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비어 있는 삶 - 운니동
텅 비어 있는 삶 (카페 텅), 서울 종로구 율곡로 82 701호
키워드: 궁이 보이는, 산미 있는 원두, 현재와 과거의 만남
나는 평소 궁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궁 안에 있는 것들은 쉽사리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옛 건물과 조경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변질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인다. 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많은 것이 쉽사리 바뀌는 도시 안에서 본모습을 잃지 않고 가꾸어지는 몇 안 되는 공간이다. 그래서일까 궁에 가는 일은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온다. 변하지 않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어쩐지 시간의 흐름이 바뀌는 듯하다. 과거로 혹은 먼 미래로 가 있는 것 같다.
커피와 관련된 글을 쓰면서 궁 얘기로 운을 띄우는 데는 이유가 있다. 텅 비어 있는 삶 (이후 카페 텅)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바로 궁이다. 운니동에 위치한 카페 텅은 스와질란드영사관이 있는 운니동 건물의 7층에 위치해 있다. 일명 뷰 맛집으로 알려져 있는 이곳은 통창을 통해 창덕궁의 전경이 보인다. 그 맞은편에 있는 통창으로는 운현궁의 뒤뜰 일부가 시야에 들어온다. 카페 텅을 방문하는 일은 대체로 궁과 연관될 때가 많다. 종로를 한참 걷다가 궁에 가고 싶어 져서 창덕궁을 한 바퀴 돌고 나와, 몸을 덥히거나 식히기 위해 카페 텅에 방문하기 때문이다. 방금 전에 다녀온 장소를 위쪽에서 다시 한번 바라보면 어딘가 모르게 애틋한 감정이 생긴다.
위에 말했듯이 이곳은 소위 뷰 맛집으로 알려져 있다. 카페의 사면 중 마주 보는 두 개의 면을 전부 통창으로 내놓아서 밖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특히 인기가 많은 자리는 창덕궁 전경이 보이는 쪽으로 일자로 난 테이블이다. 이곳에 앉으면 커피를 마시며 인사동의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즐길 수 있어서 일석이조다. 평일, 주말 상관없이 내점객에게 늘 인기가 많은 좌석이다. 이곳에 몇 차례 방문했지만 늘 이쪽 창가 자리는 손님으로 차 있는 바람에 앉아 보지 못했다. 특히 가을이 되면 더 인기가 많아진다. 궁궐에 있는 나무들이 색깔을 바꾸기 시작하면서 분위기는 점점 숙성되어 간다. 노랗고 빨간 단풍이 눈부시게 흐드러지며 마음까지 적신다.
반대편 통창은 종로 3가가 맞닿아 있는 쪽의 전경이 펼쳐진다. 이 좌석은 나 역시 몇 차례 앉은 적이 있다. 고즈넉한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곳이다. 이곳에 앉으면 운현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유추되는 공간이 보인다. 텅 비어 있는 정사각형의 운동장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다. 그 오른편으로는 한옥으로 지어진 건물이 보인다.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어쩐지 종로와 어울리는 한 쌍이다. 볕이 잘 드는 이 자리에 앉아 때때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공책에 뭔가를 적는 일을 좋아한다. 그렇게 하면 내 안의 어느 한 부분이 채워지는 듯하다. 특정 공간 앉아서 어떤 일을 함으로써 내 일부가 위로받는다는 걸 느낀다. 나의 경우에는 카페 텅의 구석 자리에 앉아 햇볕을 받으며 공책을 펴 놓고 뭔가를 끄적이는 일이 그러하다.
조금 다른 얘기로 새자면, 모든 사람에게는 기댈 구석이 필요한 것 같다. 그게 사람일 수도 있고 공간일 수도 있다. 저마다의 기댈 구석을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가 가진 근본적인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향해 움직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본능적이며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가한 주말에 카페 텅에 찾아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어떠한 종류의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서다. 즉, 카페 텅은 당시의 내가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자발적으로 찾는 사람과 장소에는 진심이 깃든다. 매일 해야만 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발길이 움직이는 쪽으로 가다 보면 결국 내가 머물고 싶었던 곳에 도착하게 된다.
카페 텅은 두 종류의 원두를 제공한다. 대부분의 카페가 그러하듯, 산미가 없는 원두와 산미가 있는 원두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산미가 없는 블렌드는 ‘텅 블렌드'로 중강배전 원두고, 산미가 있는 원두는 ‘에티오피아 싱글'로 중배전 원두다. 나의 경우에는 대체로 산미가 없는 ‘텅 블렌드’로 주문한다. 하지만 중강배전 원두 역시 내가 느끼기에는 어느 정도 산미가 있었다. 원두 자체에 과일향이 강하게 배어 있고 강배전이 아닌 탓에 조금 라이트한 향미를 느끼기에 적합한 원두였다.
카페 텅에 동행했던 사람이 주문한 ‘에티오피아 싱글'로 내린 아메리카노를 한 입 얻어서 마신 적이 있다. 베리향이 코끝을 맴돌았고 원두의 개성이 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로 유추해 봤을 때 카페 텅의 원두는 대체로 산미가 강한 원두를 셀렉해서 사용하는 듯하다. 이곳에 몇 차례 라테를 주문해서 마신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고소한 너트향이 나는 원두와 라테의 조합을 좋아해서일까? 긍정적인 인상은 남아 있지 않다. 카페 텅의 원두는 개성이 꽤 강해서 아메리카노로 즐길 때 더 어울리는 듯하다.
커피 외에도 다양한 음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메뉴 선택의 폭이 넓다.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베리에이션 음료들이 메뉴판을 채우고 있다. 단순히 메뉴를 다채롭게 구성하여 환심을 사거나 손님 유입을 늘리기 위한 것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메뉴의 구성과 맛에 공을 들인 티가 난다. 특히 나와 같이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식물베이스 음료를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적합한 메뉴는 없을 듯하다. 키위 밀크, 밤 라테, 호우 오트밀크티 등은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논커피 메뉴다. 예전에 키위 밀크를 주문해서 마셔본 적이 있는데 시판 제품을 쓰지 않고 섬세하게 준비한 듯한 티가 나는 서브메뉴였다. 기분이 좋아지는 깔끔한 단맛이 입가에 은은하게 맴돌았다.
이곳은 주류도 제공하기에 간단한 안주와 함께 맥주, 위스티, 칵테일 종류를 주문할 수 있다. 낮에만 방문하기도 했고 낮술을 즐겨하는 타입은 아닌지라 한 번도 주류를 주문한 적은 없지만 한 번쯤 주문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9월 중순의 더운 여름날, 평일 오후 3시나 4시쯤에 이곳을 방문해 맥주 한잔과 감자샐러드를 주문하면 좋을 것 같다. 하얗고 매끈한 작은 잔에 맥주를 한 잔 따라서 목을 적신다. 그리고 이어서 나온 감자 샐러드를 크래커 위에 조금씩 올려 먹는 것이다.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바깥은 지면의 열기로 푹푹 찌는데 실내는 에어컨 바람이 뿜는 선선한 공기가 맥주병을 에워싸고 있다. 경미한 취기로 몸과 마음의 감각이 느슨해져 그 대비가 크게 느껴질 것이다. 그런 팔자 좋은 상상을 해 본다.
카페 텅의 인테리어는 현대적이고 근래 유행하는 깔끔한 스테인리스와 목재 소재로 마감 처리를 했다. 공간은 어딘지 모르게 쾌적한 느낌을 주고 답답한 구조가 아니라서 내점해 있는 시간 동안 이곳 특유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물건, 가구, 메뉴판은 잘 정돈되어 있으며 차분한 느낌을 자아낸다. 다만 장시간 앉아 있기에는 가림막이나 분리된 공간이 없어서 적합하지는 않다는 인상을 준다. 내부 공간은 가게 이름 그대로 텅 비어 있는 느낌을 주는데 이 부분이 참 마음에 들면서도 동시에 장시간 머물기에 다소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다. 음료를 즐기고 한두 시간 내에 일어나는 정도로 방문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종로의 풍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현재와 과거가 뒤섞여 공존하는 상태에 매혹되곤 한다. 카페 텅의 매력 또한 현재와 과거가 이어져 있는 듯한 감각에서 비롯된다. 실내 공간은 현대적이지만 바깥 풍경은 고즈넉한 궁을 품고 있다. 그리고 그 대비가 절묘하게 상호보완적이다. 모던한 공간에서 바라보는 과거의 풍경은 어쩐지 타임머신을 타고 있는 듯한, 시공간을 뛰어넘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바뀌지 않는 것이 주는 묵직함과 새것이 주는 산뜻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무게의 추 균형을 중심에 둔다. 도시의 색채가 지나치게 세련되거나 낡지 않고 그것들이 적당히 섞여 있기에 묘한 안정감이 든다. 종로는 풍경을 단편적으로 묘사할 수 없기에 매력적이다. 나에게 종로구 운니동은 그런 느낌이다.
카페 텅에 방문하는 일은 어쩐지 사촌 언니 집을 방문하는 듯한 향수를 되살린다. 내 집에 드나들 듯 쉽사리 갈 수는 없지만 한 번 가게 되는 일이 생기면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문고리를 잡고 살며시 들어가게 된다. 조금 부끄러운 감정이 들면서도 어쩐지 나를 반겨줄 것만 같기에 그 공간 속으로 슬쩍 몸을 집어넣게 되는 것이다. 비록 그 안에는 나를 반겨 주는 사촌 언니도 없고 샤이한 티를 낼 수도 없기에 적당히 체면을 차리고 음료를 한 잔 주문하게 되지만 말이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대체로 기댈 곳이 필요할 때 운니동에 있는 이 카페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이곳에 앉아 바깥을 한가로이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싶어 진다. 내면의 조용한 시간을 나에게 주고 싶을 때, 아니 주어야만 할 때 의심의 여지없이 카페 텅이 가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