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혼자 다니시군요” 라파엘로는 한 중년의 남자를 보며 말했다. 뼈가 있는 말이었다. 사실 라파엘로는 이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항상 무뚝뚝하게 자신을 대하기 때문이다. 모습도 볼품없었다. 옷에는 온갖 물감이 묻어 있었으며, 신발은 언제 벗었는지 모를 정도로 낡아 있었다. 거기다 허리는 굽어 있었고, 코는 누구에게 맞았는지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눈빛은 그 무엇보다 강렬했다. 무엇인가 끝을 보겠다는 그 눈빛. 보는 이로 하여금 이 볼품없는 남자를 위대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그가 그린 그림이 공개되었다. 라파엘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구도, 표현방법 때문이었다. 그리고 라파엘로는 자신이 그리고 있었던 ‘아테네 학당’에 그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아테네 학당에서 쭈그리고 앉아 고민하는 한 남자의 정체. 바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였다.
솔로몬의 대 성전과 동일한 규모로 지었다는 교황의 자존심, 시스티나 대성당. 그 성당의 천장화를 그린 남자가 바로 미켈란젤로다. 그는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위대한 조각가이자 화가였던 진정한 아티스트였다. 89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매 순간 혼신을 담은 걸작을 만들어 내고자 최선을 다했다. 젊은 시절의 <피에타>부터 죽기 직전까지 제작했던 <론다니니의 피에타>까지. 그의 작품은 모두 전설이 되었다.
특히 라파엘로를 놀라게 했던, 이 그림. 시스티나 대 성당의 천장을 장식한 천지창조는 가히 혁신적인 그림이었다. 인간의 탄생을 이렇게 잘 표현한 그림이 있을까?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9)
성경에 있는 단 한 줄을 미켈란젤로는 이 그림으로 재창조했다. 미켈란젤로는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는 과정을 손가락과 손가락의 ‘만남’으로 표현하였다. 왜 미켈란젤로는 ‘만남’을 인간의 창조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로 사용하였을까? 그것은 만남이 지닌 의미 때문일 것이다.
방문객 (정현종 작)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낼 수 있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시집 <광휘의 속삭임> (문학과 지성사, 2008)
정현종 시인이 바라본 만남은 그 사람의 모든 인생이 나에게 오는 순간이다. 미켈란젤로도 동일한 생각을 했던 것일까? 하나님의 모든 것이 사람의 손가락과 맞닿은 순간,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써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역사도 이와 같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람과 사건의 만남, 사람과 시공간의 만남이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다양한 이들의 인생이 교차하는 ‘만남’의 학문이다. 과거-현재-미래가 만나는 시공간의 학문이다.
만남이란 상호 존중과 환대에서 온다.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대할 때, 그것은 만남이 아닌 상명하복에 의한 ‘명령’에 불과하다. 만남은 그래서 서로를 인정해야 가능하다. 미켈란젤로가 하나님의 손가락과 아담의 손가락을 맞닿으려는 모습을 그린 것은 분명 인간을 존중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일방적인 창조주로서의 모습만을 강조하고 싶었다면, 이 그림은 절대 나올 수 없다.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통해 ‘만남’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미켈란젤로가 아담의 창조를 통해 보여주고 했던 ‘만남’의 의미를 역사 속에서 발견해본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인류에 대한 환대와 존경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는 어떻게 ‘만남’의 중요성과 가치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미켈란젤로가 살았던 시대. 르네상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르네상스는 라틴어 레나스케레(renascere)에서 유래했는데, 다시라는 의미의 re와 출생을 뜻하는 naissnce의 합성어다. 프랑스 사학자 쥘 미슐레는 이전 중세와 다른 새로운 시대라는 의미로 르네상스 용어를 사용했다. 단어 그대로, 르네상스는 이전 서양 중세와 다른 면이 나타나는 시기였다. 중세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다양한 문화의 ‘만남’이었다.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우르바누스 2세는 십자군 전쟁을 결정했다. 그 결과 수차례에 걸쳐 십자군 전쟁이 이뤄졌다. 십자군 전쟁은 단순히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 세력을 공격하고, 예루살렘을 회복하고자 했던 전쟁만은 아니다. 전쟁의 시도보다 결과에 주목해야 한다. 전쟁을 통해 유럽은 그리스-로마의 다양한 사상과 철학을 다시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잡은 국가들이 바로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도시국가였다. 이탈리아 반도는 지리적으로 이슬람 세력으로 가기 위한 항구를 가지고 있었고, 많은 이들이 경유하면서 경제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제노아, 베네치아, 피사, 피렌체 등이 대표적이다. 이탈리아의 군소 도시국가들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경제적 특수를 누렸다. 경제적 특수는 도시의 활력을 불러일으켰고, 이전과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14세기에 접어들면서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했다. 흑사병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10년 주기로 장기간 지속되었다. 그 결과 유럽 전체 인구의 1/3~1/2 이상이 되는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흑사병의 창궐로 사람들은 위축되었다. 허울뿐인 의료체계는 붕괴되었고, 죽음에 관한 공포가 사회에 만연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신앙을 통해 이 위기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상인들의 자신의 부를 성당 건축과 교회에 희사했다. 그러나 흑사병은 사라지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혔으며, 믿음의 근간을 뒤 흔들었다.
기존의 가치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방황했고, 새로운 대안을 찾고자 했다. 이때,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새로운 사회적 대안을 발견했다. 바로 플라톤 철학이었다. 플라톤 철학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다시 유럽으로 역수입된 사상이었다. 플라톤 철학인 이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달랐다. 현상과 과학적 탐구를 강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플라톤 철학은 이상 세계(이데아)를 통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데아에 대한 고민은 자연스럽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기존 신 중심의 사회, 중세에서는 생각도 하지 못할 질문이 이었다. 인간은 단순히 신이 만든 피조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의 수장 코시모 데 메디치는 달랐다. 이 플라톤 철학에서 흑사병 후 혼란한 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알아냈다. 바로 인문학의 힘이다. 자기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통한 인생의 나침반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꿈꾸게 된 것이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이 플라톤 철학을 연구하기 위해 학교를 만들고 자신의 가솔과 친구들을 초대하여 교육시켰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였다. 탁월한 조각 실력으로 코시모의 양자가 되었던 미켈란젤로는 어쩌면 십자군 전쟁에서 얻은 새로운 가치를 소화한 인물 중 한 명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는 플라톤 철학을 통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성찰했다. 그 성찰의 표현물이 아담의 창조였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작품에 여러 문화와 생각의 ‘만남’을 반영했다. 그리고 재창조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켈란젤로는 조각가다. 하지만 율리우스 2세 교황의 명령으로 천장화를 그려야 했다. 초반에는 실수의 연속이었다. 처음 그려졌던 노아와 홍수는 곰팡이가 슬어 다시 그려야 했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그는 자신만의 철학이 반영된 그림들을 4년에 걸쳐 그려나갔다. 조각가만이 가질 수 있는 인체에 대한 뛰어난 이해력과 표현력이 그대로 그림에 반영된 것이다. 천장에 그려진 20여 명의 인물상은 조각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처럼 역동적이며, 다양한 형태로 그려져 있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더 놀랍다. 분명 기독교적인 소재로 그림을 그렸지만, 곳곳에 그리스-로마 신화의 영향을 받은 요소들이 반영되어 있다. 다니엘, 에제키엘 등의 예언자 옆에는 쿠마이의 무녀나 오리엔트 풍의 의상을 입은 페르시아 무녀가 그려져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요소와 기독교의 만남은 실로 놀라운 창조물로 이어졌다.
현재 서양의 사상적 근간으로 헤브 라임(기독교)과 헬레니즘(그리스-로마)의 두 유산이 만나 이뤄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두 유산의 만남은 미켈란젤로라는 손에서 빛을 발한 것이다. 그는 기존에 있었던 헤브라임을 살리면서 부활한 헬레니즘을 결합시켰다. 사고의 폭을 한층 더 넓힌 것이라 할 수 있다. 르네상스의 진정한 의미가 여기에 있다. 부활은 헬레니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사고의 만남이 가능한 시대의 부활을 의미한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당시 지배층이었던 기독교(카톨릭)에도 비판적이었다. 새롭게 떠오르는 루터의 사상과 생각에도 공감했고, 새롭게 그리기 시작한 시스티나 대성당의 ‘최후의 심판’에 반영했다. 최후의 심판은 이 거장의 모든 사고가 담긴 ‘만남’의 광장이었다.
지하세계의 판관 미노스, 저승의 뱃사공 카론, 스틱스 강의 존재 등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관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또한 카톨릭의 부패를 비판하며 등장한 루터의 얼굴, 여러 카톨릭 주교와 교황의 얼굴들이 동시에 반영되었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일까?
바로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삶과 죽음의 고민이 담긴 성찰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의 여러 사상을 만났고 소화했으며, 표현했다. 그랬기 때문에 르네상스는 생기 있는 시대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에게 큰 영감의 시대로 기억되는 것이다.
역사도 그렇다. 다양한 요소들과 생각, 사고, 인물의 만남은 우리의 삶에 새로운 방향성과 고민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여러 만남이 우리에게 주는 큰 메시지이다. 그리고 이 그림과 역사의 만남은 이러한 질문의 답을 향해 찾아가는 여정의 시작이기도 하다. 만나야 성찰할 수 있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힘이 생길 때, 자신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다. 성찰을 통한 자신의 역량은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양한 것들을 바라보고 성찰을 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