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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eph Oct 15. 2020

서울 끄트머리 아파트

30대 직장인 자가마련기 - 정착에 이르기까지 #9


첫 입시는 실패였다.


평소에도 별로 잘하지 못하던 수리영역이 역시 발목을 잡았다. 그래도 딱 1년만 더하면, 원하는 곳에 갈 수 있겠다는 자신이 있었다. 엄마는 언제나와 같이 선뜻 허락했고, 아빠는 중국을 오가기 바빴다. 검색 끝에 친구와 함께 서울역에 있는 유명한 입시 학원에 들어갔다. 학원이 콧대가 어찌나 높은지, 돈을 내고 수강을 하기 위해선 또 시험을 봐야 했다. 배치고사에 따라 비슷한 성적의 학생들끼리 반이 정해지고, 아주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업이 이어졌다. 4호선을 타고 서울역에 내려 학원까지 걸어갈 때면 거리 곳곳에 노숙자들 무리를 지나야 했다. 누구나 각자의 사정은 있겠지만. 서울역사 언저리에 삼삼오오 앉아 술병을 들고, 욕지거리를 하는 이들을 보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행여 누가 나에게 시비라도 걸진 않을까, 발걸음을 재촉해 학원에 닿았다. 그들도 나처럼, 언젠가는 정착을 희망하는 이들이겠지만, 나는 그들이 두려웠다. 떠도는 삶이 두려웠다. 학원 1층 로비에는 흡사 학생주임과 비슷한 경비 아저씨가 있었는데 학생들의 두발, 복장 불량 등을 단속하며 벌점을 주었다. 반에는 반장과 부반장이 선출되고, 학교와 비슷한 일상이 이어졌다. 월마다 모의고사를 치렀고, 시험을 본 날엔 으레 어울려 근처 대학가로 맥주를 마시러 갔다. 옆 테이블에 앉은 진짜 대학생들을 곁눈질로 부러워하다 보니, 수능날은 코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받아본 성적표는 - 아주 놀라웠다. 환산된 표준 점수는 전년도에 비해 딱 1점이 올라 있었다. 나는 이 1점을 위해, 1년을 보낸 것이다.



세 번은 없었다. 가군, 나군, 다군에 각각 상향, 안정, 하향 지원을 했다. 큰 기대 없었던 상향 지원을 제외하고, 안정권의 대학에 합격했다. 처음엔 아쉬웠지만, 이번엔 절실했다. 나는 이제 어딘가엔 가야 했다. 우리 아파트가 있던 한성대입구역에서, 지원한 학교가 있는 혜화역은 지하철로 딱 1 정거장이었다. 통학 거리도 가깝고, 여차 저차 나는 이 곳에 갈 운명이었구나 생각했다. 사회과학계열에 지원하기에는 점수가 약간 불안해 인문과학계열로 지원을 했는데, 전공은 2학년 때 정할 수 있었다. 글을 쓰는 것은 나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 마음속으로 국문학과를 전공하고, 심리학을 복수 전공해야지 하며 얼뜬 계획을 세웠다. 대학교라는 울타리는 벅찬 것이다. 다른 대학교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은 캠퍼스였지만, 전통 건물과 신식 건물의 조화와 긴 은행나무 길은 그간의 보상처럼 느껴졌다. 1점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정문부터 본관까지는 내가 줄곧 불평하던 언덕길이 이어졌지만 예전처럼 싫지 않았다. 나는 아주 들뜬 나날을 보냈다. 신입생의 특권으로 술을 잔뜩 마셔도, 우리 집은 맘먹으면 혜화역에서 걸어서 올 수 있는 아주 적당한 거리였다. 모든 것이 적당하고, 만족스러운 하루하루였다. 갑작스러운 이사를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의 유랑은, 성인이 되어서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빠는 다시 급히 돈이 필요했고, 그마만한 돈은 이 집을 정리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었다. 김 사장님은 사업을 확장한다고 했다. 수출입뿐 아니라, 중국에 공장을 만들어 생산을 직접 하면 더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엄마와 나는 말릴 새도 없었다. 어차피 그것은 큰 소용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체념했다. 우리는 좀 더 서울 언저리로 나가야 했다. 경기도까지 가기엔, 통학이 어려울 것이었다. 엄마는 서울 끄트머리에 작은 아파트를 찾았다. 총 MT를 다녀오니, 이사는 끝나 있었다. 20평 남짓한 작은 아파트. 엄마는 그래도 아파트를 포기할 수 없었다. 작아진 집에 다 들어가지 않는 가구들은 처분하고, 단출하게 다시 시작해야 했다. 다행인 것은 아빠가 대부분의 날들을 중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엄마와 나 두 식구가 지내기에는 그리 비좁지 않았다.


대학 생활이 주는 만족감은 컸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갈수록 줄었다. 책이나 글과 보내는 시간 역시 갈수록 줄어갔다. 여러 선배들과 교류하며 진로에 대해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인문과학계열 내 전공은 보통 영어영문이나, 중어중문이 가장 인기가 많은데 재외국민들도 많아서 학점 받기가 영 쉽지 않을 거야. 물론 취업을 생각하면 경영학과를 복수 전공해야지. 현실이 그래' , '국어국문학은요?' , '음... 교직이수 생각 있어?' , ' 아.. 아니요. 애들 대하는 건 싫어요. ' , '그럼 딱히 생각하는 진로가 있어?'. '음.. 아직 구체적으로는 생각 안 해봤어요.' , ' 그럼 소비자가족학은 어때? 인문과학계열 안에 있지만, 미시경제, 생활경제 쪽이라 상경계 복전하기에는 제일 괜찮아. 무난하게 사기업 취업하기는 승률이 나쁘지 않을 거야.' 선배들의 조언은 꽤 일리가 있었다. 소비자가족학과는 점차 인문과학계열의 인기 전공으로 부상 중이었고, 내가 졸업할 무렵에는 입시 커트라인이 더 높은 사회과학계열로 재편되었다. 현재는 유명무실했던 가족학 내용이 아예 빠지고, 소비자학으로 이름까지 바뀌었으니, 내 꿈을 차치하고는 시대적 트렌드에 나름 뒤처지지 않는 선택을 한 셈이랄까.



동기들과 어울려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시험 기간엔 도서관에서 밤을 지새웠다. 철마다 학교 축제며, 방학 땐 농활이며, 자유로운 시간들이 흘러갔다. 학점이 아슬아슬했지만, 경영학과 복수전공도 할 수 있었다. 한창 스펙과 스토리에 대한 이야기가 떠돌 시기였던지라, 학교 생활만으로는 미래가 불안했다. 남들은 어떻게 사나. 더러 회계사나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무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대기업 취업을 목표로 삼는 듯했다. 나는 또 몇 년 간의 시험을 준비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누구나와 같이 어설프게 취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로라할 대기업에 취업한 사람들의 합격 수기를 찾아 읽어보니, 어학연수라던지 교환학생, 공모전이나 대외활동 등 경험들이 다양했다. 그제서야 이대로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조급함이 들었다. 그 조급함은 나를 한 발자국 밀어냈다.



3학년을 마치고 휴학계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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