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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C Jul 12. 2024

계곡이냐 해변이냐

양양 산책기

   7월의 첫 주말, 양양에 다녀왔다. 양양은 이제 서핑의 성지가 되었지만, 그건 2017년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개통한 뒤의 일이다. 불과 10년 전까지 양양은 강원도 영동 지역에서 해수욕장과 계곡으로 알려진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여름 휴가철과 연초에 일출을 보기 위해 가끔 찾기는 했지만 속초나 강릉처럼 숙소나 편의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곳이라 동해에 왔다가 잠깐 거쳐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면 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44번 국도를 타고 한계령을 넘곤 했다. 길도 험하고 운전도 힘든데 왜 굳이 그 길로 가냐는 사람이 많지만, 설악산 계곡을 타고 한계령을 지나 오색약수로 이어지는 절경을 본다면 그 정도의 불편함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2024.03.29. 한계령


   숙소는 어성전 계곡을 끼고 있었다. 숙소 한켠에 중정처럼 삼면이 벽이고 한면은 방을 향해 난 큰 창이 있는 작은 정원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엔 저마다 다른 색과 모양의 개구리 너댓 마리가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숨을 쉬느라 볼록거리는 볼살과 뱃살이 아니라면 살아있는 게 맞나 할 정도로 움직임이 없었다. 대체 저 개구리들이 벙커 같은 저 공간에 어떻게 들어간 걸까? 2.5미터 높이 정도의 벽을 뛰어내려 왔을까 아님 미끄러진 걸까 하는 생각을 하다 펄쩍 뛰는 개구리에 놀라 방에서 나왔다. 그래도 몇 번을 들락거리며 사진을 찍고 움직이는 모습을 들여다봤다. 유리 너머의 개구리는 조금 휑한 펜션의 방을 왠지 생기 있게 만들어 주었다. 한편으론 장마철이라 지금은 견딜 만하겠지만 건조한 날이 이어지면 위험할 것 같아 꺼내 줘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숙소에 도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원한 소나기가 내렸다. 계곡 물소리와 소나기 내리는 소리, 숲에 바람이 부는 소리, 매미 소리와 새 소리가 뒤엉켜 귀부터 시원해졌다. 그렇게 소나기 내리는 걸 한참 바라보다가 비가 그치자 계곡으로 내려갔다. 이곳은 어성전 계곡인데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법수치 계곡으로 이어진다. 이 계곡을 흐르는 물은 오대산에서 내려오는 것이라 한다. 비가 내리면 산의 흙과 바위, 풀과 나무가 물을 흠뻑 먹고 넘치는 물은 계곡으로 토해내는 것이다. 이 계곡을 흐르는 물은 남대천을 지나 동해로 흘러간다.


2024년 7월 초, 어성전계곡


   큰 바위부터 손톱만한 조약돌까지 동글동글한 돌들이 물의 흐름에 따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큰 돌을 골라 밟아 가며 물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흐르는 곳으로 이동했다. 각기 다른 돌에 한 발씩 딛고 서서 물 흐르는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아주 오래 전 어린 조카와 계곡에 놀러왔다가 흐르는 물을 한참 들여다보던 아이가 호로록 먹은 걸 토해내던 때가 생각나 웃음이 났다. 그런데 한 곳에 초점을 두고 찍느라 계속 한곳을 보고 있던 나도 약간 어지러워 영상은 1분으로 끝내야 했다.


2024년 7월 초, 어성전 계곡


   계곡 상류에는 거칠고 날카로운 돌이 많지만 이렇게 하류에 있는 돌들은 물과 바람에 깎여 둥글둥글하다. 이렇게 둥근 돌들은 모양도 색깔도 다 제각각이지만 맨발로 밟아도 발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사람도 이렇게 둥글둥글해지는 건가 생각했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런 것 같지 않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열정과 패기, 호기심은 줄어들지만 고집과 편견, 오만은 늘기 쉽다. 마치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오르는 배처럼 열심히 노를 저으며 나아가지 않으면 역수의 흐름에 휩쓸려 제자리를 지키기도 어렵다. 곱게 늙기란 정말 챌린지 중에 챌린지다. 잠깐의 계곡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숯을 피워 주문진 시장에서 사 온 조개를 구웠다.


주문진 시장에서 사 온 뿔소라, 섭(자연산 홍합), 가리비, 석화 등등의 조개들


   다음날은 일찍 일어나 계곡을 한 바퀴 걷고는 짐을 챙겨 식당으로 향했다. 1시간 가까이 대기한 끝에 먹은 황태구이와 황탯국은 별 감동이 없었다. 우리 일행은 말을 아끼며 해변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장마 기간이어서 그랬는지 해변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흐린 날씨에도 나 같은 서핑 초보들이 보드 위에 엎드려 패들링을 하다 테이크오프 순간 대부분 2초 이내 고꾸라지고 있었다. 하하핫, 왠지 다시 도전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광경이었다. 내가 해변을 걷던 그 시간에는 대부분 서핑을 배우러 온 사람들이었는지 멋지게 파도를 타는 고수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진짜 고수들은 이제 다른 곳으로 가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 트렌드에 무감한 내가 여기서 타 봤을 정도면 우리의 트렌드 세터들은 이미 또 다른 곳을, 다른 걸 찾았겠지 하며 걸었다.


   나는 모래밭에서 걷는 느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힘이 더 들고 발에 모래가 묻어 싫기도 하지만, 내 몸을 내 마음대로 가누지 못하는 느낌이 유쾌하지 않다. 발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뜨거운 모래 알갱이가 연한 살을 다 익혀버릴 것 같은 느낌도,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채워지며 발가락이 벌어지는 느낌도 재밌지 않다. 나 모래 혐오자였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러기엔 모래성 쌓기와 모래찜질을 너무 좋아했으니 그건 아닌 듯하다.


   하조대 근처 서피비치와 인구해변을 차례로 가 봤다. 서피비치는 서핑에 처음 도전했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찾았다가 짠한 마음이 들 정도로 한때 잘나가던 나이든 아이돌 가수의 느낌이 들어 얼른 발길을 돌렸다. 인구해변은 동네 전체가 서핑타운 같았다. 서핑 강습을 겸하는 민박집들과 아기자기한 카페들, 서핑수트를 입거나 최소한의 수영복만 걸친 이들이 이질감 없는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해변의 이 자유분방함이 좋다. 여기서 느껴지는 젊음도. 그 순간 소설 <은교>에 등장하는 이적요 시인의 일갈이 떠오른 걸 보면 나도 이제 젊음과는 멀어지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하나 보다.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2024년 7월 인구해변


   그 자유와 젊음의 풍경에서 조금 이질적이었던 우리 일행은 잠깐의 산책을 마치고 얼른 카페로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집으로 출발했다. 계곡과 해변을 두고 이상형 월드컵에 올린다면 아직 난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없을 것 같다. 중년이란 내 나이가 그렇듯. 계곡과 해변 그 사이를 어중간하게 어슬렁거리는 지금의 내 모습이 조금 아쉽긴 해도 나쁘지는 않다. 며칠 전 골골거리는 친구에게 몸 좀 잘 챙기고 네 사전에서 '늙음'을 지우라고 말했다가, 너도 이제 나이 드는 걸 받아들이라는 답을 들었다. 난 아직 그게 안 된다고 답했지만 지금 내게 이건 허와 불허 또는 가와 불가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다. 아직은 내 머리가 나를 늙었다고 인식하는 게 싫다. 그걸 인식하는 순간 내 스스로 도전과 호기심과 가능성의 높이를 모두 끌어내릴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너'도 남의 말 좀 들어라. 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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