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원에 도전하고 싶은 모든 학부모님들께
퇴근 후 옷을 갈아입고 오랜만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얼마 전 공모전에 떨어진 후 한동안 방황했었다. 타닥타닥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다가 금세 손에 힘이 빠져 버렸다.
'첫술에 배부를 리가 있나... '
고개를 들어 올초에 벽에 써서 붙였던 문구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를 소리 내어 읽었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읽으니 다시금 마음이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에 힘을 주고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휴대폰 진동이 붕하고 울렸다.
"네. 현승이(가명) 어머님,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급하게 부탁드릴 게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현승이가 이번에 영재원에 지원해보고 싶다고 해서요. 혹시 추천서 부탁드려도 될까요? 늦은 시간에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내일이 마감이라서요..."
"그럼요. 내일 오후까지 써드릴게요. 추천서를 쓰는데 참고할 만한 자기소개서이나 대회 수상경력이 있으면 내일 현승이 편으로 보내주세요."
전화를 끊고 **대학교 영재교육원 원서 접수 사이트에 접속했다. 화면에 학생의 학교생활이 어땠는지 묻는 질문과 영재성을 보인 사례를 적는 칸이 쭉 보였다.
'현승이가 어땠더라...'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현승이의 좋은 점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좋은 점은 한 두 가지밖에 안 떠오르고 현승이가 친구를 괴롭혀서 고생했던 기억이 내 머릿속을 꽉 채웠다. 이내 타자를 치는 내 손가락에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매해 초겨울이 되면 영재원에 지원하는 학부모와 학생들이 나에게 추천서를 의뢰하는 전화를 건다. 특히 내가 영재 교육을 전공하였고 영재원 강사였던 걸 기억하는 학부모님들은 담임선생님이 아닌 나에게 추천서를 부탁할 때도 있다. 확실히 영재교육을 오랫동안 해온 선생님의 추천서가 더 공신력이 있다.
하지만 추천서를 써주는 선생님의 스펙보다 훨~씬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선생님과 학생과의 '긍정적인 신뢰 관계 형성 여부'이다. 아무리 뛰어난 선생님이라고 할지라도 친구들을 때리고 괴롭혔던 학생의 영재성을 칭찬하는 글을 술술 써낼 순 없다. 그래서 결국 다음과 같은 내용의 추천서로 귀결된다.
"본 학생은 두뇌가 명석하고 선행학습의 정도가 상당하나 리더십과 인성영역에서 평균 이상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음."
대부분의 학부모님들은 자녀가 수과학에 영재성을 보이면 곧바로 영재원에 선발될 것으로 기대하겠지만 추천자가 매기는 인성영역 점수에서 과락하면 선발되지 못한다. 인성 영역 점수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니 반드시 추천서를 의뢰할 때는 자녀와 긍정적인 신뢰 관계를 형성한 교사에게 추천서를 부탁하길 바란다.
다음날 오전 현승이가 쉬는 시간에 쭈뼛거리며 나에게 찾아왔다.
"선생님, 저 이거... 엄마가 선생님께 드리래요."
현승이가 내민 건 자기소개서였다.
"그래, 열심히 썼네. 어머니께 잘 받았다고 전해드리렴."
나는 현승이가 쓴 자기소개서를 쭉 읽어보았다. '앞으로 ~ 하고 싶다.'라는 패턴의 문장으로 가득 찬 자소서였다. 이런 형식의 자소서는 추천자 혹은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 오히려 아주 사소한 경험일지라도 '~를 했다'라고 4-5가지 이상 쓰는 게 훨씬 더 좋다.
문장 형식 예시)
[ 어떤 책을 읽었고, 어떤 실험을 해봤고, 어떤 오류가 생겼고, 그래서 어떻게 해결해봤는가.
어떤 문제를 풀었는데, 잘 풀리지 않아서, 어떤 고민을 했고, 그래서 어떻게 해결했는가. ]
간단한 예시)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을 배운 뒤 네이버 지도로 우리 지역 소방서의 위치가 적합한지 확인해보았다. 그 결과 서구와 중구의 소방서의 위치는 적절했고, 동구의 소방서는 약간 동쪽으로 더 치우쳐져 있어 화재가 발생했을 때 서쪽으로 달려가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체의 운동에 대해 배운 뒤 투석기 자동차 키트를 사서 조립해 보았다. 하지만 투석기 키트 바닥 지지대가 약해 실험이 잘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바닥 지지대를 무거운 박스로 교체하였더니 고정이 잘 되었다. 또한 투석하는 물체가 너무 가볍거나 너무 무거우면 실험 결과가 일관적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물체의 무게를 __g으로 정해 일정한 각도로 물체를 날려보았더니 45도에 가장 멀리 날아갔다.
과학탐구대회 경험이 없어도, 수상경력이 없어도 상관없다. 생활 속에서 항상 무언가를 탐구하고, 실험하고, 고민하고, 직접 만들어 본 경험이 충분하다는 것을 어필하면 좋겠다. 또한 이러한 점을 추천자에게 꼭 자료로 전달하는 것을 잊지 말자!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영재성을 보이는 사람은 '신동'이라 불린다. 그러나 학부모님들은 신동이 곧 영재라고 착각하시는 것 같다. 하지만 서른 살이 넘어서 영재성이 발현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항상 아이들을 대할 때 영재성이 잠재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한 영재원 선발에 떨어졌다고 해서 영재성이 없다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아두었으면 좋겠다. 어느 시험이든 완벽한 시험이란 없다. 운에 따라 시험 결과가 좌우되기도 한다. 도전에 실패했다고 해서 낙담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실패 후엔 반성이 따라야 한다. 왜 실패했는지, 무엇이 부족했는지 분석하는 게 더 중요하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나니 포기하지 않고 되돌아본다면 언젠가 빛을 발하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다행히 현승이가 1차 서류 면접에 잘 통과하고 2차 시험도 잘 치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치 내 일처럼 기분이 좋았다.
퇴근 후 녹차 한 잔을 들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타닥타닥 거리는 타자 소리에 힘이 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