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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eph Oct 06. 2020

강원도 외갓집

30대 직장인 자가마련기 - 정착에 이르기까지 #6


나의 외갓집은, 전형적인 시골집이었다.


한옥을 개조하여 점점 양옥이 되어갔는데, 대청마루와 중정이 있었으나 지붕과 창문 등은 신식이었다. 외할머니는 괄괄하고, 음식 솜씨가 뛰어났으며, 웃음소리가 아주 컸다. 그녀는 아궁이가 있는 부엌에서 항상 산더미같이 무언가를 만들어냈는데, 외할아버지가 약주를 입에도 못 대는데도 온갖 과일로 술을 담가 한편에 진열을 하곤 했다. 그중 일부는 우리 차에 실려 서울 집으로 오기도 하고, 이곳저곳에 선물로 나가기도 했다. 외할아버지는 퇴역 군인이었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도 쩌렁쩌렁해서 어린 나이에 느끼기로는 아주 무시무시했는데, 실제로 엄마 남매가 자랄 때는 그 기세가 엄청났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산과 동물, 그리고 오토바이를 사랑했다. 집 앞마당에는 개 두 마리, 집 뒤뜰에는 닭과 오골계, 토끼 등의 가축을 키웠는데 나는 고약한 냄새에도 불구하고 그 동물들을 구경하기를 즐겼다. 그 집에는 산 동물뿐 아니라 죽은 동물도 여럿 있어서, 박제한 독수리라던가, 호랑이 가죽 무늬의 카펫, 여하튼 서울 복판에 고고하게 솟은 할머니 댁 본채에서는 보기 어려운 잡스럽고 기이한 물건들이 많이 있었다. 집 밖에는 손잡이가 높이 달린 거대한 오토바이가 한 대 서 있었고, 그것이 나의 외조부의 것이다. 그는 시내를 나갈 때면 보잉 선글라스를 쓰고, 오토바이를 몰았다. 엄마는 내내 제발 저 위험한 것좀 그만 타시라 잔소리를 하고, 외할머니는 소용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엄마의 엄마. 우리가 갈 때마다, 외할머니는 동네잔치라도 하듯 음식을 쌓아두고 우리를 기다렸다. 엄마는 먹는 입도 몇 없는데 뭐 이런 수고를 하느냐며 툴툴거렸다. 외할머니는 아랑곳 않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감자 부침개를 몇 장이고 만들었다. 희한하게 달콤한 맛이 나는 간장종지에 바삭하고 쫄깃한 감자전을 먹는 것은 외갓집에 갈 때마다 기다려지는 일 중 하나였다. 강원도 감자로 만든 전을 부쳐먹고, 무화과를 우물거리고, 직접 담근 수정과까지 한 사발 들이키고 나서야 외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는 동네를 한 바퀴 돌곤 했다. 서울에서 우리 큰 손주가 왔다고. 누군지도 모르는 집의 대문을 벌컥벌컥 열며 나를 인사시켰다. 나는 그이들이 누구인지는 몰랐으나, 곳곳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OO이 딸이라며, 나를 귀여워하였다. 더러 용돈도 쥐어줬다. 돌아오는 길에 외할머니는 종종 물었다. '서울 집이 좋으니?, 여기서 할머니랑 같이 살면 어뗘?' -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외갓집이 나쁜 것은 아니었으나, 영 심심할 것이 분명했다. 학교 친구들도 없고, 아무리 토끼 보는 것이 좋아도 금세 질리고야 말 것이다.


우리가 별채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매해 명절과 여름방학 때는 빠짐없이 외갓집을 찾았다. 한번 오면 적게는 이삼일, 길게는 일주일씩 머물렀다. 돌아갈 때는 차 한가득, 먹을 것을 싸 주었다. 직접 딴 두릅이며 산나물, 말린 감, 김치 서너 종류에 빚은 감주가 두어 통. '아유- 이거 우리 다 먹지도 못해!' 엄마가 손사래를 치거나 말거나, 외할머니는 행여 가는 길에 동치미가 새지나 않을까 보자기를 여러 번 둘렀다. 우리 차가 마을 어귀를 벗어날 때까지 외할머니는 손을 흔들었다. 마을 길을 지나, 국도를 타면 엄마가 사이드 미러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아휴! 아부지는 저걸 저렇게 타고 세상에!' 외할아버지의 오토바이는 멀어져 가는 우리 차를 한참이나 따라왔다. 시내 나간다는 핑계로, 노부부는 자식들을 한참이나 배웅했다. 서울 오는 길이면 근처에 들러 막국수를 먹었다. 서울 집에 와도 한참은 외할머니의 음식들로 끼니를 챙길 수 있었다. 외갓집은 나에게 맛있는 것들이 가득한, 작은 여행지나 다름없었다. 아이엠에프가 오고 아빠의 사업이 어려워지며 외갓집에 가는 날도 자연히 줄어갔다. 지금의 내가 그렇듯이... 엄마는 시골집에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을 거다. 특히 우리가 할머니 댁 별채에 들어간 이후로는, 엄마는 한 번도 천도리를 찾지 않았다.






외할머니 장례에 나는 참석하지 않았다.


강원도는 멀기도 하고, 나는 어리기 때문에 가면 안 된다고 했다. 별채에 혼자 남겨져 외할머니 얼굴을 떠올려봤다. 가신 분은 미화되기 마련인지, 깍쟁이 같은 본채 할머니에 비해 그분은 너무나 수더분하고... 눈물이 계속 차올랐다. 사실 내가 외할머니와 보낸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나의 슬픔의 이유는, 외할머니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도 있겠지만은, 대부분은 주저앉아 펑펑 울던 엄마의 모습 때문이다. 나는 엄마가 그렇게 우는 것을, 평생에 본 적이 없었다. 할머니한테 혼이 날 때도, 슬픈 드라마를 볼 때도, 하물며 고된 하루를 마친 뒤 집에 와 우두커니 있는 딸의 밥상을 차려줄 때에도 엄마는 눈물 한 방울 흘리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 밤, 할머니가 외할머니의 부고를 전하던 그날 밤. 엄마는 주저앉아 아이처럼 울었다. '엄마 미안해-'라고. 엄마는 계속 흐느꼈다. 그리고 그 장면은, 아주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아있다.


엄마의 눈물은, 세상 그 어떤 것 보다도 슬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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