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 시작, 기다리고 있던 그 사람

<도망이 아닌>

by 이두래

숙제 시작, 기다리고 있던 그 사람



한 달의 시간을 찬찬히 돌아본다.

그 끝엔 한 사람이 있다.


세부 막탄에서 첫 주의 영호는

한국과는 다른 수질과 자외선으로

알레르기 반응이 올라와 고생했다.


윤호는 어떠한 것에도 반응이 없었다.

영어만 못하는 현지인인 줄 알았다.

게다가 호기심왕 윤호는

버킷리스트였던 바다 잠수와

두리안 먹어보기를 기어코 해냈다.


그리고


...


다시는 두리안을 먹지 않기로 했다.

나는

한국에선 “안돼!”만 달고 살았는데

세부에선 “좋아!”만 달고 사는

엄마가 됐다.


마치 강박 있는 사람처럼

아이들이 “GO!”하면

나는 “OK!” 하면서

어디든 예약하느라 바빴다.


그러고는 아이들 몰래,

엄청난 걱정 더미를 끌어안고

밤새 뒤척였다.


길을 잃거나

찾아가지 못하거나

말이 통하지 않을까 봐.


뭐든 다해주고 싶었던 세부 한 달 살기.

아이들도 내 마음이 느껴졌는지

다시 태어나도 엄마 아들 하겠다고

고맙다고 했다.


맞아. 우리 잘 살아냈어.


길을 잃어도

숙소로 돌아갈 방법을 알아냈듯이

이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잘 지내야겠지.


한국의 집엔 아빠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도망 나왔던 그곳을

홀로 외롭게 지켰을

아빠.

이 정도로 외롭진 않았다고 합니다만, 그림은 정직하니까요.


우리가 낯선 곳에서 괜찮아지고 있을수록

아빠는 익숙한 곳에서 낯섦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떠나던 날엔

짐을 줄이기 위해 반팔을 입고 갔다.


돌아오던 날, 한국은 눈이 내렸다.


아빠는 우리 셋의 패딩을 들고

새벽부터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울던 아이들이

아빠를 보자마자

웃으면서

달려가 안겼다.



나는 다행이다, 싶었다.

그렇게 우린 다시 돌아왔다.



“엄마, 한국에는 정수기가 있었지.”


...


영호의 귀국 소감이다.


아이들에겐 목표가 생겼다.

더 잘하고 싶다고,

더 배우고 싶다고 했다.


엄마로서 가장 듣기 힘든 말이자,

가장 고마운 말이었다.


이 도망은 숙제처럼 시작했지만,

더 많은 숙제를 받아온 여행이 됐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힘든 일들을 마주해야 한다.


그래도 이제 나는 안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

다시 잘 웃을 수 있을 거라는 걸.


세부에선 정말 많이 걸었다.

낯선 거리에 서서 주위를 둘러봤고,

안 되는 영어로 말을 건넸고,

기다리고 또 걸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나는 알게 됐다.


우리가 떠났던 이유는

‘도망’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였다는 걸.



지금도 때때로

다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이렇게 일기를 꺼내어보고 있다.


우리는 살아냈고,


그리고


다시 잘 지낼 수 있을까.



#작가노트

숙제는 아직도 매일 하고 있어요.
오늘도 아이들과 웃고,
하루를 천천히 기록합니다.


세부에서 외치던 “GO”는
이제 조금씩 “괜찮아”가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조용한 용기는

오늘을 조금 더 단단하게 살아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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