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민이 지킨 도시의 녹지

런던의 공원 이야기

by 발걸음

쇠라의 그림 속 사람들처럼 일주일 내내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라면 비위생적이고 좁은 도시 빈민가에 있는 방 안에 웅크리고 있기보다는 여유롭게 풀밭에 누워 흐르는 물이라도 바라보는 일이 절실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공간에 접근할 수 있었을까? 과연 특권층이 아닌 서민과 여자들이 방문할 만한 공원은 언제부터 생겨났으며 어떻게 공원 산책이 자연스러운 여가 활동으로 자리 잡게 되었을까? 물론 도심 녹지에서의 여가라는 주제가 회화의 소재로 등장한 때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활동하던 시기였고 당시 그 주제가 유행이었던 이유 중 하나는 휴대 가능한 튜브 물감의 개발로 화가들이 야외에서 그림을 제작하는 일이 가능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당연하기만 한 동네 공원 산책이 당시에 인기 좋은 여가 활동이 되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또 런던, 파리, 뉴욕과 같은 부러움을 사는 도시들이 자랑하는 공원은 애초에 어떻게 만들어지게 된 것일까?


이 과정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런던에 사는 미셸의 일상을 살짝 둘러보면 좋겠다. 50세의 나이로 그해 9월에 처음 대학생이 될 예정이었던, 그것도 명문 예술학교인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Central Saint Martins)에서 비디오아트와 퍼포먼스를 전공할 친구 미셸은 햄스테드 히스와 그 아래 남쪽에 위치한 프라임로즈힐의 중간에 위치한 동네에 산다. 내가 호스텔에서 만난 런던 사람들에게 햄스테드 히스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말하면 그들은 입을 모아 “거긴 특권층이 사는 동네예요. 알죠?”라고 말하며 미묘하게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내가 머물던 호스텔에는 런던 시민이지만 일시적으로 거주지가 없는 사람들이 종종 장기 투숙객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들의 사연을 들어보면 런던의 치솟는 주택 가격으로 인한 문제는 한국보다 덜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위에서 내려다본 햄스테드 히스



물론 미셸은 결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인 의미에서 특권층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미셸은 거대한 녹지 덕분에 런던에서 쾌적함으로는 최고라고 소문난 동네에 자리 잡은 조그마하고 허름한 타운하우스에 산다. '특권층이 사는 동네'라는 명성은 미셸과 함께 하루만 보내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미셸이 가장 좋아하는 일과 중 하나는 일주일에 두세 번 강아지와 함께 아기자기한 동네를 통과해 북쪽에 위치한 햄스테드 히스의 여성 전용 못으로 향하는 일이다. 강아지를 입구에 묶어놓고 시원한 물에 뛰어들어 수영을 즐긴 후 잔디밭에 누워 일광욕을 하는 사치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이 방문한 날 우리는 소풍을 즐기기 위해 미셸의 집으로부터 남쪽에 위치한 또 다른 공원인 프라임로즈 힐로 향했다. 아기자기하고 평온한 길을 거쳐 공원에 다다르자 탁 트인 전망, 예술적인 설치물이 갖춰진 어린이 놀이터가 우리를 맞았다. 미셸은 햄스테드 히스나 프라임로즈 힐에서 종종 주말을 가족과 빈둥거리며 보낸다. 때로 어스름해질 무렵 더 남쪽으로 이어지는 고급스러운 리전트 공원(Regent Park)으로 향해 그 안에 있는 야외 원형 극장에서 정상급 수준의 공연을 보기도 한다. 런던에서 여러 극장과 공연장에서 최고 수준의 공연을 많이 경험해 본 나도 이 야외극장에서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을 관람한 경험은 잊을 수 없다. 별빛 아래 한여름밤을 즐기기에 더 이상 완벽할 수는 없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공연 중에 엄마에게 대사를 설명해 준답시고 소곤거리다가 옆사람의 지독한 눈총을 산 일만 제외하면 말이다.



리전트 공원의 야외극장




또 미셸은 앞으로 집에서 대학 생활을 하게 될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까지 이동하는 데도 별 걱정이 없다. 리전트 공원에서 시작하는 리전트 수로(Regent Canal) 변을 15분가량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지나는 동안 물 위에 정박된 낭만적인 주거용 보트나 수목을 즐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점, 그 정도로 여유롭고 마냥 걷고 싶기만 한 숲과 들판, 풍덩 뛰어들 수 있는 못과 예술적인 어린이 놀이터, 아름다운 골목과 쾌적한 자전거길이 오밀조밀하게 갖춰져 있기에, 또 누구든 땡전 한 푼 쓰지 않고서도 집 밖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기에 사람들이 이 동네를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물론 보너스로 공원으로 나서는 길에, 학교 가는 길에, 빵집에 가는 길에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카페로 향하는 해리 스타일스(Harry Styles)를 마주치거나(실제로 두 번이나 그랬다), 토트넘에서 공을 차는 서니(Sonny)까지도 식당의 옆 테이블에서 보기도 한다.



리전트 수로



하지만 런던은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녹지 비율을 자랑하는 만큼 다른 동네라 하더라도 공원을 마주칠 빈도는 한국에서 편의점을 마주치는 정도와 비슷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동네에 살든 간에 런던 시민들은 걸어서 쉽게 크고 작은 공원에 갈 수 있다. 개인 소유의 정원까지 포함하면 광대한 런던(Greater London)의 총면적 중 녹지 비율은 약 50%에 달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유럽의 주요 대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런던도 도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정책적으로 걸어 다니기 좋은 도시를 만들어왔고 그 일환으로 가구당 자가용 소유율을 대폭 낮추는 것을 목표로 해왔다. 이를 위해 조밀한 대중 교통망을 운영하고 크고 작은 공원을 진주목걸이처럼 알알이 이어지도록 지속적으로 개선했다. 런던의 가장 핵심부인 시티오브런던(City of London)의 가구당 자가용 보유 비율은 33%, 이너 런던 (Inner London)은 42%, 이너 런던을 둘러싸는 외곽 지역인 아우터 런던(Outer London)은 69%로 이 수치는 계속해서 낮아지는 추세이다.


햄스테드 히스 덕분에 미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은 특별히 더 윤택하다. 그러나 햄스테드 히스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이지는 않았다. 런던 외곽의 주요 돼지 사육지였던 이곳은 16세기에 풍부한 천연 샘물 덕에 왕족과 귀족의 세탁물을 세탁하는 빨래터로 사용되었다. 햇살이 좋을 때면 언덕은 세탁부들이 빨아서 널어놓은 새하얀 천으로 마치 눈 덮인 산처럼 보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8세기 초반 무렵에는 온천지로 인기를 끌게 되며 이때부터 점차 주변에 고급 주택지와 여관, 술집 등의 유흥 시설이 들어섰다. 그런데 마을이 개발되고 점점 번화해지자 자연스레 히스의 규모는 반대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대규모 주택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주변의 빈터는 하나 둘 사라졌고 1818년이 되면 히스의 크기는 고작 1평방 킬로미터 정도에 불과하게 되었다.


햄스테드 히스가 1평방 킬로미터의 규모에서 더 축소되지 않고 오늘날처럼 광대하고 야성적인 외형을 갖추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대대적인 개발을 목전에 둔 시기에 있었다. 당시 런던은 산업혁명의 폐해로 엄청난 공해에 시달렸고 인구 폭증과 개발 열풍으로 인해 수많은 런던의 공유지들이 이미 사라졌거나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1821년에 상속으로 대부분의 히스와 근처 땅을 소유하게 되었던 윌슨 경(Sir Thomas Maryon Wilson)도 부동산 개발 열풍 속에서 1861년 히스 전체를 주택지로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건축 허가를 받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국회에 압력을 넣는다. 이에 명망 있고 학식 높은 주민들을 중심으로 한 지역민들은 엄청난 위기의식 속에서 개발 반대 운동에 착수했고 반대 움직임은 지역민을 넘어 점점 거대해졌다.



햄스테드 히스의 여성 전용 못



마침내 1869년, 미혼이었던 윌슨 경이 자녀가 없는 상태로 사망하자 히스를 상속받은 형제가 이 땅을 히스 관리위원회(히스를 지키기 위해 조직된 위원회)에 팔게 된다. 곧이어 햄스테드 히스 법(Hampstead Heath Act, 1871)이 제정되면서 공공장소로서의 히스의 지위가 공식적으로 확립되었다. 이 법은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영원히 히스를 개방 상태로 유지하며, 울타리를 치거나 건축하지 않는다……

히스의 자연적인 모습과 상태를 가능한 한 보존해야 한다.”


햄스테드 히스 법 중에서



히스 법까지 제정할 정도의 진전에 샴페인을 터트릴 만도 하지만 런던 시민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법 제정 후에도 몇십 년 간 더 자금을 끌어 모으고, 반대 의견을 지닌 사람들과 협상하고, 지치지 않고 싸운 결과 1920년에는 버지니아 울프가 즐겨 산책했던 의회 언덕(Parliament Hill)이, 또 켄우드(Kenwood) 영지와 주변 땅들이 추가로 히스에 편입된다. 이렇게 해서 히스의 규모는 1871년에 히스 법이 제정되었을 때의 고작 0.8평방 킬로미터에서 장장 3.2평방 킬로미터로 확장되었다. 이익에 눈이 시뻘건 개발업자들과 정치인들과의 싸움에서 이런 성과를 거두는 데는 장장 40년 이상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이 정도면 기적이라 할 만하다.


햄스테드 히스처럼 수십 년에 걸친 투쟁은 아니지만 최근 인기가 급상승한 성수동 인근 주민들의 휴식처인 서울숲 역시 시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힘입어 조성되었다. 2003년 공원이 조성되기 전의 성수동 일대는 낙후된 공장 지대였다. 현재 서울숲이 자리한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은 과거 조선 왕실의 매사냥터였고, 공원 조성 직전에는 비가 오면 물을 일시적으로 모으는 뚝섬 유수지와 레미콘 공장 같은 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서울시는 이 지역을 재개발하여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상업용 건물을 건설하기 위한 논의를 진행했다. 이에 대해 생명의숲시민운동을 비롯한 시민 단체들은 녹지 부족 문제를 지적하며 대규모 공원 조성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다양한 시민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공원 조성 캠페인은 단순한 지역 문제를 넘어 도시 전체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움직임으로 발전했다. 결국 2003년에 서울시는 개발안을 접고 공원을 조성에 착수했다. 그리고 생명의숲에서 갈라져 나온 단체인 서울그린트러스트를 중심으로 시민들이 직접 공원 조성에 참여할 수 있는 체제를 마련했다. 이 단체는 조성 초기부터 나무 심기, 생태 환경 조성 등 자원봉사 활동을 통해 공원의 자연적 환경을 가꾸고, 시민들의 의견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의회 언덕에서 바라본 런던의 전경



만약 햄스테드 히스가 개발로 인해 사라졌다면 C.S. 루이스(C. S. Lewis)가 눈 덮인 히스를 거닐다 『나니아 연대기』를 떠올리지도, 요절했던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John Keats)가 나뭇가지 사이로 스러지는 덧없는 삶을 사색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또 브램 스토커(Bram Stoker)의 『드라큘라』에서 흡혈귀가 된 여주인공 루시 웨스테라는 으슥한 히스가 아닌 템스강변 어딘가에서 떠돌았을지도 모른다. 런던 산책의 아이콘인 버지니아 울프 역시 히스의 의회 언덕에서 런던의 풍경을 조망하며 사색하고 문학적 영감을 얻거나 산책에 대한 글을 집필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울프에게 히스의 개방된 공간을 산책하는 활동은 여성의 독립성을 드러내고 문학적 자유를 사유하는 데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또 거대한 몸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빠른 걸음으로 야성적인 히스를 걸으며 친구와 대화하고 연못에서 차가운 물살을 가르면서 뇌신경학 연구와 글쓰기에 대한 통찰을 얻곤 했던 올리버 색스 박사(Oliver Sacks)도 어쩌면 다른 방향으로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서울숲



계절의 여왕인 6월의 밤, 꽃향기 어린 공기를 뚫고 천천히 서울숲을 걷는다. 히스가 그랬듯이 시민들이 지킨 우리의 서울숲도 먼 훗날 누군가의 사색 안에, 글에, 그림에 스며있을 테다.


keyword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