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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호수에서

오스트리아의 잘츠카머굿

by 발걸음

개암

옛날 옛적에 한 나무꾼이 있었다. 산속에서 날이 저물자 그는 어느 빈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 그곳은 도깨비 소굴이었다. 나무꾼은 천장 대들보에 올라가 숨었고 그 아래에서는 도깨비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나무꾼도 너무나 배가 고파서 마침 산에서 주웠던 개암을 하나 꺼내어 조심스레 깨물었다. 그때 “딱” 하고 나는 개암 소리에 도깨비들이 놀라 모두 도망가버렸다. 결국 나무꾼은 도깨비들이 놓고 간 도깨비방망이와 금은보화를 가지고 마을로 돌아와 부자가 되었다.

과거에 개암은 한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열매였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개암을 제사상에 올렸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개암을 세금으로 내기도 했다. 서양에서는 개암을 헤이즐넛이라 부른다.




2023년 8월에 나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Salzburg)에서 출발하여 차로 1시간 반 가량 떨어진 오버트라운(Obertraun)으로 향하는 기차에 탑승해 있었다. 두 치수쯤 작아 보이는 티셔츠 아래로 불룩한 배를 곧잘 드러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서울 거리를 활보하곤 하는 몸집 큰 오스트리아 남자와 결혼해 비엔나에 살던 사촌 동생이 여행지를 추천해 달라는 내 요청에 주저 없이 “오버트라운이야!”라고 대답했고 몇 달 후에 나는 그곳으로 가고 있었다. 기세 등등 한 알프스 산맥 아래 광활한 호수가 기차 창문틀을 액자 삼아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라고 해도 의심 못할 만큼 거대한 호수는 끝이 보이지 않았고 마침내 그것을 통과했다 하면 이내 또 다른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까마득한 고대에 녹아내린 빙하가 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저 산맥만큼 지하세계로 움푹 꺼진 땅구덩이를 시퍼렇고 투명하게 채우는 광경이 그려졌다. 나는 어느새 파주의 자그마한 번화가에 있는 트리플메디컬타워라 불리는 특색 없는 상가 건물에서부터 길 건너편에 납작하게 일렬로 서있는 월드메르디앙 아파트, 그 아래 6단지 아파트와 도서관, 또다시 4층짜리 월드메르디앙 아파트와 그것들을 잇는 도로와 가로수를 하나하나 세심하게 머릿속에 그렸고 곧 그것들은 저 깊고 차가운 물 안으로 서서히 잠기고 있었다. 동네를 다 집어삼킨 후에도 그저 여유로운 호수에 저 왼쪽으로 나지막이 솟은 심학산과 산 입구에 있는 약단지를 손에 든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부처 좌상도, 개발로 납작해진 누런 토지도 서서히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사는 회색 집도 어느 순간 균형을 잃고 기우뚱하더니 결국 호수 깊이 사라졌다. 수면에는 거품이 보글보글 잠시 이는가 싶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잠잠하게 물결치며 반짝였다.



후안 카레노 드 미란다, <카를 2세의 초상>, 비엔나미술사박물관, 1685



고급스러운 빨간색 유니폼을 입은 역무원이 “엔슐디궁(실례합니다)!”이라 말하며 표를 검사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에 호수 깊은 곳에 잠긴 동네를 헤엄쳐 다니는 상상에서 깨어났다. 앞으로 다가오는 역무원의 얼굴이 점차 뚜렷해지자 합스부르크 턱(Habsburg Jaw)이라 불리는 비현실적으로 길고 뾰족한 그의 주걱턱이 눈길을 끌었다. 그가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레 훔쳐보는 동안 동맹을 위해 잦은 근친혼을 한 탓에 합스부르크 왕가 사람들이 주걱턱이라는 얼굴 기형을 겪었다는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주걱턱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필리페 4세(Philip IV, 1605-1665년)와 그의 아들 카를 2세(Charles II, 1661-1700년)이다. 영국 사절이 직접 목격한 기록에 의하면 카를 2세는 음식을 씹지 못하고 통째로 삼킬 정도로 증세가 심각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 왕가에도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루돌프 2세 (Rudolf II, 1552-1612)와 레오폴드 1세 (Leopold I, 1640-1705)가 주걱턱을 물려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사람들은 심각한 주걱턱이었던 레오폴드 1세를 기괴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정작 그는 왕으로서 겸손함의 미덕을 표현하기 위해 초상화가에게 그의 신체적 결점을 오히려 강조해서 그리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왼. 벤야민 폰 블록, <레오폴드 1세 황제>, 비엔나미술사박물관, 1672, 오. 폴 슈트루델, <레오폴드 1세 황제>, 비엔나미술사박물관, 1695



목적지인 오버트라운을 포함해 호수가 즐비한 이곳은 오스트리아 중부의 잘츠카머굿(Salzkammergut)이라는 지역에 속한다. ‘황실 소금 관리국의 영지’라는 독특한 의미를 지닌 잘츠카머굿은 약 70개가 넘는 아름다운 호수와 깎아지르듯 우뚝 솟은 산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름에서 이곳이 과거 합스부르크 왕가가 소금 채굴권을 관리하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던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소금은 당시 '하얀 황금'이라 불릴 만큼 귀한 자원이었다. 따라서 그것을 담는 소금 그릇 역시도 소금만큼 중요하게 여겨졌는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 중에서 예술적인 기교와 상징성으로 최고봉이라 평가받는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의 <황금 소금통>이 바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방대한 수집품을 전시하는 비엔나미술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벤베누토 첼리니, <소금그릇>, 비엔나미술사박물관, 1543




8월에 수도인 비엔나는 녹아내릴듯한 이례적인 폭염으로 맥을 못 추고 있었지만 오버트라운은 기껏해야 낮 최고 기온이 20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수시로 추척추적 내리는 비 때문에 날은 더 으스스했다. 어느 날 가벼운 보슬비를 맞으며 할슈타트호수(Halldtatt)를 따라 이어진 길을 산책하다가 한 중년의 여자가 나무에서 이름 모를 열매를 채취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엔슐디궁, 바스 이스트 다스?"라고 내가 다가가 묻자 여자는 화려한 손짓과 함께 "%&#$%&#%*&!" 라며 중부 유럽 어딘가의 언어로 추측되는 말로 마치 내가 잘 알아들을 것이라 확신하듯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러다 곧 내가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봉투를 활짝 열어 안에 있는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생전 처음 보는, 도토리보다 조금 크고 동그란 열매가 봉지 가득 들어있었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데다 연두색 꽃받침 위에 동그랗게 맺힌 열매를 봐도 식별이 불가능했기에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구글 렌즈로 검색해 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헤이즐넛이었다.




한여름의 헤이즐넛


우리말로 개암이라고 하는 열매. 어렸을 적 전래 동화에서 나무꾼이 이 사이에 넣고 물어서 ‘딱’ 하고 깨지는 소리로 도깨비들을 놀라게 해 달아나게 만들었던, 나무꾼을 하루아침에 부자로 만들어주었던 열매, 언젠가 노릇노릇하게 구워 파이 크러스트 안에 평평하게 담은 다음 그 위에 녹은 초콜릿을 부어 180도의 오븐에서 30분 구웠던, 이 고소하고 영양가 많은 열매는 산책로 한쪽으로 가로수처럼 줄지어 자라는 나무에 알알이 맺혀 있었다. 열매를 따서 호주머니를 가득 채울 무렵에는 보슬비가 그쳤고 구름을 뚫고 나뭇잎 사이로 해가 반짝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에서 막 딴 개암을 어금니 사이에 물고 껍질을 깨어 맛보려고 하니 여자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열매는 입 안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에 금이 간 건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로 껍질은 단단했다. 잔뜩 찌푸린 내 얼굴을 보고 여자는 주먹을 쥔 손을 위에서 아래로 빠르게 내려치는 동작으로 망치로 열매를 후려 치면 껍질이 깨진다고 알려주었다. 환한 웃음을 짓는 여자의 얼굴은 부드러운 햇살 아래 반짝였다. 따스한 공기가 자연을 감싸고 모든 만물이 기지개를 켤 채비를 하는 동안 내 마음도 알지 못하는 기대로 들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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