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직장인 자가마련기 - 정착에 이르기까지 #7
내 주변 친구들은 나를 꽤 부잣집 딸로 알고 있었을지도.
하굣길 헤어질 때면, 나는 큰 대문 뒤로 사라지곤 했으니 말이다. '너희 집 부자야?' , '방이 몇 개야?' 하는 질문들은 익숙했다. '우리 집 아니야. 할머니넨데, 얹혀 사는 거야' , '할머니 집이면 너네 집이지! 나도 할머니랑 같이 사는데?', ' 아니야, 우리 집 망해서 얻어 사는 거야, 우린 별채에 따로 살아' , '우와, 집에 별채가 따로 있어?, 나 놀러 갈래!' , '와도 별로 볼 거 없어- '. 기어코 친구 몇몇은 우리 집에 오고야 말았다. 별채를 보면 금방 실망을 금치 않을 것이리라 생각했건만. 한창 연못을 메워 텃밭을 만들던 할머니와 이모할머니 눈에 우리가 띄었다. '친구들 왔니? 올라가 있어, 과일 내줄게'. 저녁마다 눈칫밥 먹던 손녀가 기죽는 것이 싫었던지, 과일도 잘 다루지 못하는 할머니가 본채에 올라가라며 큰 소리를 낸다. 엉겁결에 응접실에 둘러앉은 아이들이 어쩔 줄을 몰라하는 모습에 머쓱, 미안해지고 만다. 과일을 얻어먹고, 3층 서재를 둘러본 친구들이 엉거주춤, 일어난다. 본채 3층의 서재와 테라스는, 식구 중 내가 가장 자주 사용하던 공간이었다. 그 특별한 집은, 나에게 자격지심과 동시에 자기애를 형성할 수 있던, 계륵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네 방은 어디야?' , '내 방은 밖에, 별채에 있어' , '느네 집 진짜 좋다. 드라마에 나오는 집 같아!'
'우리 집 아니래두!'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가 지나서야 우리는 별채를 떠날 수 있었다. 이사 간 집은 할머니 댁과 멀지 않은 한 빌라였다. 비슷한 빌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골목 안쪽의 철 지난 빌라 201호. 그곳이 우리의 새 보금자리였다. 내부 구색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방이 2개, 거실 겸 주방이 1개, 화장실이 1개였다. 그런데도 엄마는 아주 기뻐했고, 나는 내심 으리으리한 집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된 것이, 마음 한구석 아쉽기도 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신경 쓰지 않으면 누구라도 그냥 지나치기 쉬운 그 좁은 빌라 입구는, 높이 솟은 대문과는 영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 시절엔, 친구 너 다섯 명과 항상 함께 등하교를 했다. 친구들의 집은 각양각색이다. 나와 같은 빌라도 있고, 주택도 있고, 아파트도 있다. 보통 집이 가장 먼 친구 둘이 먼저 만나고, 그다음 먼 친구의 대문 앞에 들른다. 부지런한 친구라면 종종 먼저 나와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친구 대문 밖에서 수 분을 기다리는 것은 다반사다. 우리 집은 가장 먼 축에 속해, 다른 친구와 함께 일찌감치 집을 나서곤 했다. 별채를 벗어나고서야, 우리 집은 다시금 평범한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아빠는 공장을 정리하고, 중국의 값싼 원단과 부자재를 한국으로 들여오는, 일종의 무역업을 시작했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덕에, 나는 친구들과 보습학원에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 댁에 가는 빈도가 줄었다. 같은 동네지만, 굳이 찾을 일이 없었다. 이런 말이 우습긴 하지만 나도 제법 바빴다고나 할까. 별채는 우리가 떠난 후로 쭉 비었다. 세입자를 찾아볼 수도 있었겠지만, 두 할머니는 대문간 안에 낯선 이를 원치 않았다.
어느 늦은 주말 오후. 심부름을 올 겸 들른 할머니 방에는 재미도 없는 TV 프로그램이 무심히 돌아갔다. 빨리 집에 가야지, 속으로 생각하던 차에 할머니가 찬송가 책을 펴고 앉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일장 연설을 시작한다. 아이고 할머니 또 시작이시다 - 하며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할머니, 할머니는 하나님 언제부터 믿었어?' , '할머니는, 음... 서울 와서부터였지, 난데없이 건 왜 물어?' '아니이- 이모할머니는 절에 다니잖아. 우리 집안에 교회 다니는 사람은 할머니밖에 없는 것 같어서 그렇지.'
할머니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있지, 얘야. 너 원래 고모가 있었다. 알고 있니? 느이 아빠 어릴 적에 말야. 할머니가 아주 힘들었어. 그래서 남해 큰댁에 느이 아빠랑, 고모를 맡기고 내가 혼자 서울에 왔단다. 와서는 뭐, 아주 정신없이 살았지. 이모랑 할머니랑... 아주 열심히 살았어 - 빨리 자리 잡아서 남해에 고것들을, 얼른 데려와야겠다 했단다. 그러다 느이 아빠가... 고모 손잡고 서울에 왔는데 글쎄, 아이구 참 내 손길 없이도 그렇게 참 아이들이 곱게 컸더라. 내가 돈 번다고, 제대루 못 봤어... 한창 이쁜 때를... 네 고모가, 연아가 말이다. 빼빼 마른 것이 어찌나 하얀지, 시골에서 갓 왔는데 고것이 말도 없이 새침하고, 여튼 아주 고왔다. 걔는 말이 밸루 없었어 - 그래서 저 아픈 것도 나는 한참이나 몰랐다. 서울 오고 몇 달 지나서 알았는데, 병원 들어가고 나서는 손 쓸 것도 없이 금방이었지 뭐. 저기.. 여의도에, 성모병원에 있었거든 우리 연아가. 내가 매일 가서 울었어... 연아야 엄마가 미안해, 미안해하면서, 연아는 한 번도, 저 엄마를 원망 안 했다. 외려 고 핏대 없는 손으로 날 잡고 기도를 하더라 글쎄, 걔는 하나님 앞에 모든 걸 용서했어. 못난 어미도 진즉에 용서한 애였단다. 가끔, 노래를 불러달라고는 했었는데 - 연아가 그랬그든. 자기 나으면 같이 예배 보러 가자고. 그러면서 저는 하나도 무섭지 않다더라. 내가 아이구 그럼, 네가 무서울 것이 뭐가 있냐, 금방 일어날 건데. 얼른 기운 차리자. 꼭 그러마, 같이 손 붙들고 교회에 가자 했는데, 그러고는 뭐 ... 못 일어났지. 며칠을 더 앓더니만 가버렸단다. 연아는 이걸, 이 노래를 제일 좋아했어...
변찮은 주님의 사랑과, 거룩한 보혈의 공로를 -
우리가 찬양을 합시다. 주님을 만나볼 때까지 -
예수는 - 우리를 - 깨끗케 하시는 주시니 -
그의 피, 우리를 - 눈보다 더희 게 하셨네 -
그 이후로도, 할머니는 종종 나를 앉혀두고 찬송가를 가르쳤다. 나는 아무 믿음은 없지만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고모를 생각하며 노래를 따라 외웠다. 나는 형제가 없어 알지 못한다.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그로 인한 상실감은 얼마만큼인지.
아빠는 단 한 번도 내게 고모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 적이 없었다. 나는 그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