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소소한 시선이 닿는 순간
난시, 내 눈의 숙명이다.
안경을 벗으면, 세상이 흐릿하게 보인다.
때론, 세상이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 비틀 거리는 것 같다. 안경을 벗으면 순간 불안해진다. 세상이 항상 흔들려 보였기 때문이다. 그 불안을 붙잡고자, 나는 안경을 쓰고 산책을 나갔다.
마스크를 계속 끼다 보면, 안개가 안경을 점령군처럼 차지할 때가 있다. 오늘의 내 안경이 그렇다. 세상이 뿌옇게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안경을 벗었다.
차라리 벗고 산책을 하자!
안경을 벗고 산책을 하다가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내 눈의 초점이 흐려지면서, 불빛들이 번져갔기 때문이다. 안경을 낄 때는 몰랐던 또 따른 세상이다. 안경으로 바라봤던 세상과 전혀 다른 아름다운을 바라볼 수 있었다.
빛들이 번지면서 내 눈의 망막을 자극했다.
흡사, 휘슬러의 그림처럼 말이다.
검정과 금빛의 야상곡.
떨어지는 불꽃을 형상화한 이 그림은
많은 평론가들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 떨어지는 불꽃>, 1875.
당대 유명한 평론가였던 러스킨은 이것은 그림이 아니라 물감을 뿌린 쓰레기며, 돈을 받고 전시하는 것은 사기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화가 난 휘슬러는 그를 고소했고, 결국 휘슬러는 재판에서는 이겼지만 파산하고 말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순간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림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그림이 그 어떤 불꽃놀이 그림보다 좋다. 희미한 경계와 번진 물감의 만남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항상 실수와 고민 속에서 방황하는 나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눈이 아닌, 마음을 보는 그림이란 생각이다. 오늘 그 마음으로만 바라봤던 이 그림이 내 눈에 보였다. 더 잘 보기 위해 쓰는 안경을 벗어야만 볼 수 있는 세상을 그대로 그려낸 것 같았다.
만약 러스킨을 만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내 눈으로 본 것과 너무 똑같은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분명 구상적인 그림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물감을 뿌린 쓰레기일지 모르지만, 도리어 자신의 쓴 안경을 벗고 오롯이 바라보면 내 마음을 위로해 주는 훌륭한 그림으로 바뀐다.
가끔, 내가 옳다고 믿는 안경을 벗어보자. 도리어 그 안경에 낀 것들이 현실을 호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