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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C Jul 26. 2024

연꽃 사이를 거닐다

여름 산책 코스의 백미, 연꽃 군락지

   해마다 여름이면 문득문득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연꽃 피는 시기를 놓쳐 못 보고 지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처음 연꽃에 반했던 건 2007년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른에 접어들 무렵이었죠. 당시 전라도의 매력에 빠져 여름 휴가 때면 전주, 고창, 담양, 무안, 해남, 장흥, 보성 등등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전주에서 한옥마을을 구경하고 한지와 붓을 사고 어디 갈 만한 곳이 없나 찾던 중 덕진공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공원에 들어서는 순간, 처음 본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더군요.


2007년 7월 30일 전주 덕진공원


   4만 5천 평이라는 거대한 호수의 2/3를 뒤덮고 있는 녹색 잎들과 그 사이로 비죽비죽 얼굴을 내밀고 있는 연꽃이 장관이었습니다. 7월도 거의 다 지난 시점이라 연꽃은 막바지인 듯했습니다. 꽃이 진 자리에는 스탠딩 마이크처럼 생긴 꽃턱이 남아 있었습니다. 사실 덕진공원에서 시각보다 먼저 자극을 받았던 건 후각이었습니다. 주차장부터 뭔가 신선하면서도 달큰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죠. 공원에 들어서자 이 넓은 호수가 녹색 연잎과 연분홍 꽃으로, 그리고 연꽃 향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무더운 날씨에도 공원 산책로를 한 바퀴 걷고 그늘도 없이 길게 놓여 있는 저 현수교 위를 걸으며 연꽃을 감상했습니다.


   한번 연꽃을 만나고 나니 해마다 이 계절이 되면 연꽃 향기가 그리워집니다. 수련은 5월부터 피기 시작하지만, 연꽃은 보통 7월이 되어야 피기 시작합니다. 한여름에 피는 꽃인 만큼 연꽃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폭염이나 비를 각오해야 합니다. 덕진공원은 이후로도 여러 번 다시 찾았는데 갈 때마다 조금씩 모습이 변해 지금은 아주 다른 광경이 되었습니다. 호수 가운데 한옥 도서관을 지어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책도 읽고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더군요. 올해는 수질 개선을 위해 호수 준설공사를 하느라 연꽃을 보기 어렵다고 하니 아쉽습니다.


전주 덕진공원 내 한옥도서관


   본격적으로 연꽃을 테마로 여행을 계획하고 찾은 곳은 전남 무안의 회산백련지였습니다. 회산백련지는 일제시대 농업용 저수지로 조성된 곳을 1955년 어느 농부가 연을 심기 시작하여 90년대부터 연이 급속도로 퍼져 본격적으로 백련지를 조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회산 백련지는 넓이가 33ha, 약 10만 평으로 동양 최대의 백련 자생지라고 합니다. 덕진공원의 두 배가 넘는 크기니 걷는 거리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아침 일찍 나섰지만 폭염 속에 다니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2013년 7월 무안 회산 백련지


   저수지의 둘레는 3km 정도라고 하는데 둘레에서는 연꽃을 제대로 볼 수 없어 호수 위에 설치한 산책로를 누비고 다니면서 5km가 넘게 걸었던 것 같습니다. 백련이 가장 많았지만, 수련이나 가시연 등 다양한 연꽃을 볼 수 있고 수상 유리온실에서 잠시 쉬며 연꽃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곳에서 연꽃만큼 매력적이었던 것은 호수를 감싸고 있는 둑길에 가로수처럼 서 있던 배롱나무였습니다. 연꽃이 필 무렵 배롱나무도 만개하는데, 서울에서 보던 배롱나무 꽃하고는 뭔가 다른 것 같았습니다.


2013년 7월 회산 백련지 주변에 있는 배롱나무


   훨씬 더 강렬한 붉은색이었습니다. 매끈한 줄기와 진한 녹색 잎, 선명한 진분홍 꽃이 조화를 이룬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한번 눈에 들어 오니 거리를 지날 때마다 배롱나무가 많이 눈에 띄었는데 남부 지방에서는 가로수로 흔히 볼 수 있더군요. 무안에서는 이렇게 드넓은 백련지 사이를 종횡무진하다가 지치면 둑으로 올라가 배롱나무 그늘에서 몸을 식혔습니다.


   이렇게 전라도의 매력에 빠져 여름이면 폭염에도 이곳들을 다시 찾곤 했습니다. 그러다 강원도 본가 가까이에도 연꽃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화천군 하남면 서오지리에 있는 연꽃마을입니다. 춘천에서 화천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데, 현재 본가인 춘천과 가깝고 고향인 화천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더 의미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https://naver.me/5vIU33Wu


   이곳은 연못이나 저수지가 아니라 지촌천과 북한강 줄기가 만나는 지점, 오목하게 패여 물살이 호수처럼 잔잔한 곳입니다. 춘천에서 5번 국도를 타고 화천쪽으로 가다 보면 신포리를 지나게 되는데 연꽃마을로 가려면 현지사 옆으로 난 길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그래서 이곳을 연꽃마을건널들이라고 하나 봅니다. 2005년부터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저는 이곳을 2010년 무렵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호수나 연못과 달리 강 줄기 한켠에 자리잡은 연꽃 군락은 이색적이었습니다. 연꽃 군락 너머로 보이는 고요한 강 풍경도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는 곳이죠.


2023.07.09. 화천 서오지리 연꽃마을건널들


   여름만 되면 이렇게 연꽃을 찾아 이곳저곳을 다니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들뜹니다. 예전에 찾았던 곳을 다시 찾아 거닐고 싶기도 하고 새로운 곳을 개척하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어제는 오래 내린 비와 폭염으로 머리도 몸도 묵직해 연꽃 향기가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산호수공원을 찾았습니다. 수련에 비해 연꽃은 적은 편이지만 향기는 만족스러웠습니다.


2024.07.25. 일산호수공원에서


   낭만적이었던 우리 조상님들은 여름이면 ‘청개화성(聽開花聲)’을 위해 이른 아침 배를 타고 연꽃 사이를 누비셨다고 합니다. 이른 아침 연꽃잎이 피는 소리를 듣는 거죠. 고요한 새벽 노 젓는 소리, 숨 소리마저 죽이고 귀를 기울여 연꽃이 피는 소리를 들으러 가는 모습이라니, 저는 아직 따라가려면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꽃 피는 소리를 듣는 경지는 아니지만, 연꽃 향기를 찾아다니는 저도 한량의 피가 흐르나 봅니다. 연꽃 향을 뭐라고 묘사하면 좋을지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지만 다른 꽃 향기와 다르게 훨씬 신선하고 상쾌한 향이 납니다. 숲에서 나는 피톤치드 향과 맑은 꽃 향기가 어우러진 느낌입니다. 말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제가 찍은 사진으로 이 향이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염화미소(拈華微笑)라는 말처럼. 어제 아침에는 이 은은하고 맑은 연꽃 향기에 취해 공원을 거닐며 지난 여름의 기억들을 줄줄이 소환해 보았습니다. 곧 연꽃이 모두 지고 꽃턱만 남기 전에 자주 보러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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