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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C Aug 09. 2024

7년 동안의 잠, 한 달 동안의 삶

산책길에 만난 매미

   장마가 끝났지만 폭염으로 산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른 아침에도 30도에 육박하는 기온과 높은 습도로 밖에 나가기가 망설여지네요. 그래도 집 안에만 있자니 갑갑한 느낌이 들어 이른 아침이나 밤 10시 이후에 가끔 산책을 나갑니다. 아, 요즘엔 산책을 방해하는 요소가 하나 더 생겼더군요. 바로 말라리아 모기입니다. 저의 생활권인 파주와 고양은 모두 말라리아 경보가 내려졌습니다. 저녁 시간, 어두운 옷, 호수공원이나 물웅덩이 근처를 피하라는 행동 지침을 내렸더군요. 야간에 어두운 색 옷을 입고 호수공원 산책을 즐기는 저에게 하는 말인 것 같아 뜨끔했습니다.


   이번 주 산책에는 매미들의 소리가 워낙 커서 귀가 아플 정도였습니다. 저 작은 몸집에서 저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인간이 만든 스피커 중에 매미 만한 크기로 저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게 있을까 궁금합니다. 또 바닥이나 나무에 매미 성체는 물론이고 우화 중인 매미와 매미 허물도 보이더군요. 아마 요즘 길을 걷다 나무 줄기를 유심히 보시면 매미 허물이나 우화 중인 매미를 많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매미를 만날 때마다 조건반사처럼 떠오르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박완서 선생의 『7년 동안의 잠』입니다. 한동안 초등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작품이기도 하죠. 이 책의 앞표지에는 개미가, 뒤표지에는 매미 유충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뒤표지에 있는 매미 유충 위에는 "야, 크고 싱싱한 먹이다. 싱싱하고 큰……."이라는 문장이 쓰여 있습니다. 이 문장은 누구의 대사일까요? 매미 유충의 대사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는 개미의 대사입니다. 아스팔트로 뒤덮인 도시에서 먹이를 구하기 어려웠던 개미들에게 매미 유충은 크고 싱싱한 먹이였던 것이죠. 그렇다면 이 매미 유충은 개미의 먹이로 생을 마감하게 될까요?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책의 제목처럼 우리나라에서 사는 매미들은 종에 따라 유충 상태로 땅속에서 3년, 5년, 또는 7년 동안 자랍니다. 나무 뿌리의 수액을 먹으면서 생명을 유지한다고 하죠. 이 책의 매미는 7년 동안 유충 상태로 성장하는 종입니다. 어두운 땅속에서 7년 동안이나 수액을 먹으며 조금씩 성장하는 매미 유충을 떠올리면 약간 폐소 공포가 있는 저에게는 공포감이 들 정도로 답답한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 자라서 7년 만에 지상으로 올라와 탈피하여 성충이 됩니다.


탈피를 마친 매미의 허물


   매미가 유충으로 지내는 기간은 종에 따라 3~17년 정도라고 하는데, 3, 5, 7, 13, 17 같은 소수(數)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것이 통합논술 문제로 자주 등장하던 논제여서 한때 논술 강사였던 제겐 매미 하면 떠오르는 조건반사 2가 되었습니다. 매미가 3, 5, 7년 등의 생애 주기를 갖는다는 것은 그 주기마다 번식을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편 매미의 천적들의 생애 주기가 2~6년 이라고 하면 이들이 만나는 해는 매미와 천적의 생애 주기의 최소공배수가 되는 해입니다. 예를 들어 생애 주기가 7년인 매미가 생애 주기 2년인 천적을 만나는 것은 14년 주기가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매미의 생애 주기가 소수인 것은 천적과 만나는 주기를 최소화하기 위한 생존 전략인 것이죠.


   그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쳐 지상으로 올라온 매미에게는 약 한 달의 삶이 주어집니다. 이 기간 동안 수컷은 목청껏 울며 암컷을 찾아 짝짓기를 마쳐야 합니다. 암컷은 신중하게 수컷을 선택하여 자신들의 유전자를 보존할 알을 낳아야 합니다. 한여름 더위 속에서 작열하는 태양 아래 나무 한 그루를 생명을 유지할 집으로, 먹이로 의지하며 사는 그 한 달의 삶이 전부인 것이죠. 수년을 땅속에서 인내하여 얻은 삶이 너무 짧은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도 듭니다. 그래서 매미를 만날 때마다 지금이 그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번 산책에서는 매미의 허물만큼이나 생명이 다한 매미들도 여럿 보았습니다. 한 달의 삶이 어땠을지, 할 일을 다 마치고 삶을 마감한 것인지 문득 궁금해지더군요. 이 여름 한철이 이들에겐 눈부신 지상에서 맞이한 아름다운 삶의 기간이라 생각하니 이 계절이 뭔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매미들에게 땅 위에서의 찰나 같은 삶이 눈부셨듯 부디 땅속에서의 시절도 아름답기를 바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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