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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eph Oct 18. 2020

필리핀 세부, 허름한 1인실

30대 직장인 자가마련기 - 정착에 이르기까지 #10


어학연수. 


티비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할 뿐 아니라, 주변에서도 심심치 않게 다녀오곤 했다. 영어 구사 실력에도 도움이 될 터였다. 과외를 몇 개 하면서 단기 연수를 갈 정도의 돈은 스스로 마련했지만, 영미권으로 다녀오기엔 비용이 부담됐다. 왕복 비행기표만 해도 200만원 가까이 필요한 데다, 현지 학원비며, 생활비를 생각하면 부모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가뜩이나 혼자 결정해버린 휴학에 마음이 무거울 엄마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요청하기도 멋쩍었다. 대안은 필리핀. 영미권 연수의 절반도 안 되는 비용으로 이동부터 숙식이 가능했다. 치안이 걱정되긴 했지만, 마닐라에 비해 세부는 관광으로 먹고사는 휴양도시라 제법 안전하고 한국인에게도 우호적이라는 것이 유학원 설명이었다. '영어는 어느 정도 하세요?'. '뭐 그냥 남들 하는 만큼 하는 것 같아요. 유창한 건 아니고요. ' , '토익이 몇 점 정도 나오시나요?' , '토익은 아직 안 봐봤는데... ' 사실 그맘때 나는 영어가 매우 낯선 형편은 아니었다. 유학원에서도 필리핀은 좀 더 초급자에게 효과가 좋은 곳이라며 에둘러 말했다. 조금 더 무리를 해서라도 호주나 뉴질랜드라도 가는 게 맞을까? 아니면 그냥 한국에서 학원이나 다녀볼까 - 고민하던 차에 유학원 직원이 말했다. '뭐랄까, 세부는 좀 특별하긴 해요. 물론 어학연수니까 영어 배우러 가는 건 맞는데, 두 달 정도 살다 오기에는 천국 같은 곳이죠.' - 천국. 부모님과 다녀온 피피섬이 떠올랐다. 투명한 바다, 햇살. 졸업하고 취업하고 팍팍한 일상을 살다 보면 다시는 누릴 수 없는 기회였다. 그리고 그 기회를 천국 같은 곳에서 보낼 수 있다면 - 짐을 싸는 것은 익숙하다. 여름 나라라 큰 짐도 필요 없었다. 혼자 남겨지는 엄마가 걱정은 되었지만, 언제까지 둥지에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니까. 더 나은 곳으로 가기 위해 잠깐의 유랑과 휴식이, 나에겐 필요한 것이다.






밤 비행기로 도착한 세부.


지상낙원은 온데간데없이, 우리나라 시골 버스터미널보다도 열악한 공항. 축축한 공기와 날벌레, 요상한 냄새는 나를 순식간에 두려움과 후회로 가득 채웠다. 여기서 두 달을? 더운 공기 탓인지 가슴이 턱 막혔다. 입국장에 나오니 틀린 스펠링으로 적힌 내 이름의 피켓을 들고 있는 직원이 보였다. 만날 사람을 못 찾으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이 작은 공항에서 미아가 되는 것이 더 어렵겠다. 직원은 서툰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지만 나는 경계심을 떨칠 수 없었다. 백팩 주머니를 더듬으며 여권이 어딨는지 되짚었지만 별 수 없다. 나는 이 남자를 따라가야 한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향했다. 덜커덩 덜커덩,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차는 계속 걸려댔다. 부모님 없이 혼자 외국에 나온 것은 처음이라 잔뜩 겁을 먹은 상태였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정말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한밤중에 도착한 세부는 덥고, 축축하고, 까만 밤이었다. 띄엄띄엄 가로등만 있어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여기 서툰 한국말로 운전하는 이 필리핀 사람에게 좀 더 말을 걸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30여분쯤 달렸을까? 허름한 시골집 앞에 차가 섰다. 내 짐들이 내려지고, 남자는 건물 안으로 나를 데려갔다. 공포영화에 나올법한 방문이 끼이익 - 열리는 소리도 스산했다. 침대와 책상 하나가 덩그러니. 화장실이 딸려 있어 다행이었다. 낙후한 시설, 조명이랄 것도 없이 늘어진 전구. 어디서 작은 도마뱀이 나오진 않을까? 맘을 졸였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공간이지만 내 선택이니 별 수 없다. 내가 적응해야지.


내가 머물던 곳은 한국으로 따지면 기숙사와 학원이 같이 운영되는 학사 시스템이었는데 보통은 2인 1실을 썼다. 재수 없고 이기적이지만 (일반화는 아니다. 그저 내가 그랬을 뿐) 외동딸로 살아온 지 20여 년이라 모르는 남과 방을 쓰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한 달 비용으로 십여만 원을 추가하면 학원 옆에 위치한 별도 건물에서 혼자 방을 쓸 수 있었다. 아침이면 학원 셔틀이 1인실 사람들을 태우러 왔다. 말이 셔틀이지 이곳에서 돌아다니는 대부분의 교통수단은 트럭 비스무리한 것을 개조한 툭툭이다. 이미 친분이 있어 보이는 다른 방 사람들이 고맙게도 먼저 인사를 건네줬다. '네 안녕하세요...' 멋쩍고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서야 툭툭이가 출발한다. 매캐한 기름 냄새가 자욱하게 뿜으며 덜덜거리는 툭툭이. 어쩌다 내가 이걸 타고 있는지. 모래바람이 이는 비포장도로 곁으로 커다란 파인애플 간판이 보이고, 1분 정도 더 달리니 학원이 나타난다. 분명 신축인데, 허름한 건물. 명백한 비호감이다. 유학원 직원이 말하던 천국은 온데간데없다. 아주 다행히도, 그 묘한 신축 건물에서의 생활은 처음 세부공항에서 느낀 실망보다는 점차 나아졌다. 잦은 이사로 훈련된 적응력 덕분인지, 새로운 환경에 던져진 나는 공간이 주는 허름함을 금세 잊었다. 스무 살 갓 먹은 어린애들부터 마흔이 넘은 이모, 삼촌들과도 쉽게 어울렸다. 영어를 배우는 환경답게 누구나 영어 이름을 썼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도 반말을 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금방 스몰토크를 할 수 있었다. 언어와 환경이 주는 무드가 이렇게 달랐던가?


학원에 소속된 영어 선생님들은 대체로 상냥하고, 우수했다. 필리핀식 영어라는 선입견이 싹 사라질 만큼 발음도 좋고 체계적이었다. 그중에도 조이는 나와 각별했다. 대학을 졸업한 선생님이라 나는 그녀가 나보다 꽤 언니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나와 동갑내기였다. (필리핀의 학제는 우리나라와 다르다.) '조이는 왜 영어 선생님을 하게 됐어?' , '어려서부터 영어가 편했어. 내가 가장 조금 노력해도 할 수 있는 일이었어.' , '빨리 자리 잡아서 좋겠다. 나는 이제부터 고민해야 해.' , '그럼 고민해서 직업을 갖고, 그다음에 결혼할 거야?' , '결혼? 나는 결혼은 해도 아주 늦게 할 거야. 아님 안 해도 상관없어' , '정말? 나는 결혼을 안 한다고 하면 아마 집에서 쫓겨날 거야. 부모님은 벌써 나보고 늦었다고 해.' , '우린 아직 결혼을 생각하기에 어리지 않아? 아무리 네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이 있다고 해도 말이야.' , '여기는 일반적이야. 20대 초반이면 대부분 결혼을 하지.' , '그래서, 네 다음 목표는 결혼인 거야?' , '응. 나는 지금 내가 불안정하다고 생각해. 배우자와, 자녀를 갖고 싶어.'



'우리는 동갑인데, 너는 나보다 훨씬 어른 같아. 나는 한국에 가면, 다시 조별과제 같은걸 고민해야 하거든.'






두 달은 금세 지나갔다. 저녁에는 아얄라몰, 에스엠몰을 구경하고 로컬 마사지샵에서 오천 원에 전신 마사지를 받았다. 길거리 오토바이를 타고 전망대에 오르면 세부 시내가 내려다 보였다. 졸리비에 가서 햄버거를 사 먹고, 마켓에서 망고스틴과 탄두아이라고 불리는 술을 샀다. 필리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럼주였는데, 저렴한 가격에 럼콕을 먹기 좋았다. 서로 영어 이름을 부르는 친구 방에 가서 콜라에 탄두아이를 타고 마시며 키득거렸다. 이쯤 되면 한국에서의 고민들이 멀고, 작게 느껴졌다. 가끔은 카지노에 가서 룰렛이나 바카라를 했다. 30달러 정도면 하루 놀기에 충분했다. 주말엔 친구들과 어울려 투어를 다녔다. 보홀, 말라파스쿠아,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세부의 유명한 다이빙 포인트들. 조이는 나의 부탁에 유창한 따갈로그어로 좋은 시설들을 예약해주었다. 현지인들이 주로 찾는다는 가성비 좋은 곳들. 버스 타고, 배 타고, 툭툭이까지 타고 한참 들어가면 그림 같은 바다가 있다. 그리고 인근에 자리한 숙소들은 하나같이 얼기설기했다. 큰 비바람이 치면 어딘가 한 부분은 스러질 듯이 얇고 휘청였다. 실내지만 밖에서 잠을 자는 듯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낯선 공간이 주는 불안함과 불안정함은 묘한 즐거움을 주었다. 파고드는 바람이 마치 무인도에 표류하다 잠시 눈을 감은 듯한, 그런 즐거움. 바람과 파도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이 부족하게 지은 벽과 천장은 어쩌면 아름다운 풍광을 좀 더 담아내기 위해 의도된 허술함인 걸까?


세부에서의 생활. 침침하고 낡은 실내보다는 아름다운 바다가 있는 밖이 좋았다. 나에게 있어 세부는 무더운 날씨, 망고, 예쁜 바닷물, 특정하긴 어렵지만 대체로 즐거운 시간들로 남아있다. 1인실을 사용했지만, 합숙 개념의 단체 생활과 정해진 스케줄이었기에 진정한 의미의 독립은 아니었다. 나는 성인이지만, 아직 혼자서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는 불완전한 존재였다. 이젠 진짜 앞으로의 삶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나는 세부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계획들을 적어 내려갔다.



대외활동, 교환학생, 공모전, 취업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이 빈칸들을 채워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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