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내게 가을은 무슨 의미인가?" , 예년에 생각지도 않던 질문들이 나를 일깨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을을 떠올리며 풍요로움과 따듯함을 말한다. 먹거리가 없던 내 어릴 적 기억에도, 가을은 축제와 환희다. 100m 달리기에서 겨우 4등밖에 못해 속상하긴 했지만 한 다라 가득 준비해 온 음식 속 계란말이를 생각하며 전날밤부터 나는 설렜다. 친구가 매일 점심반찬으로 싸 오던 그 계란말이에 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의 도시락을 보며 침 흘리던 그 계란말이로 배를 채우고 온 힘을 다해 응원을 했고 계란말이를 다 소진할 때까지 열띠게 경기에 참여했다. 계란말이는 온 학교를 축제의 열기로 들썩이게 했다. 가을은 내게 풍만한 즐거움이 가득 찬 계절이다.
두둑해질 주머니가 나의 가을을 빛냈다.
추석은그렇게 내 가을을 특별하게 했다.넉넉하지 않은 시골살이다. 추석이면 온 가족이 모두 모였고 엄마의 수고로움이 장만한 튀김과 전으로 가을의 두 번째 잔치상을 한가득 담는다. 우리는 그런 엄마의 정성을 맛보며 가을 축제를 또 한 번 즐긴다. 그때는 엄마가 해 준 오징어 튀김과 고구마튀김이 어찌나 맛있던지 고소한 튀김냄새로 물든 집을 온종일 지켰다. 와글와글 대식구의 잔치, 타지에 나가 각자 생활을 하는 언니, 오빠의 그간의 생활이 푸짐한 먹거리를 따라 풍성하게 터져 나오는 시간이다. 그리고 난 두둑한 용돈까지 받으니 그 어떤 날보다 기다리는 날이었다.그래서 가을은 나에게 늘 풍성하고 따뜻한 계절로 다가온다.
어린 시절 내게 가을은 풍성함의 연속이었고 그 순간들이 지금 떨어지는 낙엽을 통해 또 나를 돌아보게 한다. 하지만, 이제 가을은 내게 다르게 다간 온다. 중년이 된 지금, 낙엽을 보며 들떠 뛰놀던 아이는 더 이상 없다. 그 대신, 낙엽을 밟을 때 느껴지는 바스락 소리는 마음 깊숙이 스며들며 잠자던 나의 감성을 일으킨다.
며칠 동안 장대비가 내렸다. 빗물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 무언가를 예고하는 듯했고, 계절이 변하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계절의 변화는 단순히 한 가지 요소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뜻한 햇살, 시원한 바람, 그리고 하늘을 덮은 구름과 비, 이 모든 자연의 힘들이 어우러져 세상의 모든 생명에 변화를 일으킨다. 이 변화는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와 함께 겉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렇게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세상을 달구었고, 사람을 달구고 나를 달구었다. 그리고 몇 날 내리던 비는 그 열기를 식히며 자연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돕는다. 집 앞 꽃사과 나무는 열매와 잎을 모두 떨어뜨리고, 신갈나무와 벚나무, 그리고 때죽나무도 그동안 간직했던 누런 잎들을 땅으로 쏟아낸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나의 여름이 끝났음을 깨닫는다. 한여름의 더위를 가까스로 견뎌낸 낸 몸이 이제 차갑다 말한다. 그렇게, 나는 어느새 따뜻한 불을 원하고 있다. 이 순간, 자연과 인간의 삶이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실감한다.
어린 시절 가을을 맞이했던 그 뜨거운 기쁨은, 이제 내 앞에 놓인 잔잔한 성찰로 바뀌었다. 더 이상 낙엽은 장난의 대상이 아니다. 어린 시절, 낙엽을 발로 차며 뛰어놀았던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낙엽은 이제 나의 삶과 변화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나무가 낙엽을 떨구듯이, 나도 내 삶의 무거운 짐들을 하나씩 내려놓아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세상사도 무 자르듯
싹둑, 나뉘는 게 아니듯.
추석이 지나도
모든 과일이 다 익는 것은 아니듯.
나와 자잘한 약속들도.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모양을 그려내는 강박 대신에
삐뚤빼뚤 그저 다 찌그러진 동그라미라도
둥글든 네모든 그저 다 찌그러진 동그라미라도
나의 일상 또한 그렇게 흘러 보내야
낙엽을 밟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나에게 인생의 비움을 상기시킨다. 이 소리는 단순한 자연의 소리가 아닌, 내면에서 울리는 메시지다. 낙엽이 떨어지며 비워내는 것처럼, 나 역시 내 안에 쌓인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단계이다.
헤라클리토스가 말했듯이, "만물은 끊임없이 흐른다(πάντα ῥεῖ)." 자연도, 인간도,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한다. 비와 바람, 그리고 낙엽의 소리는 우리에게 변화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이 변화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
가을은 그저 자연의 변화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연결된 중요한 계절이다. 루소가 말한 자연으로의 회귀처럼, 가을은 우리가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것을 성찰할 수 있는 계절이다. 낙엽이 땅으로 떨어지듯, 우리는 우리 내면의 잡다한 생각들을 비워내고 본질에 집중하게 된다.
나도 이제 몸이 부쩍 차가워진 날씨에 민감해졌다. 뜨거운 불을 원하게 되는 것은 단지 물리적인 온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욕구는 내면에서 오는 위로와 안정감을 찾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따뜻한 온기는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고, 다시금 삶을 살아가는 에너지를 불어넣어 준다.
가을은 비움과 채움, 끝과 시작을 동시에 생각하게 만드는 계절이다. 어린 시절의 가을이 축제와 환희로 다가왔다면, 지금의 가을은 내게 비움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계절이다. 낙엽을 밟으며 나는 더 가벼운 마음으로 나의 길을 걸어갈 준비를 한다. 가을은 언제나 그렇게 나를 성찰하게 하고, 다가올 변화를 맞이할 힘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