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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으로서의 채집

by 발걸음

사실 채집은 인류의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활동일 뿐만 아니라 도토리를 갉아먹는 다람쥐나 꽃가루를 찾아 취하는 벌의 본성과 다르지 않은 인간 본연의 동물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인간의 우월함과 문명화에 대한 환상을 흔든다. 또 농사 활동이 아닌 채집으로 잉여물을 남기기 어렵고 그렇기에 그것으로 부를 축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채집은 자연의 리듬을 거스르지 않는 매력적인 삶의 방식이다.


‘채집하다’라는 뜻을 지닌 영어 단어 포리지(forage)는 가축에게 먹이는 풀과 식량을 일컫는 중세 프랑스어, 푸라지(fourrage)에서 유래하였다. 또한 군대 용어로 이 단어는 군인들이 말을 먹이기 위해 식량을 모으는 행위를 뜻하기도 했다. 푸라지의 어원은 다시 중세 라틴어인 포드룸(fodrum)에 있는데, 포드룸은 동물에게 먹이는 식량을 뜻했다. 따라서 포리지는 본래 식량을 채집하거나 가축을 먹이는 행위를 가리켰으나 전쟁 중 적지에서 식량이나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수색하고 약탈하는 의미로도 확장되었다. 포리지에서 유래한 영어 단어인 포레이(foray)는 아예 ‘약탈 원정’이라는 뜻을 지닌다.


오늘날 포리지는 자연에서 야생 식물과 먹거리를 찾아 채집하는 활동을 주로 의미한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이 단어는 지속 가능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생태적인 삶에 대해 관심이 증가하면서 새롭게 주목받는 분위기이다. 심지어 런던과 같은 대도시에는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상시 참여 가능한 채집 워크숍이 다양하게 개최된다. 가을에는 뭐니 뭐니 해도 버섯 채집 프로그램이 대단히 인기다. 사유지에서도 식물의 뿌리만 건드리지 않으면 채집이 허용되는 영국과는 달리 이런 활동이 종종 법적으로 금지된 미국에서도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규제에 도전하며 채집을 이어나가고 기술을 전수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다. 채집 프로그램에서는 주로 도심의 공원이나 인근의 숲, 마을을 함께 산책하며 먹거리를 분별해 채집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또 수확물을 활용해 요리하는 방법까지도 공유한다. 이쯤 되면 채집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산책 삼아 시도해 볼 만하다.


채집에 대한 관심은 특히 팬데믹 기간 동안 급상승했다. 락다운으로 인해 움직임의 제한을 겪은 사람들이 공원이나 숲으로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먹거리까지 채취하는 일에 새롭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한국에서는 울릉도 자생 식물로 주민에 한해 한정적으로만 채취 가능한, 명이나물로 불리는 산마늘을 팬데믹 동안 독일에 사는 어느 한국 사람은 숲에서 마음껏 채취하고 있다. 물론 취미를 넘어서 경제적인 이유로 생계에 보태기 위해, 또는 기후 변화로 인한 불안정한 식량 공급에 대한 대안으로 채집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상 채집에 대한 현재의 관심은 완전히 새로운 건 아니다. 2000년대 중반 즈음부터 세계적으로 유명한 식당의 셰프들을 중심으로 채집한 재료를 메뉴에 보태면서 생긴 분위기도 한몫한다. 예를 들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식당으로 몇 번씩이나 선정된 덴마크의 노마(Noma)를 운영하며 일약 스타 셰프의 반열에 오른 르네 레드제피(René Redzepi)는 제철에 근거리에서 나는 식재료를 사용해 우리의 편협된 감각에 도전하는 음식을 창조한다. 그는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 즐겨 채집하는 버섯이나 야생 베리, 허브류 외에도 이색적인 식재료를 실험했는데 그중에서 특히 사람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리던 것에는 순록 이끼가 있다. 순록 이끼를 건조하거나 튀겨서 활용한 상상을 뛰어넘는 그의 요리는 노마가 미식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자연 현상을 미술관 내에서 재현하는 작업으로 잘 알려진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이 갤러리 벽 전체를 살아있는 이끼로 가득 채운 <이끼 벽 Moss Wall>(1994)에서 아버지의 모국인 아이슬란드의 자연을 시각, 후각, 촉각을 총동원해 표현했듯이 레드제피의 이끼 요리에는 평론가들의 평가처럼 “시간과 장소에 대한 철학”이 드러나고 그것을 통해 “북유럽의 자연을 탐험하는 경험”을 한다고 할 만하다.



올라퍼 엘리아슨, <이끼 벽>, 1994, 테이트 모던, 런던, 2019



이처럼 재료 공급을 채집에 의존하는 새로운 요리들이 놀랍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불편하기도 하다. 아줌마들이 봄이면 들판에서 쑥과 냉이를 캐고, 열성 산행꾼들이 가을에 버섯 채집에 몰두하는 등 자연에서 필요한 것을 취하는 채집 활동은 한국을 포함한 다양한 문화권에서 깊이 뿌리내린 삶의 방식이었다. 오랫동안 자연과 연대하면서 생존했던 인류의 지혜가 채집에 담겨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늘날 고급 레스토랑에서 이를 세련된 미식 경험으로 재구성하고 그 경험이 인스타그램에서 보여주기 좋은 또 하나의 자랑 정도로만 되는 건 조금 염려가 된다. 재료의 희귀성에만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특권층의 놀이’가 되면 해당 식재료를 채취하던 맥락은 쉽게 간과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주제에 관심을 두고 특정 지역의 채집 전통을 더욱 깊이 따라가다 보니, 어느 곳에서는 채집이 과거 식민주의 정책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한편, 또 다른 곳에서는 현대 정치에서 국경이라는 인위적인 경계와 문화적 정체성을 환기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국 원주민인 아니시나베 부족 인디언이자 식물학자인 로빈 월 키머러(Robin Wall Kimmerer)는 『향모를 땋으며』에서 식민주의 정책이 어떻게 미국 원주민들을 대대로 내려오던 전통 지식과 생활 방식, 세계관으로부터 분리시켰는지 얘기한다. 특히 작가는 직접 딸기를 채집했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참으로 시적이고 아름답게 원주민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세계관을 드러낸다.



‘선물이 발치에 한가득 뿌려져 있는 세상’이라는 나의 세계관을 처음 빚어낸 것은 딸기였다. 선물은 나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공짜로 온다. 내가 손짓하지 않았는데도 내게로 온다. 선물은 보상이 아니다. 우리는 선물을 제 힘으로 얻을 수 없으며 자신의 것이라고 부를 수 없다…… 우리가 할 일은 눈을 뜨고 그 자리에 있는 것뿐이다…… 대지가 주는 선물, 또는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선물은 특별한 관계를 확립한다. 이것은 주고받고 보답하는 일종의 의무다. 들판은 우리에게 (딸기를) 주었고 우리는 아빠에게 (딸기를) 주었다. 우리는 딸기에게 보답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딸기) 덩굴이 닿는 곳의 잡풀을 뽑아 작은 맨땅을 만들어주었다……

“선물이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의 유대 관계를 확립한다는 것은 선물과 상품 교환의 결정적 차이다.” 야생 딸기는 선물의 정의에 들어맞지만 식료품점의 딸기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향모를 팔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우리에게 그냥 주어진 것이기에 남들에게도 그냥 줘야만 한다.



과거 북미 원주민들의 채집 전통은 17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식민지 건설과 그로 인한 토지 강탈로 인해 맥이 끊기다시피 했다. 오랫동안 대대로 살아오던 땅에서 갑자기 쫓겨나 백인들이 지정한 보호구역 안에 갇히면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자연 자원에 접근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에 거주하던 포우하탄 부족 연맹은 1607년 백인들이 들어온 후 불과 15년 만에 본래의 터전에서 쫓겨났고, 이와 같은 원주민 억압은 이후 북미 대륙 전역에서 계속되었다.


그런데 과거 폭력의 상처에서 앞으로 한 걸음 움직이는 반가운 소식이 최근에 있었다. 전통적으로 노스캐롤라이나에 살았던 체로키 부족은 본래 자신들의 터전이었던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 국립공원(Great Smoky Mountains National Park)에서 시금치와 맛이 비슷한 소찬(Sochan)이라는 식물을 채집할 권리를 일부 되찾았다. 그들은 1830년에 이 지역에서 강제 퇴거당했고, 이후 1916년에 미국에서 국립공원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국립공원 내에서 식물을 채집하는 일이 전면 불법이 되었다. 그렇기에 최근 소찬 채집권 회복은 단순한 먹거리 자원 채집이라는 의미를 넘어 오랜 식민주의 역사에 맞선 원주민들의 문화적 영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작은 걸음이라 봐야 할 것이다.


한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채집 활동 역시 최근까지도 상징적인 저항 행위였다. 물론 전쟁으로 인해 지금은 그마저도 전면 중단되었을 일이지만 말이다.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시각 예술가인 주마나 만나(Jumana Manna)는 자신의 고국인 팔레스타인에서의 채집 관행에 관심을 기울이며 식물 채집이 단순히 자연에서 무언가를 얻는 활동이 아닌, 매우 복잡한 정치적, 문화적 역학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채집자 Forager>(2020)는 기록영화와 극영화 기법을 혼합한 영상 작업으로 이스라엘의 점령 아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본래의 땅에서 밀려나며 전통적인 채집 풍습이 따라서 어떻게 억압되었는지 때로는 신랄하고, 때로는 유머스럽게 보여준다. 한국 사람들에게 김치와 된장이 정체성을 상징하는 주요 식재료이자 음식이라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타임과 같은 허브인 자타르(za'atar)와 엉겅퀴의 일종인 아쿠브(akkoub) 같은 야생 식물들은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의 요리와 문화에서 필수적인, 역사와 정체성을 상징하는 식물이다. 그러나 작가에 의하면 이스라엘 정부는 전략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채집 활동에 제재를 가하기 위해(이로서 전통문화를 위축하고 몰살하고자) 1977년에 자타르를 2005년에는 아쿠브는 소위 ‘보호종’으로 지정해 채집을 금지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채집 금지에도 불구하고,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여전히 몰래 이스라엘의 국립공원이나 자연보호 구역에서 자타르와 아쿠브를 채집했고 심지어는 일부러 체포될 목적으로 행위를 이어갔다. (참고로 이들 식물은 재배가 아니라 채집을 통해 수급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채집은 이스라엘의 통제에 맞서는 정치적 저항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틱톡이나 인스타그램을 통해 다양한 채집 사례를 공유한다. 그중에서도 활기 넘치는 영상으로 틱톡에서 수백만 명의 젊은 팔로워를 얻은 ‘검은 채집자(blackforager)’라는 이름의 알렉시스 넬슨(Alexis Nikole Nelson)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전면에 드러내며 자신의 인기를 활용해 미국의 반 채집법이 과거 해방된 노예들의 자립을 어떻게 제한했는지에 대해서 목소리를 낸다. 기록에 따르면 노예였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턱없이 부족하게 제공되는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오랫동안 채집 관행을 이어나갔다. 이후 노예에서 해방된 후에도 야생 음식을 먹고 팔아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에 불만을 느낀 백인들이 흑인들의 경제적 자립을 억압하고 그들을 또다시 노동력을 제공하는 자본주의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 반 채집 규제를 만든 것이다. 규제는 사유지 출입 금지, 흑인들의 공원 접근 제한과 같은 반 침입법을 포함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례들을 접하면서, 나는 엄마의 채집 취미나 내 주변 사람들의 채집 활동, 그리고 우연히 자연에서 얻는 행위를 과거와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어느 날, 집 근처 공원의 자그마한 떡갈나무 숲에서 참새의 네댓 배 정도 크기로, 머리에 선명한 빨간 모자를 쓴 귀여운 새가 떡갈나무 둥치를 타고 오르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다. 예민한 감각을 지닌 맥스가 산책 중에 갑자기 멈춰 위를 올려다보았기에 나도 새를 목격할 수 있었다. 순간 도심 속에서도 자연을 마주했다는 감격과 이처럼 특별한 이웃이 들를 정도라면 이 동네는 분명 살 만한 곳이라는 묘한 기대가 밀려왔다. 또 다른 밤에는 가로등의 떨리는 전구 소음과 나의 발걸음, 숨소리만이 존재하는 듯한 고요한 공원에서 무척이나 낯선 새소리를 듣기도 했다. ‘우, 우’ 하고 길고 부드럽게 뻗어 나가는, 마치 목관악기의 음색 같은 신비로운 울림. 나는 그 소리의 진원지를 찾으려 조심스레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탐색했지만 결국 새는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나는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은 뜻밖의 경험이 되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런 마주침은 봄마다 찾아오는 뽕나무 잎을 뜯어 나물을 무칠 생각에 들뜨는 감정과도, 복분자로 손을 빨갛게 물들이며 완벽한 자연의 창조물을 마음껏 즐기는 기쁨과도 닮았다. 산길을 내려오다 산초 잎을 한 장 따서 향을 맡으며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경험과도 맞닿았다. 엄마가 그러했듯, 전 세계 많은 전통에서 그러했듯, 나도 아이에게 채집을 통해 자연과 만나는 기쁨을 물려주고 싶다. 내 아이가 찬바람 속에서도 어김없이 봄을 알리는 향기로운 매화를 보고 해마다 멋진 열매를 주어 고맙다고 느끼면 좋겠다. 자연이 보답을 바라지 않고 내어주는 걸 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며, 우리가 자연의 일부임을 일깨워주는 소중한 매개체이니까. 그렇기에 이런 삶이 후대에도 지속되도록 관심을 잃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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