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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C Jul 02. 2024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비 오는 날 아침 산책기

   며칠 전, 밤 동안 큰 비가 내려 아침 산책을 포기하려 했는데 새벽에 눈 떠 보니 비가 그쳐 있었다. 아직 잔뜩 흐렸지만 비가 좀 도 괜찮겠다 싶어 길을 나섰다. 옷이 축축해지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여름에 내리는 이슬비나 가랑비 정도는 우산 없이 한 두 시간 맞고 다녀도 기분이 괜찮았다. 마장호수에 도착하니 이슬비가 내리다 말다 다. 산 위에는 운무가 자욱했다.


2024.06.30. 운무가 피어오르는 산

   산책로에 들어서자마자 예상과 어긋난 광경이 펼쳐졌다. 어젯밤 비가 꽤 내렸으니 호수의 수위가 높아졌을 줄 알았는데,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내린 비가 한여름의 증발량에는 미치지 못했는지 오히려 많이 낮아졌다. 마장호수는 2000년에 농업용 저수지로 조성되었다가 파주시가 20만㎡를 호수공원 형태로 조성하면서 산책로와 흔들다리를 갖춘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호수 안에 꽤 많은 나무들이 1m 정도 높이의 줄기만 남기고 잘린 채로 수몰되어 있다. 보통은 물에 잠겨 잘 보이지 않는데 수위가 낮아지면 이 나무들이 징검다리처럼 고개를 내민다.


수위가 낮아져 수몰된 나무들의 잘린 줄기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호수의 수면 위로 여기저기 잘린 나무 줄기들이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 위로 둥근 물체가 보였다. 가까이 가 보니 흰뺨검둥오리들이 그 위에 앉아 있었다. 헤엄을 잘 치는 녀석들이지만 쉴 때는 물보다 발 디딜 곳에 있는 게 편한가 보다. 잘 쉬던 녀석들이 내가 다가가자 푸드득 날아올라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오리들의 휴식을 방해한 것 같아 미안했다. 관찰자 효과(Observer Effect)를 최소화하려면 나도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의 촬영자들처럼 수풀에 몸을 숨기거나 나무 위에 올라가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하나?



   오리들이 떠난 물가를 지나쳐 출렁다리를 향해 걸었다. 바닥에 물기가 있어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며 걸었다. 가끔은 이 조심성이 나이듦의 증거처럼 느껴져 조심성 없던 때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든다. 바람이 불자 산책로 옆에 있는 숲의 나무들이 출렁이며 솨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이어폰을 빼고 바람과 나뭇잎들이 내는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숲에 바람이 부는 소리는 ASMR로도 인기가 있는데, 소리도 좋지만 나뭇잎들이 서로 부대끼는 모습과 거기서 나는 푸른 향기가 더해지면 귀와 눈, 코가 모두 평온해진다. 온도와 습도에 따라 소리와 향기가 달라지는데 맑은 날 마른 잎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는 청량하고 오늘처럼 이슬비가 와서 촉촉한 잎이 내는 소리는 한결 차분하다.


   나무에 부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있자니, 강요배 화백의 글이 떠올랐다.

바람 속에는 수백 년 묵은 고목이 버티고 있다. 남쪽으로 쏠린 뼈가지를 하고, 마치 바람을 닮은 거대한 새처럼 바람을 타고 있다. 강한 바람은 인고의 생명을 안아 키운다. 바람과 나무는 서로를 멸하지 않고 서로를 만든다. 어쩌면 그것들은 하나다. 그 매운 바람이 아니라면 저다운 나무로 살 수 없고, 또한 바람은 나무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강요배, <풍경의 깊이> 중에서


강요배, <風木>, 2016

   그렇다. 선생의 말대로 바람과 나무는 서로를 만든다. 나무는 바람을 맞아 휘청이고 흔들리며 뒤틀리고 휘어질지언정 깊이 뿌리내린다. 바람도 나무를 흔들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내게 부는 바람은 무엇이고, 나는 무엇에 부는 바람일까?


버찌가 떨어져 있는 산책로

   벚나무 옆으로 난 산책로에는 버찌가 잔뜩 떨어져 있다. 이 버찌를 밟지 않고 피해 갈 방법은 없었다. 밟으면 톡톡 터지는 느낌이 날 줄 알았는데, 별 느낌이 없었다. 말랑한 운동화 바닥과 만난 축축한 버찌는 발바닥에 촉감을 전하지 못했다. 운동화 바닥과 데크 위에 보랏빛 흔적만을 남길 뿐이었다.


   좀더 걷다 보니 맨발로 걷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저 분은 버찌 구간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한 손에 신발을 들고 있었으니 아마 신고 지났겠지? 그런데 맨발로 저 구간을 지나면 운동화 신은 발로는 느끼지 못했던 버찌가 톡톡 터지는 그 감촉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번 해 볼까 생각하다 진한 보라색으로 물들 발바닥이 생각 나 얼른 포기했다. 상상만 해도 아름답지 않은 그림이다.


마장호수 수문다리와 수문

   길게 뻗은 둑을 지나면 수문과 수문다리를 만난다. 수문다리는 철조망으로 출입을 금하고 있다. 나는 수문다리 끝에 놓인 팔각 성냥갑처럼 생긴 건물의 실내가 항상 궁금하다. 그냥 비어 있을지, 수문을 여닫는 어떤 장치라도 있는지. 이럴 땐 이곳의 관리자와 시덥지 않은 친분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수문 위는 원앙과 오리들의 휴식처이기도 하다. 호수의 수위가 높을 때에도 수문 꼭대기는 물에 잠기지 않아 물놀이에 지친 물새들의 쉼터가 되어 준다.

2024.05. 수문 위에 앉아 있는 원앙 한쌍

   지난 봄, 원앙 무리가 모두 떠난줄 알고 허전한 마음에 이곳을 걷는데, 저 수문 위에 한쌍의 원앙이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날 뻔했다. 오래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고 싶었는데 5분도 채 되지 않아 걸음을 옮겨야 했다. 수컷이 7~8미터는 되어 보이는 수문 아래로 협의도 없이 날아가자 암컷은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따라 내려갔기 때문이다. 두 녀석은 풀이 무성해 볼 수 없는 곳으로 숨어버렸다.  


   호수 반 바퀴를 돌아 원점으로 향하는 길에는 오면서 본 풍경을 반대편에서 보게 된다. 어느 쪽으로 가든 도착점을 같지만, 어떤 날은 오른쪽 방향으로, 어떤 날은 왼쪽 방향으로 돌며 호수의 풍경을 만난다. 산책을 시작했던 초기에는 주차장에 도착할 때 차와 가까운 지점을 생각하여 출발지를 정했다. 그런데 요즘엔 내키는 대로 어슬렁거리기로 한 산책인데 그게 무슨 대수냐 싶어 차에서 내려 끌리는 곳으로 직진한다. 주차장이 가까워질수록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다. 집을 나설 때 설레던 마음이 돌아갈 때도 그러하니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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