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오의 나라, 이집트. 기원전 3000여 년 전부터 거대 제국을 이루며, 많은 문화유산을 남긴 나라다. 기자의 대 피라미드, 스핑크스, 룩소르 왕들의 계곡 무덤과 카르나크 대신 전,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 등이 대표적이다. 이집트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유산들이다. 지금의 미적 감각으로 봐도 아름답고 웅장하며 화려하다. 그런데 이러한 이집트의 문화유산 중에 의문을 들게 만드는 유물이 있다. 바로 벽화와 그림 속 사람들의 모습이다.
기원전 1275년경으로 제작된 추정되는 ‘사자의 서’ 일부분이다. 사자의 서는 망자의 영혼이 신들의 안내를 받고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집트 신화 속 신들과 망자가 그러져 있다. 저승의 신이자 심판관 오시리스, 망자를 인도하는 호루스, 죽은 이의 죄를 기록하는 토트, 자칼의 모습을 한 죽음의 안내자 아비누스가 그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을 보면 하나 같이 특이한 형태로 그려져 있다.
보통 사람을 그릴 때 옆모습이면 옆모습으로만, 앞모습이면 앞모습으로만 그린다. 그런데 이 사자의 서에서는 특이하게도 얼굴은 옆면, 몸은 정면으로 그려져 있다. 왜 이렇게 그린 것일까?
그들은 사람의 본질을 그린 것이다. 대상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측면만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동물의 얼굴은 옆모습이 특징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옆모습을 그린 것이다. 얼굴에서도 눈은 정면을 바라본다. 그렇기 때문에 눈은 앞을 바라보는 것으로 그려졌다. 상체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가리켜 ‘정면성의 원리’라고 한다. 모든 사라물을 가장 특징적인 각도에서 그려 본질을 최대한 살린 것이다. 이집트는 생과 사의 경계가 모호한 나라였다. 나일강의 범람이 가져오는 죽음과 풍요의 교차는 사람들에게 있어 내세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그들에게 있어 사람의 특징을 살려 그리거나 표현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우선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조각가들을 가리켜 ‘계속 살아 있도록 하는 자’라고 불리기도 한 것이다. 즉 죽음은 현실의 연장선상이며, 이를 위해서 내세에도 현재처럼 살기 위해, 가장 본질적인 측면을 남겨야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집트 미술은 이러한 본질에 대한 탐구를 통해 영원한 형태를 얻을 수 있었다.
이집트 그림의 정면성 원리는 본질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라고 물어보면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 대답을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인간의 삶과 변화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란 무엇인가?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물어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키워드는 과거, 교훈이다. 맞다. 역사는 과거의 사건을 다룬다. 그리고 현재와 미래에 얻을 수 있는 교훈을 통해 역사의 가치는 빛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키워드로만 역사의 ‘정면성 원리’ 즉 본질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 두가지 키워드는 모두 역사의 한 특성만을 이야기한 것이다. ‘역사’의 단어를 통해 역사의 ‘정면성 원리’를 탐구해 보자.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歷史’는 메이지유신시대 일본에서 history를 번역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史’라고 불렀다. ‘史’는 손에 붓을 잡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한자다. 서양에서는 기원전 헤로도토스의 저서 <Historiai>가 history의 어원이 되었다. 이 역사는 탐구, 정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독일어 단어 ‘Geschichte’는 일어나다, 발생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사건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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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역사를 의미하는 각 ‘단어’의 뜻을 봤을 때 역사는 인간들의 삶을 탐사하여 분석한 정보를 해석한 역사가들의 기록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들의 어떤 삶을 탐사하고 조사해야 할까? 그리고 어떻게 분석해며 해석해야 할까?
이 질문이 바로 인간의 본질과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을 탐사, 분석, 해석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지구라는 공간 속에서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 즉 시공간 속 인간은 다양한 인간들과의 만남을 통해 사건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이 역사가의 분석(해석)에 의해 기록된다. 이 탐구와 분석은 다시 인간들에게 교훈적 가치로 전달된다.
이러다 보니, 역사는 복잡하고 어렵다. 일단 역사를 알아야 분석하고 탐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많이 알지 못하면 탐구하기 어렵다. 또 알고 있다고 해도, 자신만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능력이 필요하다. 자신만의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타인의 의견에 휩쓸려 가기 딱 좋기 때문이다. 역사가 대대로 악용되어 지배자, 침략자의 논리로 사용되기도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장기간 일어난 사건, 교훈은 개개인의 삶에 적용시키기란 쉽지 않다.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는 인간의 삶과 본질을 다루는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람들과 동떨어진 ‘옛날이야기’로 취급받게 되었다.
역사는 이러한 면에서 ‘고르디우스의 매듭’과도 같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고대 프리기아의 수도 고르디움에 있던 고르디우스의 전차에 얽힌 매듭을 말한다. 이 매듭을 푸는 자는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리고 이 매듭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칼로 잘라버렸고, 전설을 역사로 만들었다. 역사의 얽히고 설힌 복잡 다난한 문제들은 사실, 인간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내 삶 속 ‘고르디우스 매듭’을 풀기 위해서는 역사라고 하는 매듭을 칼로 잘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신 마음속의 칼로 매듭을 끊어야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고르디우스이 매듭이 지닌 본질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인생이자, 역사라는 점을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림은 우리에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칼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림은 많은 이야기와 생각을 담고 있는 시각적 칼이다. 하나의 그림을 보면서도 사람에 따라 자신의 시선에서 다양한 생각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림이 가진 힘이자, 위대함이다. 그림은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인간의 삶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게 만든다.
한번 새를 머릿속으로 상상해보자. 하늘을 나는 새. 독수리, 까마귀, 까치도 좋다. 새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그려보자. 누구나 쉽게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새들이 그려진다. 다시, 새를 그려 볼 것이다. 이번에 그릴 것은 새의 본질이다. 무엇을 그릴 수 있을까? 아마 여기서부터 머리가 아플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것들이 그려질 수 있지만 누구도 납득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콘스탄틴 브랑쿠시는 이것을 해냈다. 그것도 조각으로 말이다. 브랑쿠시는 ‘공간 속의 새’라는 제목으로 이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외부 형태는 진실한 것이 아니다. 진실이란 사물의 정수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는 새의 가장 특징 중의 하나인 날 수 있음에 집중했다. 그중에서도 깃털을 새의 본질로 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복잡하다. 세상은 다양한 새의 모습과 같다. 하지만 이 모습들은 진실이 아닌 포장지에 불과하다. 이 포장지를 벗겨내고 진실을 찾는, 본질을 탐구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진실을 보는 ‘눈’이다. 진실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짓된 본질들을 하나, 둘씩 벗겨내야 얻을 수 있다. 브랑쿠시의 ‘공간 속의 새’처럼 말이다. 브랑쿠시는 조각을 통해 세상의 진실을 찾았다. 역사를 업으로 하는 나는 역사를 통해 이 질문의 대답을 찾아 나가고자 한다. 복잡하기만 한 역사 그리고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서. 알렉산드로스의 칼처럼 그림을 활용해 역사와 인간의 얽히고설킨 매듭을 끊어보려 한다.
여러분들도 각자의 업에서 이 진실을 찾기 위한 여정에 참여했으면 좋겠다. 이미 참여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목적지에 다다른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함께 그림을 보며, 진실을 찾는 탐험가들이 되어보자. 그 탐험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행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림이 묻고, 역사가 답하다>는 인간다운 삶을 찾기 위한 나만의 알렉산드로스의 칼이다. 다. 그림은 많은 메시지를 응축하여 담은 이미지화된 메시지다. 역사는 사람의 삶을 응축한 기억의 메시지다. 이 두 메시지의 만남은 내 삶의 진실을 찾는 여정의 나침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