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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C Jun 28. 2024

아무도 아닌 사람 되기

진로 상담을 하며 진로를 고민하던 곰샘



   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졸업>을 보면서 오래 전 학원 강사 시절이 떠오르곤 했다. 그간 교육과정도 바뀌고 입시 체제도 몇 번의 변화가 있었지만, 내신 등급과 수능 점수에 목매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난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라 불리던 내신-수능-논술이 뭐 하나 빠지지 않고 위력을 발휘하던 시절 논술 강사였다. 내신 절대평가 체제였지만 대학들은 몰래 고교등급제를 적용했고, 논술 전형에 합격해도 수능 최저 등급을 맞춰야 했다. 뭐 하나만 잘해서는 소위 in Seoul이 불가능했다. 대입 논술은 통합 논술 형태로 출제되었고 어떤 학교는 문이과 통합형, 어떤 학교는 인문+사회과학 통합형, 다른 학교는 영어 제시문 포함, 또 다른 학교에서는 프랑스 바칼로레아 방식의 대학 교양 수업에서나 나올 법한 철학 논제를 출제했다. 그래도 통합 논술이 가져온 긍정적 효과는 고등학생도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비록 다윈의 진화론도 제대로 배우지 않은 아이들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곤 했지만.


   이런 입시 체제에서 학생들에게 권한 대비책은 빨리 진로를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ASAP. 그래야 원하는 학과와 학교가 원하는 틀에 맞춰 준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 가슴 뛰는 일을 찾아. 꿈은 직업이 아니라 그 직업을 통해 네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구체화 해야 해.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해도 어떤 질병의 전문가가 되고 싶은지, 아니면 사회의 의료 복지에 기여하는 의사가 될 건지 고민해야 해." 이런 학원가의 정형화된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았다.  아이들이 중간/기말 고사를 치를 때마다 같이 시험을 치르는 것 같았고, 수능 모의고사를 볼 때면 수업에 다뤘던 제시문이 나오지는 않았는지 시험지 공개 시간에 맞춰 다운받아 들춰 보았다. 성적이 오른 아이들은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했지만 그 효과는 며칠 가지 못했고, 최상위권 아이들은 그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고, 성적이 떨어진 아이들은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비통해하며 논술 수업을 중단했다. 똘똘하고 잘 따르는 제자에게 뭐라도 더 해 주고 싶은 마음은 드라마 속 서혜진, 이준호 선생과 같았다. 당장의 성적보다 긴 호흡으로 공부할 수 있는 역량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도.


   매년 바뀌는 입시 체제와 대학별 전형을 파악하느라 10년을 고3처럼 살았다. <졸업>에서 그리는 강사들의 생활은 실제 강사들의 모습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리지만 강의 시간 이외의 노력을 제대로 반영하지는 못했다. 실제로 수업보다 그 수업을 준비하고 수업 결과를 갈무리하는 과정이 더 긴 시간과 많은 노력을 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드라마가 내 폐부를 찌르는 건 특목고, 인서울 대학의 입시 도우미로 존재했던 그 시절이 너무 생생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는 빨리 진로를 결정하고 자신을 탐색하라고 가르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내가 꿈꾸던 일이 아니라 어쩌다 경험했는데 나한테 잘 맞는 것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저 읽고 쓰는 일이 좋아서, 말이 통하는 몇몇 학생들이 주는 에너지로 버티며 그 일을 했지만 3년 뒤, 아니 당장 내년에도 뭐가 되어야 할지 모르고 방황했다. 그 시절 친한 아이들은 나를 곰샘이라 부르며 따랐고, 나는 아이들의 진로를 상담하며 내 진로를 고민하는 덜 익은 선생이었다.




명함 너머의 나 되기


   강사 생활을 접고 회사 생활을 시작할 때 저녁과 주말이 있는 삶이 가장 큰 혜택으로 다가왔다. 회사원이라고 언제나 칼퇴근할 수 있고 퇴근 뒤에는 회사 일 따위 싹 잊고 지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정해진 퇴근 시간이 있었고 휴일에는 쉴 수 있었다. 또 강사처럼 일하는 시간보다 일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을 더 많이 써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것만으로도 좋았다. 좋아하는 책도 읽고 여기저기 강좌도 찾아다니고 짧은 여행도 자주 다녔다. 그런데 점점 회사의 가치, 내 직함이 '나'가 되어 갔다. 처음엔 그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달이 가고 해가 갈 때마다 지금 이곳에서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 있을지, 남들보다 뒤처져 있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그 결과는 앞글에서 밝힌 것처럼 심신상실 직전 상태.


   회사원이 되고부터는 주말이나 휴가를 이용해 자주 여행을 다녔다. 주로 국내 구석구석 자동차 여행을 하거나 캠핑을 다녔고, 일 년에 한두 번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시아 관광을 다니기도 했다. 그럴 때면 잠깐이라도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와 휴식을 누리는 것 같았다. 낯선 장소에서 새로운 것들을 보고, 듣고, 먹으며 일에서 멀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사실 주말 여행은 꽉 막힌 도로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겼고, 해외여행은 남들도 다 가 본다는 여행지를 도장깨기 하듯 다녔지만 리프레쉬 이상의 소득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여행을 다니는 일이 더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여행마저 없었다면 아마 진작 넉다운 되었을 테지만.


마음의 평화를 찾아 가끔 찾아가는 제주 함덕 서우봉 해변


   퇴근을 하면 명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느 회사, 어느 부서, 어떤 직책의 내가 아니라 그냥 나로 지내고 싶었다. 여행이 도움이 되긴 했지만 자주 갈 수도 없고 시간과 비용에 비해 효과가 적었다. 그러다 산책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자연인인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차를 두고, 햇빛과 더위, 추위에 취약한 사람이 어쩌다 산책에 빠졌는지 나도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특별하지 않은 공간을 걷고 있어도 산책하는 동안은 나를 답답하게 만들었던 시공간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눈 앞에 보이는 풍경과 내 피부를 스치는 바람, 신발 바닥에 닿는 지표의 느낌,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음악만이 산책하는 나의 시공간을 구성한다. 이 시간만큼은 명함에서 벗어난 이름 없는 산책자로 존재한다. 별다른 준비도 필요하지 않다. 편한 신발과 편한 옷, 햇빛을 가려 줄 모자 정도면 충분하다. 이렇게 1년 정도 산책을 하는 동안 이직과 과로, 퇴사를 경험했지만 전처럼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더 자주 산책을 다니고 글 쓰며 잘 지내고 있다. 그동안 명함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아무도 아닌 사람 되기


   미드 <왕좌의 게임>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아리아 스타크이다. 윈터펠의 영주 에다드 스타크의 딸로 남자아이 같은 성격에 검술을 즐기는 아이다. 왕의 핸드였던 아버지, 에다드 스타크는 이미 시즌 1에서 모함으로 비참하게 죽었고 시즌을 거듭할수록 가문이 몰살 위기에 처해 가는 상황. 시즌 6에서는 아리아가 복수를 다짐하며 자유의 도시 브라보스로 가는 내용이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서 아리아가 살인 병기로 훈련을 받는 과정이다. 언젠가 아리아가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는 미스터리한 인물, 자켄이 그의 스승이다. 그런데 이 훈련이라는 것이 자기를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는 아리아 스타크가 아니다.
윈터펠 영주의 딸이 아니다.
나는 아무도 아닌 자(no one)다.


    아리아는 이렇게 자신의 이름, 가문을 지우며 가혹한 훈련을 받는다. 이 훈련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아리아는 스승처럼 얼굴을 바꾸어 가며 암살 명령을 수행한다. 그러나 사적 복수를 하고 난 뒤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스승은 독약을 먹여 아리아의 눈을 멀게 만든다. 그러고는 더 가혹한 훈련을 이어 간다. 눈이 먼 상태에서도 암살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이제 진짜 아무도 아닌 자가 된다. 스승은 아리아의 시력을 다시 회복시켜 주고 다시 암살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아리아는 이 명령에 불복종한다. 그 때문에 습격을 받아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하지만 탈출에 성공한다.


   갑자기 왕좌의 게임 얘기를 꺼낸 건 이 에피소드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은유를 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리아가 영주의 딸에서 가문의 원수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가 되기 위해 했던 훈련은 '아무도 아닌 자'가 되는 것이었다. 아무도 아닌 자는 무엇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아닌 자는 누구로도 변신하여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아무도 아닌 자가 된 아리아는 스승의 가르침에 복종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거기에서 벗어나 다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더 이상 아무도 아닌 자가 아닌 '아리아 스타크'가 되기를 선택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무도 아닌 자가 되기 이전의 아리아와 그 이후의 아리아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스타크 가문의 딸이라는 정체성과 누구라도 될 수 있지만 아리아 스타크가 되기로 선택한 인물의 정체성은 다른 차원의 것이다.


한송사 터 석조보살좌상


   우리 대부분은 아리아 스타크처럼 살생부를 만들어 가문의 복수를 수행해야 하는 가혹한 운명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가끔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가정과 사회에서 주어진 역할은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소중한 것들이지만 누군가의 부모, 누군가의 자식, 어느 회사의 누구로만 산다면 진짜 자신의 모습이 무언지도 모른 채 평생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런 역할들이 요구하는 의무에 충실하며 성실하게 사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역할에만 매몰되어 살면 다른 무엇이 될 가능성들을 보지 못하거나 기회를 놓치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산책을 한다. 산책을 하며 하루 한두 시간이라도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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