글벙글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기숙사비도 저렴한 편이었다. 한 학기에 100만 원 정도였던 것 같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로 기숙사비와 기타 생활비를 모두 충당할 수 있었다.
내 동기들 중에는 기초생활 수급가정이 흔했다. 우리는 참 순수하게도 서로의 가정사를 숨김없이 얘기했다. 술 한잔 마시지 않고도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고 있다던가, 부모님 병원비를 대고 있다던가 하는 쉽게 털어놓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가볍게 이야기했다. 우리들은 진짜 친구였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조모임에 빠지게 되는 동기가 있어도 그 사정을 십분 이해했다. 서로의 주머니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집안 사정이 넉넉한 친구들도 절대 티 내지 않았다. 우리 과에 해운대 엘시티에 살면서 건물을 몇 채 갖고 있는 언니가 있었는데 졸업할 때까지 그 언니가 그렇게 사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내 동기들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모든 생활비를 충당했다. 집안 사정이 넉넉해도 그랬다. 그게 우리 과의 문화였다. 아끼고 절약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대학생 때부터 뿌리 깊이 박힌 절약정신은 졸업 후에도 어디 가지 않더라. 좋게 말하면 절약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린고비다. 졸업 후 첫 월급이 190만 원 정도 됐으니 아끼고 살 수밖에 없었다. 반면 대기업에 취직한 동창들이 두둑한 보너스와 함께 300만 원 정도 수령해 가는 걸 보고 현타가 올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타 지역에 있는 교사 동기와 함께 수다를 떨며 마음을 풀었다.
"월급은 사이버 머니야. 들어오자마자 순삭이야 진짜."
"넌 그래도 월세 안내잖아. 난 월세도 내고 차 할부금도 내야 돼. 학교가 워낙 애매한 곳에 있어서 어쩔 수 없어. 안 그럼 버스를 2번 갈아타야 돼. 심지어 배차간격도 30분이야. 한번 놓치면 알지? 끝나는 거."
"그래서 얼마 저축하냐?"
"저축은 개뿔. 월세 45만 원, 공과금 10만 원, 할부금이랑 보험료 좀 내고 그러면 없지. 엄마한테 용돈 보내드리느라 외식도 겁난다야. 스타벅스에서 가끔 커피 사 먹는 게 유일한 낙이야"
"너네 커플 데이트는 어떻게 하냐."
"그냥 아끼면서 하는 거지. 연금 나오는데 뭐가 걱정이냐는 사람도 많은데 다 써버리면 결혼하면 집은 언제 사냐고..."
이렇게 신세한탄만 하는 우리네와는 달리 주식, 부동산 투자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서 대성공을 이룬 동기도 있었다. 그 동기를 모셔놓고 투자 성공담을 들었는데 부모님께서 주신 전세금을 빼서 월세로 돌리고 그 자금으로 주식에 투자했다고 하더라.
친구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우린 그냥 여든까지 절약이나 해야겠다."
교직생활 6년 내내 내게 주어진 업무 중 하나는 청소년단체 대장이었다. 가까스로 7년 차에 스카우트를 떼낼 수 있었던 건 우리 학교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막내 교사가 들어온 덕분이었다. 매년 3월 우리 학교에 신규 발령 난 교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에 버선발로 나가보면 매번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이 오셨다. 결국 나는 7년 내내 학교의 막내였고 모두가 기피하는 스카우트 업무는 항상 내 몫이었다.
(최근 교사 TO 가 더 줄어서 광주는 6명 정도 뽑는다고 하는데 몇 년째 막내를 탈출하지 못하는 모든 선생님께 응원의 말씀을 드린다. 기다리면 언젠가는 막내를 벗어날 수 있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모든 청소년단체 활동이 중지됐다. 하지만 내가 스카우트 인솔교사일 땐 한 달에 1번 이상 주말마다 학생들을 이끌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용인 에버랜드로 가는 경우 7시 학교 출발/6시 학교 도착이었는데 11시간을 일하고도 받는 돈은 고작 출장비 2만 원이었다. 출장비와 초과근무수당을 중복 지급할 수 없다고 하여 매번 2만 원을 받았다. 10월쯤 가는 수학여행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주말에 사전 답사하느라 학부모 위원과 교감선생님을 모시고 경주까지 다녀와도 출장비만 받았다. 수학여행 당일에 아침 6시부터 활동을 시작해서, 밤 9시 별빛기행을 마치고 11시에 소등하고, 야간 순찰까지 해도 초과근무수당은 최대 4시간까지만 인정받았다. (*초과근무수당은 호봉에 따라 약간 다른데 대락 만원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사실 나에게 돈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멀미를 심하게 하는 탓에 항상 휴게소에서 토하고 물밖에 마시지 못하는 게 힘들었고, 놀이동산에서 학생들이 다칠까 봐 혹은 사라질까 봐 조마조마 긴장하는 게 버거웠고, 학생들끼리 자다가 폭력사건이 일어날까 봐, 세울 수 없는 고속도로에서 학생이 급히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할까 봐 신경이 곤두서는 게 싫었다.
이제는 청소년활동 업무도 떼냈고 코로나 때문에 수학여행 갈 일도 없지만 그래도 가야 한다면 최저임금보다는 더 많이 받고 싶다. 그래야 2만 원으로 커피 한잔을 가볍게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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