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를 떠나기 하루 전, 케언즈에서 호주 여행을 시작한 게 어제 같은데 벌써 19일이 지났다. 언제나 그렇듯 여행지에 익숙해지면 시간은 날개를 달고 날아가 여정의 말미에 다다라 있다. 아쉽지만 남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겠다는 다짐을 하고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마지막 투어를 떠나는 날인데, 목적지는 ‘로트네스트 아일랜드(Rottnest Island)’다. 이 섬은 크기가 19 km²로 우리나라 독도(서, 동도를 합친 크기)와 비슷한 작은 섬으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동물’ 쿼카(Quakka)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생긴 모습이 귀엽고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가 있어 사진을 찍으면 웃고 있는 것처럼 나오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
로트네스트 아일랜드로 향하는 페리는 퍼스항을 등지고 출발했다.
로트네스트 아일랜드 투어 경로
8시 30분경 퍼스에서 출발한 페리는 한 시간 반 정도 지나 로트네스트 섬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관광안내소에 가서 예약한 투어 티켓과 일정표를 챙겨 나왔다. 이후 첫 일정으로 로트네스트 아일랜드 올리버 힐 포대(Oliver Hill Battery) 투어를 시작했다. 포대는 1차 세계 대전(1914. 7. 28 ~ 1918. 11. 11)이 한창이던 1914년~1915년 당시에는 포로수용소(전쟁 포로 841명 수용)로 활용되었고, 세계정세가 급변하자 프리멘틀의 폭격을 막는 방어 기지로 1930년~ 1933년까지 3년에 걸쳐 요새화 하였다. 이때 대공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9.2인 포대를 설치하였는데, 포대는 1985년 방어 기지가 폐쇄될 때까지 운영되었다.
포대에 도착하자 2차 대전에 참전했던 노병께서 직접 포대의 역사와 전쟁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포대에 대해 당시 참전했던 노병이 직접 설명해 주었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5년 동안 이 섬은 출입금지 지역으로 지정됐어요. 당시 삼엄한 경계태세는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1941년 7월 2일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감행한 후에는 호주도 공격 대상이 될 수 있어서 더 긴장하게 되었지요. 로트네스트 방어 진지가 무너지면 프리멘틀, 퍼스 등 도시 지역이 초토화되는 건 시간문제였으니까요. 그런데 다행히도 일본이 패망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여기 있는 9.2인치 포대를 사용할 일은 없었어요.”
포대 투어를 마치고 선착장 쪽으로 이동해서 점심 식사를 했다. 점심은 여행 비용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맛없는 런치 박스(샌드위치, 사과, 음료수)였다. 그럼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다를 볼 수 있는 경치 좋은 곳에서 식사를 했고, 거기에 더해 주변에 서식하는 분홍색 앵무새들이 장난을 걸어와 밥 먹는 동안 심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맛없던 점심 식사
점심 식사를 하는 동안 내 주변에서 장난을 걸어온 앵무새 무리
식사를 마치고 이후 여정을 안내할 가이드 아저씨의 차를 타고 두 번째 목적지인 핑크 호수(Pink Lake)로 출발했다. 로트네스트 아일랜드는 8개의 호수가 있는데, 그중 핑크 호수는 이름대로 호수가 핑크 빛을 띠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차량이 핑크 호수 근처에 이르자 우리는 신비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었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차에서 내려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호수가 핑크색을 띠는 이유는 염분을 좋아하는 두날리엘라 살리나(Dunaliella Salina)라는 미세 조류가 항산화 작용을 하면서 배출하는 색소 화합물이 태양광을 흡수하여 분홍색 빛을 발산한다는 것이다. 참고로 호주와 아프리카에서 비슷한 현상이 관찰된다고 한다.
핑크빛이 감도는 호수,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난생 처음 목격한 핑크색 호수
핑크 호수의 매력을 한껏 만끽하고 쿼카와 물개를 볼 수 있는 성당 바위(Cathedral Rocks)로 향했다. 처음 도착한 선착장이 섬의 우측 끝이라면 성당 바위는 섬의 좌측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섬이 크지 않아 금세 목적지인 성당 바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차에서 내려 작은 관목 사이를 뚫고 전망대로 나아갔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날씨가 맑은 날에는 관목 사이에 쿼카들이 출몰한다는데, 흐린 날씨 때문인지 우리 앞에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서 물개가 출몰한다는 성당 바위 앞에도 물개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행을 하면 운이 좋은 편이었는데, 이 날은 이상하게도 꼬이는 듯했다.
흐리고 바람 부는 날씨 때문인지 물개를 볼 수 없었다.
쿼카를 보지 못했는데 퍼스로 돌아가는 배 시간(오후 4시)이 다가오자 '여기까지 와서 쿼카를 못 보고 가는 건가.'라는 불안한 마음이 엄습했다. 가이드에게 쿼카를 꼭 보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자신만이 아는 '쿼카 출몰지'가 있다며 차를 몰아 수풀이 우거진 장소로 우리를 안내했다. 차에서 내린 가이드는 손을 사용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수풀 사이에서 쿼카 한 마리가 나타난 것이다. 마치 가이드가 쿼카를 대기시켜 두었던 것처럼….
로트네스트 아일랜드에만 서식하는 쿼카를 실제로 만났다.
실제로 본 쿼카는 호주에 와서 만난 동물들 중 제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멜버른에서 만났던 요정 펭귄보다 더 귀여운 녀석을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이다.
가이드 아저씨는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에서 연한 잎사귀 부분을 골라 쿼카에게 내밀었다. 쿼카는 기다렸다는 듯 캥거루처럼 깡충깡충 뛰어 입사귀를 받아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바닥을 동그랗게 만들어 생수를 담아 두었더니 기다렸다는 듯 물을 마셨다. 아무래도 가이드 아저씨와 이 녀석과 여러 번 접선(?)을 해본 듯했다. 그러면 어떠랴 일행은 쿼카에게 나뭇잎도 먹이고 함께 기념사진도 찍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참고로 로트네스트 아일랜드에는 약 300여 명의 주민과 10,000~12,000 마리의 쿼카가 공존하고 있다.
쿼카에게 나뭇잎을 건내는 가이드 아저씨
쿼카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퍼스행 페리(오후 4시 30분 출발)를 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6시간 30분의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일정을 진행하다 보니 여러 모로 아쉬움이 남는 하루였다. 만약 다음에 이 곳에 올 기회가 생긴다면 섬에 위치한 숙소(Hotel Rottnset)를 3~4일 정도 예약하고 섬의 모든 지역을 여유롭게 트레킹 하고 싶다.
페리 시간에 맞춰 선착장에 도착해 너른 대양을 보며 19일간 쉼 없이 달려온 여정을 되새겨 보았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던 케언즈, 잊지 못할 일몰을 감상했던 타운스 빌, 호주를 대표하는 도시 시드니, 16년 전 유학 생활을 했던 멜버른 그리고 도시와 자연이 공존하는 도시 퍼스까지 총 6,734km의 대장정을 거치며 방문했던 관광지, 다양한 체험들 그리고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참 행복하다.'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퍼스에 도착해 행복에 취해 야경을 감상하며 도심을 거닐었다. 이 날 일정은 그렇게 해피앤딩으로 마무리될 줄 알았다. 이후 발생할 ‘소란스러운 사건’이 있기 전까지…
19일간의 여정을 정리하며 도심을 거닐었다. 이후 벌어질 놀라운 사실을 예측하지 못한채..
귀국 전야를 잊지 못하게 만든 화재(?) 사고
호주 여정을 마무리하는 밤, 나 자신에게 성찬을 선물하고 싶어 한국 마트에서 소고기와 야채 그리고 소주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호주산 앵거스를 한국식으로 구워 먹으려 했다. 준비 과정은 순탄했다. 고기를 먹기 좋게 썰고 야채를 씻었다. 그리고 고기를 굽기 위해 프라이팬을 달궜다.
그런데 예열된 프라이팬에 고기를 올리는 순간 일이 벌어졌다. 고기가 팬 위에 닿는 순간 엄청난 양의 연기가 발생했고 숙소 안을 가득 채웠다. 정말 순식간에 숙소 안은 연기로 가득 찼다.
놀란 마음에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려는 찰나. 화재경보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릉~" 그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귀가 얼얼할 정도였다. 순간 뭘 해야 할지 모른 채 멍하니 서있었다. 그러다 놀란 마음을 가라 앉히고 창문을 열고 집안을 환기했지만 경보음은 멈추지 않았다. 아파트 형태의 숙소여서 직원들은 이미 퇴근한 후였다.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뭐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정말 ‘멘붕’이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다른 방 투숙객들이 경보음에 놀라 밖으로 나왔다. 소방서에 신고하면 일이 커지는 상황인지라 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신고를 막았다.
여행 중 벌어지는 황당한 일은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라는 선물이 된다.
그렇게 투숙객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해별 방법을 고민하던 중, 경보기도 전기 제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방에 있는 두꺼비집을 찾아 전원을 내리자 경보음이 멈췄다. 10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몇 시간처럼 느껴진 순간이었다. 여담이지만 소고기는 구워 먹지 못하고 라면에 넣어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