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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eph Oct 10. 2020

언덕 위에 아파트

30대 직장인 자가마련기 - 정착에 이르기까지 #8


중국에서 싼 값에 생산되는 수많은 물품들은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먼지 쌓인 공장을 훌훌 털어버린 아빠는 작은 무역회사를 열고, 원단이며 각종 부자재들을 한국으로 수입했다. 나아가서는 아예 중국의 공장을 섭외해 완제품을 만들어 한국의 도매시장에 판매했는데, 한국에서 생산과 조달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장사였다. 다시 김 사장님이 된 아빠는, 착실히 빚을 갚아 나갔고 남은 우리도 평범한 일상을 이어갔다.


2002년 월드컵이 성황리에 마치고,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엄마와 내 앞에 아빠가 내민 것은 여행 안내문이었다. 4박 6일, 푸켓과 피피섬을 돌아보는 일정표. 갑작스러운 여행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내 엄마와 나는 들떠 수영복을 사러 나갔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해외여행이었다. 그리고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또다시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우리가 또 이사를 가야 한다고? 그 익숙한 갑작스러움에 엄마와 나는 묵묵히 따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가족이 드디어 다시 번듯한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 방 세 개, 화장실이 두 개, 베란다가 널찍하게 나있는 언덕 위 아파트로 말이다. 덕분에 나는 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대학 입시를 준비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아직 얼마 살지 않은 인생이지만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다랄까.






아빠는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이다.


아빠를 처음 보는 사람이면, 외모에서 그 자유를 찾을 수 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숱 많은 머리를 제법 길게 길렀고, 때론 미용실에 가서 구불거리는 컬을 넣어오기도 했다. 옷도 평범하게 입는 법이 없다. 발목이 보이는 폭이 좁은 청바지에 원색의 컨버스를 신고, 브랜드 셔츠를 입는다. 아빠는, 그 나이 또래보다 키도 제법 크고, 잘 생긴 편이다. 엄마 말에 따르면, 젊은 시절엔 꼭 최민수와 닮았다고 했다. 하기 싫은 일도 묵묵히 견디는 수줍고 답답한 엄마에 비해, 아빠는 제 하고 싶은 것은 뭐든지 해야 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아빠와 나는 제법 가까운 사이였다. 나를 아주 예뻐했고, 나를 위해서 많은 시간을 냈다. 하지만 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나는 아빠와 자주 싸웠다. 사소하게는 TV 리모컨 때문이었지만, 실상 내 마음속엔 아빠의 그 떠도는 기질로, 우리가 안정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원망이 있었다.



불행에서 벗어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탓할 상대를 찾는 것이다.


나의 화살은 가까운 곳으로 향한 것일 뿐이다. 이모할머니는, 아빠 사주에 역마살이 있다고 했다. 어디든 한 군데 정착하지 못하고 바람처럼 돌아야, 살아지는 인생이라고. 나는 이모할머니의 사주를 맹신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말을 들으며 사람마다 정해진 사주라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이 이렇게 계속 집을 옮겨 다니는 것은, 따지고 보면 모두 아빠의 타고난 팔자이거나, 혹은 이기심 때문이라고 굳게 믿었다. 아빠는 공장을 경영하다가도 싫증이 나면 이내 정리해, 난데없이 볼링장을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볼링이 지겨워지면 골프, 한국이 아니다 싶으면 중국으로 휙 떠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때론, 아빠에게 있어 엄마와 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빠의 인생에는 스스로가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나와 엄마 따위는 사실 크게 안중에 없다고. 아주 오랜 시간 생각해 왔다. 아빠는 영화와, 골프를 좋아했다. 언젠가는 배우를 꿈꾸며 몇몇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내가 행복이와 같이 살던 무렵에는, 아빠가 함께 출연한 몇몇 배우들을 집으로 초대해 엄마가 음식을 대접했다. 아빠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뒤 중국을 오가며 집을 자주 비웠다. 나는 엄마가 너그러운 것인지, 답답한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계획도 없이 제멋에 사는 양반을 뭘 믿고 함께 사는지. 아빠가 한다는 사업들은 하나 같이 외줄을 타는 것 같았다. 경기를 잘 타면 이윤이 꽤 남기도 하지만, 까딱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현금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아주 단단하고 탄력적인 고리의 연결이다.


나는 아주 최근에야 아빠의 인생을 조금씩 이해하고 있다. 나의 아버지의 어린 시절 역시 정착과는 거리가 멀었다. 친할아버지 역시 군인이었으므로 주거지를 옮겨 사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강원도 산골 부대로 발령받았을 때, 할머니와 아빠와 고모는 천도리에 잠시 살았다. 할아버지는 월남전 이후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전쟁이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당시 할아버지는 전쟁 후 후유증 탓에 술버릇이 고약했고, 또 그로 인해 할머니와 식구들은 고통받았다. 견디지 못한 할머니는, 아빠 남매를 남해 큰댁에 맡기고 서울로 떠났고, 아빠는 큰아버지댁에서 어린 고모와 군식구로 지내야 했다. 당시 가장 큰 위로가 된 것은 너른 바다와 배였다. 큰 아버지는 고깃배를 몇 척 가진 선장이었고, 아빠는 눈치껏 뱃일을 도왔다. 아빠는 남해에서의 어린 시절을 고된 것으로 기억하지만, 은퇴 후 다시 돌아갈 곳으로 꼽기도 한다. 중국에서 아빠는 가끔 나에게 이메일을 보내곤 했다. 아빠의 닉네임은 선장이었다. 아빠의 꿈은 바닷가 마을에 살며, 배를 한 척 사는 것이다. 거칠 것 없이 배를 타고,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아빠에 대해,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아주 오랜 시간, 아빠처럼은 살지 말아야지. 아빠 같은 사람은 만나지 말아야지. 빨리 돈을 벌어서, 나와 엄마의 삶에 더 이상의 유랑이 없도록 정착을 해야지라고 수 없이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자유로운 영혼의 아빠는, 가족의 굳은 뿌리가 되어야 하는 아버지라는 역할에 영 부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인간으로서 자아를 추구하고, 망설임 없이 도전하며 사는 것은 꽤나 부럽고, 멋지고, 존중받아야 할 일이지만, 그의 딸린 식구 입장에서는 어디로 갈지 모르는 불안함 속에서 탈출과 정착을 꿈꿔야 했다.


어른이 되면서 나는 여러 가지 시각과 생각을 갖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부모님의 인생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들은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더 많은 결정을 해야 했고, 견뎌야 했고, 책임져야 했다. 아직도 나만 보면 잔소리부터 시작하는 엄마, 아빠에게 줄곧 짜증 섞인 말이 먼저 나오지만 언제 이렇게 작아졌나, 나이가 들었나 생각하면 덜컥 겁이 난다. 부모님이 곁에 계실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정착하고 나서야, 부모님을 바라볼 여유가 생겼다. 그들을 이해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애가 탄다.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나는 아빠와 꼭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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