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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C Jul 19. 2024

나무말미에 나선 산책

폭우 끝에 거닌 마장호수

   이번 주는 내내 폭우가 쏟아졌다. 며칠 전에는 산책이 너무 고파 비가 잠깐 그친 틈에 집을 나섰다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져 15분 만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냥 들어오기가 아쉬워 차에 앉아 양동이로 퍼붓듯이 내리는 비를 한참 바라보다가 들어왔다. 여름 들어 헬스장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걷는데도 러닝머신 위에서 걷는 건 산책을 대체하지 못했다. 오늘은 다행히 비가 그쳤다. 저녁부터 다시 비가 온다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이렇게 장마 중에 날이 잠깐 개어서 풋나무를 말릴 만한 겨를을 '나무말미'라고 한다. 나무말미는 선배가 운영하는 출판사 이름이기도 하다. 이 귀한 나무말미에 선배는 책을 만들겠지만 백수인 나는 산책에 나섰다. 고민할 것도 없이 마장호수로 달려갔다. 이 비에 호수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곳곳에 구멍이 나고 토사로 뒤덮인 구간이 있었지만 다행히 정상적인 통행이 가능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책로로 들어서자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2024.07.19 폭우로 부유물에 뒤덮인 마장호수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앞에 서니 너무 처참했다. 이 부유물들이 어디서 흘러들어온 건지 궁금해 호수로 흘러드는 계곡길을 따라 올라가 보았다. 아직 물살이 거셌다. 물길을 따라 나 있는 산책로로 200미터쯤 올라가다 보니 폭우에 부러진 나뭇가지들과 출처를 모를 쓰레기들이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2024.07.19. 마장호수로 흘러드는 계곡물


   계곡을 따라 걷는 동안 좀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이 거센 물살에 누군가는 집을 잃고 누군가는 다치거나 생명을 잃기도 했을 거라는 생각에. 궁금증은 해소됐으니 다시 발길을 돌려 마장호수로 내려갔다. 산책로는 침수된 곳은 없었으나 몇 곳은 통제선이 쳐져 있었고, 토사로 뒤덮인 곳도 있었다. 아직 산에서 여기저기 물줄기를 내려보내고 있어 복구에는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



   군데군데 암울한 광경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보는 햇빛이라 그랬는지 오늘따라 더 청명했다. 햇빛이 비치자 나무들도 물기를 털어내고 초록의 색과 향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오늘처럼 반가웠던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며 그 초록을 눈과 코, 피부로 마셨다.



   진한 녹색으로 보이던 호수는 황하강의 물처럼 누런 색으로 변해 있었다. 비록 지금은 부유물로 더럽혀지고 흙탕물이 되었지만, 호수를 둘러싼 산에서 저마다 토해 낸 물과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엄청난 물들을 모두 품고 있는 이 호수가 대견했다. 호수는 다시 제 모습을 찾을 것이다. 매해 여름 그랬던 것처럼. 사람의 손길이 아니더라도 아마 그 특유의 넉넉함과 평온함으로 부유물은 흘려 보내고 흙은 침전시켜 푸른 호수로 돌아올 것이다. 작은 충격에도 스트레스 수치가 치솟는 나는...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중에서



   이 와중에도 청둥오리, 자라, 민물가마우지는 먹이를 찾아 바쁘게 흙탕물을 헤집고 다녔다. 숨 쉬는 것들 중에 지겨운 밥벌이에서 자유로운 건 없구나.



   거의 닫아 두었던 수문을 오늘은 활짝 열었다. 시원한 물소리를 내며 연무를 뿜어냈다. 그 연무 사이를 걷는 동안 시원함이 피부로도 느껴졌다. 이렇게 내려보낸 물이 다른 어딘가에 피해를 주지 않기를...


나무를 감싸며 올라가는 칡덩굴


   칡덩굴이 산비탈과 도로 귀퉁이까지 나와 있더니 이렇게 나무 줄기를 타고 올라 그 나무인 양 꽃을 피워버렸다. 시골길을 가다 보면 전봇대나 가로등에 둥근 바가지 같은 걸 매달아 놓기도 하는데 이 칡덩굴이 올라오는 걸 막기 위한 것이다. 이 질긴 생명력. 그렇게 잘라내고 뽑아내도 굴하지 않고 자라고 또 자라 기어코 존재하고야 말겠다는 이 징그러운 생명력이 부럽기도 하다.



   도토리와 밤도 햇빛과 물, 바람으로 힘차게 영글고 있었다. 반짝이는 초록잎과 연두색 작은 열매들이 신선하고 상쾌한 무언가를 내뿜는 것 같았다. 잠시 그 아래에 서서 초록 기운을 충전했다.



   돌아가는 길 다시 계곡물과 토사로 엉망이 된 산책로를 만났다. 모래주머니를 징검다리 삼아 건너며 출퇴근길이 고됐을 직장인, 피해를 입은 사람, 맘 졸이며 일했을 공무원과 소방관 들이 떠올라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씨워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 <쉽게 쓰여진 시> 중에서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한발 비켜 서 있기 때문일까. 이런 날이면 마음이 편치 않다.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 흠뻑 물 먹은 비비추꽃이 잘가라고 인사하듯 산책로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비비추꽃말을 찾아보니 좋은 소식, 신비로운 사람,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고 한다. 장마가 끝나고 태풍이 지나고 나면 또 좋은 소식이 오겠지.



   모두 안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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