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보다 더 커진 내 눈을 감추지 못한 순간은 내게 현실을 직시하라 말한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내게 부잣집 맏며느리라는 닉네임으로 나를 프레임 했고, 그 넉넉함을 깨는 순간이 매일 타는 버스에서 깨질 것이라는 것을 나는 일도 생각하지를 못했다.
서울로 가는 버스 안, 한낮의 열기는 여전히 뜨거웠다.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그 시간이 얼마나 길고 고통스러웠는지, 내겐 마치 고행처럼 느껴졌다. 젊은 사람들은 버스 어플을 손쉽게 활용해 탑승 시간을 맞추는 모습을 보면서, 아날로그 방식에 익숙한 나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들은 버스가 도착하자 우르르 몰려와 시원한 차 안으로 사라졌다. 문명이라는 편리함에 적응하지 못한 내 모습이 어쩐지 초라하게 느껴졌다.
차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습기와 체온이 섞인 버스 안을 떠다녔고, 그 속에서 나는 차창 밖 풍경에 시선을 두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들려온 기침 소리가 차 안의 적막을 깼다. 모든 시선이 기침하는 사람에게로 쏠렸다. 코로나 이후, 기침은 이제 그저 기침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마스크도 하지 않은 그 남자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고, 나도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순간 나는 숨을 멈추고 날숨만을 내쉬기 시작했다.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아픈 사람인데, 왜 이렇게까지 경계하게 되는 걸까?' 나는 그저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멀리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이기적인 내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 나의 마음은 그저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그가 다시 크게 기침을 했다. 이번에는 내가 그의 고통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불편함이 나의 불편함이 되어, 그의 고통이 나에게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나는 더 이상 그를 멀리하지 않았다. 그와 나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연결이 생겼다. 내 마음이 그와 함께 움직였다.
나는 곧 시선을 돌려 방금 버스에 탄 젊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샤넬 향기가 내 감각을 자극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모자의 그늘 속에 감춰진 표정, 초롱초롱한 눈빛이 마치 한 송이 꽃처럼 생기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녀의 젊음에 매료되었다. 그 모습은 나의 나이 듦을 일깨웠고, 동시에 잊고 지냈던 나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옹졸했던 마음에서 벗어나 조금씩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자, 문득 강남역의 교보문고가 눈앞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내릴 때가 되었다. 기침하던 그 남자에게 미안한 마음을 남겨둔 채, 나는 만원 버스에서 내렸다.
근처 약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마스크 두 개를 사서 가방에 넣고 넉넉하게 웃음을 지었다. 작은 선의가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강남대로를 걸으며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경쾌한 그 소리에 마스크가 덩달아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나 자신을 돌아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이란, 맨날 나쁜 사람만은 아니다. 내 안에도 착한 날이 있고, 옹졸한 날이 있다. 그런 날들이 차곡차곡 쌓이며, 인생은 그 자체로 한 장의 이야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