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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C Jul 05. 2024

한여름 밤의 산책

   더위에 약하지만 여름을 좋아한다. 열도 땀도 많으면서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를 나도 잘은 모르겠다. 방학이나 휴가 때문이었다면 겨울도 좋아해야 하는데, 여름에만 편파적인 이유가 대체 뭘까? 여름마다 산, 바다, 강을 찾아다니며 놀았던 기억 때문일까? 여름에는 뭔가 무장해제된 기분이 들어 기어를 한 단 내려도 좋을 것 같아 나 같은 게으름뱅이들이 좋아하는지도...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이 찾아왔고 봄부터 백수였던 나는 특별한 이 여름을 어디서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고 있다.


2024년 6월, 춘천 의암호


   일단 수상스키를 시작했다.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는데 올해가 지나면 시간도 몸도 따라주지 않을 것 같아 질러 봤다. 레슨을 받기 전 물에 적응하기 위해 실내 수영장도 몇 번 다녀왔다. 첫 레슨에서 몇 차례 물에 빠지고 스키가 벗겨졌지만 결국 봉을 잡고 설 수 있었다. 2회차 레슨에는 봉을 잡고 꽤 먼 거리를 달렸다. 벌써 줄을 잡고 타는 사람이 많았지만, 지각생이긴 해도 남들 하는 만큼은 따라가고 있었다. 3회차 드디어 줄을 잡는 날,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다. 2회차 레슨 때 어깨에 무리가 있었는지 왼쪽 팔이 머리 위로 올라가면 통증이 있었다. 불길한 예감을 안고 스키를 신은 채 물 안에서 자세를 잡고 있었다. 보트가 출발하고 줄이 팽팽해지는 순간 앉은 자세로 몸이 떠올랐다. 이제 허리를 펴고 일어서면 되는데, 허리를 펴는 순간 균형을 잃고 물에 빠졌다. 다시 한쪽 스키를 찾아 신고 자세를 잡아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스키가 있는 곳까지 헤엄을 쳐 가는 동안 다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어깨는 쑤시고 다리는 뻣뻣해지고. 그 상태로 난 백기를 들고 집에 왔다.


   이날 이후로 분한 마음에 헬스장에 등록했다. 근육이 너무 없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근력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집 근처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을 찾아 또또 일년 회원권을 결제하고야 말았다. 다음날부터 귀를 때리는 헬스장 BGM들을 들으며 러닝머신을 타고 쇠질을 하고 사이클을 탔다. 그렇게 며칠 몸을 만들며 식단도 제한했다. 첫날은 금식, 이튿날부터는 평일 1식과 프로틴 2회, 주말에는 2식을 했다. 2주 동안 몸무게는 약간 빠졌는데 근육량엔 아직 큰 변화가 없다. 분하다! 30대까지는 운동을 하면 금방 근육이 펌핑됐다. 그런데 40대가 되니 안 먹으면 살은 빠지지만(이것도 매우 힘들긴 하다) 근육을 유지하는 게 어렵다. 게다가 2022년 수술 후유증을 핑계로 1년 동안 집에 오면 먹고 누워있기만 했더니 있던 근육마저 녹아 없어져 버렸다. 10대부터 운동을 꽤 해왔던 나로서는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가 생겼다.


새로 등록한 헬스장





   헬스장에 다니기 시작한 뒤로 매일 산책은 어려워졌고 이틀에 한 번 꼴로 다닌다. 지난 수요일 백수라도 해야 할 일이 많아 밤늦게 헬스장에 갈까 하다가 지친 몸뚱이를 답답한 실내와 취향에 안 맞는 음악에 내맡기고 싶지 않아 일산호수공원으로 향했다. 이미 밤 10시를 넘겨 주차장은 한산했다. 차를 세우고 수증기가 뿌옇게 찬 산책로로 들어갔다. 기온은 높지 않아도 습도가 높아 걷기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무와 풀, 물이 있는 곳에 오니 쉬는 것 같았다. 11시를 넘긴 시각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뛰는 사람들이 내 옆을 스쳐 지났다. 나는 뛰는 사람들에게 길을 터 주며 느릿느릿 걸었다.


2024.07.03. 습도가 높아 뿌옇게 찍힌 일산호수공원의 야경.


   습도 높은 여름 밤이 주는 베네핏이 하나 있다면 수증기가 빛을 먹어 한결 순해진 야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야경의 핵심은 휘황찬란한 불빛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겠지만, 난 이렇게 순한 불빛을 좋아한다. 한밤에도 너무 환하게 밝은 곳에 있으면 왠지 피곤하다. 그래서 집에서도 천장 조명을 잘 켜지 않고 스탠드나 벽등 정도만 켠다. 그렇다고 완전히 캄캄한 어둠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꽤 오래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어둠 때문이다. 9시만 지나도 사방이 캄캄해지는 곳에서는 왠지 문을 꽁꽁 걸어잠그고 집 안에만 있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산책을 다닐 엄두도 나지 않는다.




   언젠가 일몰 직전에 마장호수에 갔다가 일몰을 보고 호수를 한 바퀴 걸었던 적이 있다. 일몰이 정말 아름다운 날이었다. 구름이 많은 날이었는데 태양이 구름 사이를 지날 때마다 주변이 황금색으로 물들었다가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파란 하늘이 나타나기도 했다. 출렁다리 위를 걷는 사람들이 까만 그림자처럼 보였다.


2023.09.09. 일몰 전 마장호수 출렁다리


   아직 해가 완전히 넘어가진 않은 때라 출렁다리를 건너지 않고 호수 서쪽을 향해 직진했다. 호수의 서쪽 끝에는 둑이 있다. 이 둑 위에 서서 저 서쪽 끝 산으로 사라지는 해를 보고 있었다. 하늘은 연한 파랑, 빨강, 노랑, 흰색의 오일파스텔로 어지럽게 칠해 놓은 것 같았다. 다시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모든 풍경이 매일 조금씩 다르지만 일몰처럼 매일 드라마틱하게 달라지는 것도 드물다. 그래서 더 신비하고 귀하게 느껴지나 보다. 모든 미와 매력은 개별성과 일회성에 바탕을 둔다는 헤르만 헤세의 말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2023.09.09. 마장호수 둑 위에서 본 일몰.


   그렇게 넋을 잃고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바라보다 이제 주차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 주차장은 동쪽 끝에 있고 이곳은 정반대 서쪽 끝이었다. 여기서 30분 가까이 걸어야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다. 마장호수는 산책로에 조명이 거의 없고 주변에 건물도 별로 없어서 해가 지면 대부분의 구간이 암흑이다. 알고 있었지만 이날은 캄캄해지기 전에 출렁다리를 건너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하프코스가 왠지 성에 차지 않았다. 이직한 회사에서  연속 철야를 하던 때였고 오랜만에 마장호수를 찾은 터라 그날따라 암흑 속이라도 조금 더 걷고 싶었다.


   각오는 했지만 너무 캄캄했다. 처음에는 그 어둠이 영화관에서 느끼는 것처럼 아늑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둠이 이 풍경과 함께 나를 집어삼켜 물아일체가 된 기분이었다. 인간 세상과 단절되어 매일 노트북 앞에서 씨름하던 내가 다른 누군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세상에서 멀어지는 기분으로 걷고 있는데 둑에서 북쪽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500미터가 넘게 걷는 동안 작은 조명 하나 보이지 않았다. 조금씩 등 뒤가 서늘해졌다. 신림동 산책로에서 살인 사건이 있었던 게 불과 몇 주 전이었다. 약간의 공포감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누군가 이런 곳에서 운동복에 모자를 눌러 쓰고 몸집도 큰 나를 마주치면 상대편이 더 무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 무서움은 금방 사라졌다.


   휴대폰을 꺼내 손전등을 켜고 아래쪽을 비추며 걸었다. 사람도 없었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산책로 옆에 있는 산에서 바스락 소리가 나면 혹시나 산짐승이 내려오지는 않을까 긴장했다. 그렇게 마음이 작아졌다 커졌다를 반복하며 걷다 보니 건너편에 불빛이 보였다. 카페와 캠핑장이었다. 어둠 속에서 있는 내게 저 멀리 보이는 캠핑장의 모습은 밝고 희망에 차 있는 듯했다. 저기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보면 좀 무섭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걸음을 재촉해 작은 정자가 있는 곳까지 왔다. 여기에서 주차장까지는 산책로 울타리 위에 조명이 설치돼 있었다. 빨강, 노랑, 파랑, 녹색, 주황이 반복되는 색동조명이었다. 뭔가 오래된 나이트클럽 입구 같기도 했다. 색감은 맘에 들지 않았지만 은은한 불빛이 길을 비추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해가 진 마장호수. 동쪽 끝 주차장 근처에 있는 캠핑장.


   주차장에 도착해 차를 몰아 집에 오는 동안 완전한 어둠 속을 걷던 때의 느낌이 계속 살아났다. 어둠 속에서 뭐가 그렇게 마음을 졸이게 만들었던 건지 생각했다. 산짐승이나 범죄자가 출현하는 것보다 조금 더한 공포를 아주 잠깐 느꼈는데 그 이유를 생각해 봤다. 누군가가 나타나 나를 놀라게 하거나 다치게 하는 것보다 더 공포스러웠던 것.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어둠 속에서는 내 존재가 소거되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사라진다는 게 그런 느낌일까?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고 완전히 고립된 기분. 마치 폐소공포를 느끼는 사람처럼 순간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 느낌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아 캄캄한 마장호수에는 이제 가지 않는다.




   지난 봄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영국을 돌아보고 난 뒤 다시 가고 싶은 곳으로 파리를 1순위로 꼽는 이유도 밤 산책 때문이다. 파리에는 도심 속 카페에 밤늦도록 앉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고 도심을 관통하는 센(Seine)강 주변으로는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나무, 산책로가 발 닿는 곳에 있었다. 파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다 좋았지만, 특히 밤이 좋았다. 은은한 노랑 조명이 비추는 거리와 강은 미셸 들라크루아와 고흐의 그림들을 소환했다. <밤의 카페 테라스>나 <별이 빛나는 밤> 남프랑스 아를 지역이 배경이지만 파리의 야경이 주는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이 만든 건축물과 불빛이 자연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추위와 다음날 스케줄만 아니면 밤이 새도록 센강을 따라 어슬렁거리고 싶었지만, 한국인들에게 유럽 여행은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2024.04.22. 파리 센강의 야경


   야경을 보며 어슬렁거릴 수 있는 것도 여름밤이 주는 특권이다. 다른 계절에는 밤 기온이 낮아 밖에 오래 머물기 어렵다. 걷더라도 점점 체온이 떨어져 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파리에서 저 사진을 찍던 날도 4월 하순이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얇은 패딩점퍼를 입고 있었다. 비까지 내려 추위에 덜덜 떨며 유람선을 타고 야경을 구경하다 배에서 내려서는 후다닥 호텔로 돌아갔다. 그래서 여유롭게 밤 산책을 하기에는 여름밤이 좋다. 적당한 기온 덕분에 오래 밖에 있어도 체온이 떨어지지 않아 느긋하게 걸을 수 있다.


   아직 자연인이 되지 못한 나는 야생의 자연보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언제든 사람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자연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나 보다. 그날밤 헬스장 대신 공원을 찾은 건 잘한 선택이었다. 어둠 사이로 누군가가 밝혀 놓은 불빛에 의지하며 더위와 에어컨 바람에 지친 몸을 달랬다. 높은 습도마저도 옅은 안개가 덮인 것처럼 색다른 야경을 만들어 주어 오히려 좋았다. 근육을 만들고 지방을 태우고 멋지게 물 위를 달리는 건 '내일의 나'가 해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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