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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 Hyuk Choi Mar 19. 2021

당신이 호주에 꼭 가야만 하는 이유_17

퍼스에서의 첫 여정 시작

[호주 여행 16일 차] 퍼스에서의 환상적인 한 시간

여행 16일째, 멜버른(Melbourne)에서 밤 비행기를 타고 새벽에 퍼스(Perth) 공항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펜션 호텔 퍼스(Pensione Hotel Perth)로 향했다.  본 숙소로 이동하기 전, 새벽 시간만 머물 곳이라 저렴한 호텔(한화 85,000원)을 잡았는데, 건물은 오래되었지만 객실 내부는 깔끔했다. 방에 도착해 몸을 씻고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간의 숙면을 취하고 아침 7시에 일어나 퍼스에서의 첫 날을 시작했다. 퍼스에 오게 된다면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퍼스의 주변 항구 도시 프리맨틀(Frementle), 사막에 만들어진 신의 조각품 피나클(The Pinnacles) 그리고 파도치는 모습으로 유명한 웨이브 락(Wave Rock),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동물 쿼카(Quokka)가 살고 있는 로트 니스트 아일랜드(Rottnest Island) 등이 있었다.

그중에서 첫날 여정은 퍼스에서 가장 가까운 프리맨틀에 가 보는 것으로 정했다. 체크 아웃까지 시간이 남아 있어 숙소 주변을 산책했다. 호텔을 나와 처음 접한 퍼스는 지금까지 방문한 다른 도시들과 다른 느낌을 선사했다. 케언즈 , 타운즈빌의 소박함과 시드니, 멜버른의 화려함을 적절하게 섞어 놓은 모습이랄까?

퍼스의 거리 모습

구글맵을 열어 보니 엘리자베스 항구(Elizabeth Quay)가 걸어서 10분 거리 안에 있어 나가 보기로 했다. 안내에 따라 걸어가는데, 퍼스를 건설하고 통치했던 제임스 스티어링(James Stirling) 선장의 동상과 마주쳤다. 특이한 것은 동상이 재단에 올라가 있는 게 아니고 보도 블록 위에 놓여있어 친근함을 더한다는 것이었다.

길 옆에 놓여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던 스티어링 선장 동상

다음 블록으로 넘어서자 캥거루 조각이 인도 위에 설치되어 있었다. 퍼스에서는 동상을 보도 블록 주변에 설치하는 게 일반적인 방식인 듯했다.  

캥거루 청동상은 Perth - A City for People이라는 도시 문화 사업의 일환으로 1988년 설치되었다고 한다. 캥거루 친구들과 셀카를 찍고 엘리자베스 항구로 이동했다.

캥거루 가족 동상에서 셀카 한장

항공에 도착하기 전 먼발치에서도 거대한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크리스티안 디 비에트리(Christian de Vietri)가 만든 높이 29m의 스판다(Spanda)였다. 크기가 다른 총 6개의 타원이 물결이 퍼지는 듯한 형상으로 세워진 조형물로 보는 방향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보였다.

항구 주변은 신축 건물의 공사로 분주한 모습이었다.

다양한 앵글로 사진을 찍고 해안 주변에 설치된 은색 조각 앞으로 다가갔다. ‘첫 조우(First Contact)라 불리는 이 작품은 호주 원주민 눙아(Noongar)족 예술가인 난눕(Nannup)이 창작한 작품으로 배에 올라탄 펭귄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크기가 5m에 이르고 알루미늄 코팅 마감으로 멀리서도 번쩍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치 터미네이터 2의 T-1000이 펭귄 형상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호주 원주민 작가 난눕의 대형 조각작품

이 펭귄 조각은 호주 눙아족이 백인들을 처음 접했을 때 가졌던 기대감을 모티브로 창작되었다. 작가는 원주민들의 정서를 기반으로 눙아족에게 백인들은 조상들의 환생을 돕는 메신저로 인식되었을 것이며, 그들을 환대했을 거라고 상상했다. 그녀는 이를 기리기 위해 희망을 부르는 거대한 새(백인)와 매개체(배)를 조각으로 승화시켰다. 안타깝게도 실제 역사는 원주민들의 이런 바람과는 다르게 백인에 의한 원주민의 차별주의 정책이 펼쳐졌지만...

펭귄 조각 옆에는 기하학적인 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멋진 외형에 매료되어 그 위를 걸었다.

다리를 건너자 여행사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퍼스의 주요 관광지를 다녀야 하기에 차량을 렌트할지 아니면 시드니와 멜버른에서 그랬듯 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할지 고민이었다.

일단 여행사에 들어가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다. 여행사에 들어서니 상담원이 친절하게 맞이해 주었다. 다음 날부터 3일에 걸쳐 피나클, 웨이브 락, 로트 니스트 아일랜드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하자 관련 상품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관광 상품을 복수로 계약하면 할인이 된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거기에 더해 웨이브 락의 경우 퍼스에서 338km(차로 4시간 소요)나 떨어져 있어 운전하기에 무리가 있어 Adams라는 관광 회사의 상품으로 모두 예약했다.

짧은 시간에 모든 투어를 예약해 버렸다.

퍼스에서의 첫날, 그것도 한 시간 만에 즐거운 산책도 즐기고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예약을 마치고 나니 홀가분했다. 다시 숙소에 돌아오니 체크아웃 시간(11시)이 가까웠다. 짐을 챙겨 모든 여정이 마칠 때까지 머물 바타비아 아파트먼트(Batavia Apartment)로 이동했다. 숙소 체크인 시간이 오후 3시였는데 운 좋게도 빈방이 있어 이른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바타비아 아파트먼트는 퍼스에서 머무는 4일 동안 머물 숙소로 하루에 10만원 정도 가격이었다. 약간 외진 곳에 위치했지만 시설만큼은 지금까지 머물렀던 숙소들 중에 최고였다. 취사가 가능한 부엌, 빨래 및 건조가 가능한 세탁 시설 거기에 깔끔한 침실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

퍼스에서 4일 동안 머물렀던 파타비아 아파크먼트

짐을 풀고 프리맨틀로 떠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퍼스에서 19km 떨어진 프리맨틀은 페리를 타고 가거나, 전철을 타고 갈 수 있었다. 마침 숙소 근처에 전철역이 있어 그곳으로 향했다.

20분 정도 걸어서 역에 도착해 1일 자유 이용권을 구입해서 전철에 올랐다. 창 밖 풍경을 감상하다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프리맨틀에 도착해 있었다.

퍼스에서 프리멘틀로 가는 방법은 전철(육로)과 페리(해로)가 있다.

전철에서 내려 첫 목적지인 라운드 하우스(Round House)를 찾아갔다. 라운드 하우스로 가는 길 양편에는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즐비했고 건물 안은 서점, 식당, 기념품 가게 등 다양한 가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10여 분을 걸어가자 해변가에 위치한 라운드 하우스가 보였다.

라운드 하우스는 서부 호주 최초의 현대식 건축물로 8개의 감방으로 구성된 감옥이었다. 1830년 착공하여 1831년 완성되었고 1886년까지는 죄수 수용 시설로 활용되었다. 이후 1900년까지는 경찰과 가족들의 숙소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감옥을 관사로 활용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밖으로 보이는 멋진 해변 풍경을 감안하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리멘틀에서 첫 목적지였던 라운드 하우스

라운드 하우스 내부를 둘러보는데 내실 한편에 누군가 누워있어 가까이 가서 확인하니 수감자의 생활상을 설명하기 위해 놓은 마네킹이었다. 그런데 마네킹의 겉모습이 좀비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섬뜩했다.

좀비를 연상케한 재현 마네킹
라운드 하우스에서 바라본 바다 풍경

‘좀비 마네킹’을 보고 놀란 가슴을 푸른 바다를 보며 다독이고 해변(Bathers Beach) 산책로로 나갔다. 산책로 주변에는 양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조각과 해변의 포토 포인트로 유명한 비키니를 입은 ‘벨라(Bella)’가 자리하고 있었다. 벤치 중간에 앉아 있는 벨라 옆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지난 여정을 떠올렸다. 한 동안 벨라와의 데이트(?)를 마치고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이 자리하고 있는 선창 쪽으로 향했다. (‘벨라’는 2019년 10월 9일 세 명의 도둑들에 의해 벤치에서 도난 당해 결국 다시 찾지는 못했다. 이에 벨라의 제작자인 그레그 제임스(Greg James)가 수개월 간의 작업을 통해 두 번째 벨라를 제작하여 2020년 8월 같은 위치에 재설치했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첫 번째 벨라, 지금 프리멘틀에 가면 두 번째 벨라를 만날 수 있다.

선창에는 여러 개의 식당이 있었는데 숙소에서 추천받은 피시 앤 칩스 전문점 케일리스(Kailis) 카페로 갔다. 식당에 도착해 BBQ 바라문디(Barramundi, 호주 원주민어로 ‘비늘이 큰 물고기’)라는 피시 앤 칩스 세트와 시원한 화이트 와인 1병도 주문했다.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파라솔 아래 자리를 잡았다. 음식이 나오고 와인과 함께 식사를 시작하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과 맛있는 음식, 여기에 흥을 돋우는 와인까지 그 무엇 하나 나무랄 게 없었다.

선창의 멋진 풍경을 감상하며 식사를 했던 행복한 순간
피시앤칩스와 화이트와인 조합은 진리다.

혼자만의 즐거운 식사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우당탕’하는 소리에 놀라 시선을 돌리니 손님이 떠난 빈 테이블에 갈매기 떼가 날아들어 ‘잔반 쟁탈전’을 벌였다. 순식간에 음식물이 떨어지고 식기가 나뒹굴었다. 이후에도 녀석들은 식당 주변을 맴돌며 떨어진 음식물을 주워 먹었다. 그러면서 나의 눈치를 살피며 다가왔다. 내가 먹고 있는 음식을 노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때부터 ‘여유로운 식사’는 ‘분주한 식사’가 되고 말았다. 식사를 하다 감자튀김을 흘리자 여러 마리의 갈매기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좀 더 시간이 흐르자 이제 용기가 생겼는지 내 바로 옆으로 날아와 호시탐탐 음식을 노렸다. 다행히 갈매기의 눈치(?)를 보며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식사 후 자리를 뜨자 갈매기들이 테이블로 달려들었다. 유유히 다음 여정을 향해 떠나는 나의 뒤로 사투를 벌이는 갈매기들의 모습. 명랑 만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했다.


최악의 해상 참극 바타비아 사건

식사를 마치고 항구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창 한쪽에는 작업을 하는 어부의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어 놓은 ‘어부(the fisher)’라는 조각이 있어 옆에 기대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선창 반대편에는 프리맨틀 출신 유명 록가수 본 스캇(Bon Scott)의 동상이 서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동상 위에 올라가 놀고 있어 한동안 지켜보다가 그들이 떠나고 나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선창에 설치되어 있는 어부 조각. 프리멘틀에도 퍼스처럼 조각들이 노변에 설치되어 있었다.
와인 한병 마시고 취중에 찍은 셀카
프리멘틀 출신 유명 락가수 본스캇 동상

이후 이날 여정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와 난파선 박물관(Wa Shipwreck Museum)’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 곳은 유럽의 대항해 시대 최악의 살인극이 벌어진 바타비아(Batavia)호와 다른 난파선 잔해들이 전시된 박물관으로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내게 있어 꼭 가야만 할 장소였다.

박물관을 관람 전, 가이드는 이 박물관의 주요 전시물인 바타비아호와 관련된 사건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와 난파선 박물관 입구

1600년대 네덜란드에 적을 둔 동인도 회사는 인도와의 향신료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향신료 무역은 항해에 나선 3명 중 1명이 숨질 정도로 험난한 과정이었지만, 단 한 번의 항해로 평생 먹고살 수 있는 부를 얻을 수 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었다. 대부분의 사망자는 선박의 좌초, 선상 반란 등으로 인해 발생했는데, 이어서 설명하는 바타비아호 좌초 사건은 향신료 무역 역사상 유래를 찾든 최악의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341명의 승선 인원(여성 22명)을 태운 거대 함선 바타비아 호가 1628년 9월 말 인도를 향해 출발하면서 시작되었다.

1629년 6월 3일, 7개월째 순조로운 항해를 이어가던 바타비아호의 선장 애드리안 자콥스(Adrian Jacobsz)는 남아공의 희망봉을 지나쳐 인도로 향하고 있었다. 이때 한 선원이 항로 상에 이상 물체가 보이는 걸 자콥스 선장에게 보고 했는데, 그는 물보라일 거라고 무시하고 항해를 이어간다. 그러나 선원이 발견한 물체는 단순한 물보라가 아닌 산호섬의 돌출된 부분이었다. 바타비아호는 불행히도 이 암초에 걸려 큰 손상을 입고 서서히 침몰하게 된다.

전시장에 재건해 놓은 바타비아호 잔해물

이 난파 사고로 인해 40여 명은 익사하게 되고 나머지 생존자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게 되는데, 자콥스 선장과 함께 구명보트를 타고 자카르타로 구조 요청을 하러 떠나는 무리(48명), 부선장 제로니머스 코넬리즈(Jeronimus Cornelisz)와 함께 배에 적재된 재물을 지키기 위해 난파선에 남아 있는 무리(70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타비아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산호섬(Beacon Island)으로 건너간 무리(180명)가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항은 난파선에 남아있던 부선장 코넬리즈 무리는 구조대가 도착하면 그들의 배를 공격해서 보관하고 있던 재물을 탈취해 제 삼국으로 도망갈 해적질을 모의하고 있었다.

바타비아 학살 묘사한 그림 (출처, National Geography)

그러던 중, 바타비아호는 좌초한 후 9일 만인 1629년 6월 12일 완전히 침몰하게 된다. 그 결과 배 안에 있던 70명 중 20여 명만이 가까스로 살아남아 산호섬에 도착한다. 부선장 코넬리즈는 초기에는 생존을 위해 룰을 정하고 생존자들을 효과적으로 통솔하는 듯했으나, 시간이 흘러 식량과 물이 부족해지자 선상반란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사람들을 하나, 둘 제거하기 시작한다. 이때 살인을 저지르는 방식이 엽기적인데, 코넬리즈는 부선장이라는 지위를 앞세워 자신과 뜻이 다른 사람들을 주변의 작은 산호섬으로 분산시킨다. 이후 본섬(Beacon Island)에는 자신의 세력과 약자(부상자, 여자, 아이들)만 남게 하고 생존을 위해 입을 줄인다는 명목 하에 부상자를 살해하도록 지시한다.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반역 세력으로 몰아 함께 처형한다.

시간이 흘러도 구조대가 도착하지 않자 무료함을 느끼던 코넬리즈 부선장 세력은 살인을 유희로 즐기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참극 속에서도 코넬리즈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지속적으로 살인 지령을 내렸으나 자신이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바타비아 참극의 주범 코넬리즈 부선장

한편, 자카르타로 떠났던 자콥스 선장 일행은 천신만고 끝에 7월 7일 자바의 남서 해안을 통해 자카르타 항에 도착했다. (최소한의 식수만 가진 보트가 1,000마일의 항해를 감당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최초였다.) 그리고 7월 15일, 드디어 야콥스 선장을 제외한(야콥스는 잘못된 항해로 인해 기소된 상태) 구조대는 펠사아르트를 주축으로 구조선 사르담 호가 자카르타를 떠나 살육이 자행되고 있는 ‘바타비아의 무덤’으로 향한다. 출발 후 두 달이 지난 9월 17일, 구조대는 마침내 목적지 근처에 이르게 된다.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해서 목격한 상황은 부선장 코넬리즈파와 생존자들 간에 벌어지고 있는 대치 상황이었다. 그때 코넬리즈파가 구조선을 탈취하기 위해 접근하게 되는데, 생존자들이 이 사실을 구조대에 먼저 알려 선상반란을 조기에 진압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코넬리즈파에 속했던 사람들은 생존자 110명~124명을 살해한 혐의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322명의 승선 인원 중 116명만이 살아남아 네덜란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타비아호 참극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바로 ‘바타비아호 특별 전시실’에 들어서니 머리가 쭈뼛쭈뼛 서는 것 같았다. 여기에 더해 전시실 내부가 어둡게 연출되어 있어 섬뜩한 느낌이 배가 되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전시실 중앙에는 1629년 침몰한 바타비아호의 잔해를 재건해 놓은 전시물이 처참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앞에 바타비아호에서 인양된 석조 개선문(Batavia Portico Façade)이 황량한 모습을 들어내고 있었다.

바타비아호에 실려있던 사암 개선문 (복제품)

개인적으로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앞서 이야기한 바타비아 참극에서 살해된 희생자의 유골이었다. 400여 년 전 벌어진 참극을 직접 목격한 사람의 유골이라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박물관에는 바타비아호 유물 외에도 호주 서부 해안의 난파선에 관한 전시물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다른 전시실을 감상하고 박물관을 나서는 찰나 때마침 해가 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을 바로 보고 있노라니 약 400년 전, 산호섬에서 삶의 기로에 선 사람들에게 이 붉은 노을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 궁금해졌다.

행복한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아름다운 붉은 노을이 생의 기로에 서있는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잃은 동료의 피를 연상케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인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16일째 여정을 마무리했다.



흥미로운 전시물_ 1600년대에 히트 캐릭터 상품(?)_ 수염 난 아저씨 주전자(Batmann Jug)

독일어로 바트만(수염 난 남자, Batmann)의 모양이 새겨진 주전자로 벨라민 주전자(Bellarmine jug)라고도 불린다. 이 도기는 현재 독일 서부 지역에 위치한 쾰른(Cologne)에서 16~17 세기에 걸쳐 생산되었고 술병, 음식 보관 용기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수염 난 아저씨(?)가 유럽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퍼지게 되는데 이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바트만 주전자를 수은의 운송에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바트만 주전자는 바타비아가 침몰한 서호주는 물론 동인도 회사의 선박의 침몰한 장소에서 발견되고 있다.

17 세기에 바트만 주전자는 마법병(Witch Bottle)으로 사용되었다. 주술을 믿는 사람들은 이 주전자에 인간의 소변, 머리카락 등 정기가 담긴 다양한 물건으로 채웠는데, 마법 주전자를 가지고 있으면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 생기거나 적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믿었다.

참고로 마법병을 위해 제작된 바트만 주전자는 특히 사악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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