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센트럴파크
나는 한때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 1998-2004)’에 푹 빠져 있었다. 그 드라마에서 네 명의 화려한 여자 주인공이 누비는 뉴욕은 각양각색의 얼굴로 내 마음을 사로잡는 또 한 명의 스타 배우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매력적인 공간은 센트럴파크였다. 경쟁하듯 수직으로 올라가는 도시의 위계를 무색하게 만드는, 수평으로 펼쳐지는 광활한 그 장소는 자신만의 개성으로 이야기의 맛을 더했다.
특히 시즌 3의 마지막 회, 센트럴파크의 로엡 보트하우스(Loeb Boathouse)에서 있었던 캐리와 미스터 빅의 재회는 극적이기 그지없었다. 잔잔한 호수 앞에 서서 곧 고개를 뒤로 돌린 미스터 빅은, 분홍빛 드레스를 팔랑거리며 특유의 걸음걸이로 그를 향해 다가오는 캐리와 시선이 마주친다. 캐리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멈춰 서고, 순간 키스를 하기 위해 미스터 빅이 몸을 돌리자 이에 놀란 캐리는 중심을 잃고 미스터 빅과 뒤엉킨 채로 호수에 빠져버린다. 두 사람이 물속에서 허우적대며 폭소를 터트리는 순간은 '뉴욕'의 단단한 위선의 껍질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늘 완벽한 패션으로 연약한 내면을 방어하던 캐리가 문자 그대로 자연에 '풍덩' 빠져 무방비의 상태가 되는 그 장면은, 물속에서 엉킨 두 사람의 몸처럼 그들의 감정도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며 문득, 센트럴파크의 역사에 대해 궁금해졌다. 햄스테드 히스와 서울숲이 개발의 무자비한 폭격 속에 영광스레 생존한 도심 속의 녹지라면, 뉴욕의 상징인 센트럴파크는 과연 어떻게 탄생했을까? 그리고 연인들은 언제부터 이 공원에서 사랑을 속삭였을까?
확언하건대, 1858년 이전에 뉴욕에서는 캐리와 미스터 빅이나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When Harry met Sally, 1989)’의 풋풋한 주인공들처럼 보통의 연인들이 공원에서 사랑을 탐색하는 일은 없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당시 미국에는 아직 공원이라 불리는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녹지는 개인 소유의 정원으로 상류층의 전유물이었고 대중에게 개방된 공간은 별로 없었다. 대신 도시에 사는 미국인들은 마차를 타고 시 외곽에 조성된 공동묘지에 소풍을 가곤 했다. 공동묘지에서 여가를 즐기고 심지어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청혼했다. 그곳은 아름다운 조각상과 인간이 가꾼 자연이 조화를 이룬 특별한 공공장소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뉴욕은 점점 더 과밀해졌고, 도시의 삶은 더욱 끔찍해져 갔다. 거리에는 매연과 소음이 가득했고, 노동자들은 비위생적이고 좁은 주거 공간에서 답답한 일상을 견뎌야 했다. 이때 프레드릭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 1822-1903)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점점 거대해지고 혼잡해지는 뉴욕을 보며 "지금 이곳에 공원을 만들지 않는다면 100년 후에는 이만한 크기의 정신병원이 필요할 것"이라고 외쳤다. 그는 자연 속에서의 휴식은 도시민들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지키는 필수 요소라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공원이 단순한 녹지를 넘어 민주적인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의 노력 끝에 센트럴파크가 조성되었고, 비로소 뉴욕의 시민들은 빽빽한 건물 숲이 아닌, 푸른 녹음 아래에서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모든 대도시 공원의 모범으로 꼽히는 센트럴파크는 맨해튼 전체 면적의 25%를 차지한다. 햄스테드 히스보다 축구 경기장 30개 정도만큼이나 더 크다니 대단한 규모인 것만은 분명하다. 식재된 나무만 해도 170여 종으로 18,000여 그루에 이른다. 팬데믹 때 갈 곳 없던 도시민들이 그나마 숨통을 틔울 수 있었던 장소가 바로 공원이었다. 만약 뉴욕에 센트럴파크가 없었다면 옴스테드의 암울한 예견처럼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으로 알약을 삼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오늘날 전 세계의 대도시들도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더 어두운 표정으로 말이다.
그런데 공원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당시 옴스테드는 어떻게 이와 같은 거대 공원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을까? 그건 뜻밖의 순간에 싹텄다. 1850년에 그는 영국의 풍광을 도보로 감상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리버풀에 들렀을 때 우연히 알게 된 현지 제빵사가 '버컨헤드 공원(Birkenhead Park)'이라는 곳에는 꼭 들러야 한다고 집요하게 추천한다. 별 기대 없이 공원에 발을 디딘 옴스테드는 예상과는 반대로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 순간은 옴스테드의 인생에서 변곡점이 된다.
1847년에 개장한 버컨헤드 공원은 단순한 녹지가 아니었다. 그곳은 공공 자금으로 조성된 세계 최초의 공원으로 누구에게나 무료로 열려 있었다. 조경은 세심하게 다듬어져 있었지만 인공적이지 않았고, 산책로와 연못, 언덕이 어우러진 풍경은 자연 그대로인 듯 조화로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상류층 귀부인들과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함께 공원을 즐기는 광경을 봤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공원은 상류층의 개인 정원과는 반대로 모든 시민을 위한 공간이었다.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공원을 이용하는 일이 왜 충격적인 일인지 물론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당시 사회는 계급에 따라 분리되어 있었고 신분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함께 즐긴다는 것은 상상조차 불가능했다(버컨헤드 공원 설립보다 60년 지난 사건이긴 하나 영화 타이태닉을 떠올려보면 신분의 장벽과 분리에 대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바깥세상에서야 어떻든 공원 내에서 만큼은 장벽이 무너져 있었다. 이렇듯 버컨헤드 공원에서 얻은 깨달음은 신분과 빈부 격차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신이 사는 곳에서 쉽게 녹지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도시 설계 철학의 근간이 되었고 이후 그의 철학은 곧 미국 전역의 도시 환경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햄스테드 히스가 있는 동네에 사는 걸 큰 축복으로 여기는 미셸은 흥분조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종종 리버풀이라 대답하지만 실은 그 옆 마을에서 왔어. 내 고향을 말하면 사람들이 못 알아듣고 되묻기 때문이야. 그런데 언젠가 엄마한테 우리 동네 공원이 바로 옴스테드가 설계한 센트럴파크의 모델이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나중에 얼마나 놀랐다고!” 내가 이미 버컨헤드 공원을 알고 있다고 얘기하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렸을 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지!”라고 말을 이었다.
영국 지도에서 허리쯤에 위치한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에서 가족과 함께 머문 후 웨일스에 있는 카렉 케넨 성(Castell Carreg Cennen) 주변에서 며칠을 보내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가던 차, 지도를 보니 리버풀을 통과해 간다 해도 1시간 넘게 지체될 것 같지는 않았기에 경로를 살짝 수정해 버컨헤드 공원으로 향하게 되었다. 나중에 일부러 미셸의 이름 없는 고향에 갈 기회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5km를 남긴 근방까지 다다르고 바닷속을 통과하는 짧은 터널 입구의 톨게이트에 접근하자 영화에서만 듣던 강한 리버풀 억양으로 말하는 계산원을 만날 수 있었다.
마침 내가 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방학을 맞아 가족 단위의 산책객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탁 트인 공원의 풀밭에서는 특별한 행사를 치르는 중인지 광대 하나가 어린이들 앞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었는데 그 위로 화려한 모자를 쓰고 긴 치맛자락을 늘어트리며 우아하게 걷는 빅토리아 시대 여자들과 거대한 크기의 바위 더미를 기어오르며 노는 올리버 트위스트를 닮은 꾀죄죄한 아이들의 흑백 이미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풀밭 건너편에는 방문 센터가 위치했다. 그곳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이끄는 여러 교육 활동을 소개하고 있었는데 공원이지만 미술관이나 박물관처럼 모든 연령대의 방문객들이 관심 분야에 따라 선택할 만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프로그램 소개 전단지가 놓인 테이블 위에 메리라는 이름의 나이 든 여자의 사진이 한 장 놓여 있어 시선을 끌었다. 사진 아래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공원을 가꾸던 어여쁜 손길, 햇살과 바람 영원히 누리소서."
옴스테드는 버컨헤드 공원이 시민들에게 주는 이점을 직접 경험하고 미국에 돌아온 후 책과 기고문을 통해 공원의 필요성을 알리는 활동에 열정을 쏟았다. 마침 뉴욕도 이민자의 대거 유입으로 인구가 폭증하여 다른 대도시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에 그는 공원을 건설하는 일이 도시화가 일으키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더욱 강하게 믿었다. 노력 끝에 뉴욕시는 공공 공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대규모의 공원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고 옴스테드는 1857년 열린 센트럴 파크 설계 공모전에 영국 출신의 건축가인 캘버트 복스(Calvert Vaux)와 함께 디자인 안을 출품해 당선되었다.
그들의 디자인은 영국식 정원의 양식에 따라 자연스러운 자연경관을 연상시키는 광활한 녹지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디자인에서 주목할 만한 혁신은 보행로와 차로 등의 동선을 입체적으로 분리하여 보행자나 자전거 타는 사람, 마차를 타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서로 방해받지 않고 각각의 길을 이용해 진입할 수 있도록 한 부분이다. 또 다양한 풍경과 활동 공간을 만들어서 누구나 취향에 맞는 공간을 즐기고 또 원하는 활동을 즐길 수 있도록 한 점도 특징이다. 이처럼 이용객들의 다양성을 포용한 민주적인 디자인은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도시공원의 모범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빛나는 것들도 언젠가는 그 광채를 잃기 마련이듯 센트럴파크도 개장 초창기에는 옴스테드와 복스의 이상과는 달리 화려한 마차를 뽐내는 부자들에게 점령당했고, 보행자들(마차가 없는)이 부자들의 마차에 치이는 사고도 빈번하게 일어나 대중의 경악을 샀다. 이후 점차 쇄락을 겪다가 1960-70년대에는 뉴욕의 재정상태가 불안정해지고 범죄율이 최고치를 찍으며 ‘밤에 절대로 혼자 돌아다니면 안 되는 위험한 장소’로 버려지다시피 되었다. 극영화이기는 하나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의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 1976)에서 70년대 뉴욕시가 직면했던 쇠락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네온사인 불빛이 반짝이는 혼탁한 밤의 도시를 택시를 운전하며 방황하는 주인공 트레비스의 시선을 통해 불안으로 점철된 과거의 뉴욕으로 들어가면, 햇살 가득한 공원에서의 데이트 같은 평범한 일상은 환상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센트럴파크의 미래까지도 완전히 방치된 것은 아니었다. 뉴욕 시민들은 나라의 보물이 국보급 불명예로 전락하는 상황을 뒤집고자 발 벗고 나섰고 1980년에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센트럴파크 보존회(Central Park Conservancy)’는 현재까지도 공원 전체를 관리하는 기관으로 남아 있다. 보존회는 다음과 같은 목표를 위해 실천한다.
우리의 사명은 센트럴파크를 도시 생활의 빠른 속도와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안식처로 보존하고 기념하며, 모두가 공원을 더욱 즐기고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
한국에서 설립된 최초의 공공 공원은 어디일까? 바로 조선이 대한 제국으로 전환된 1897년 서울 종로에 세워진 파고다공원이다. 조선 불교문화를 엿보게 하는 유물인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터에 남아 있어서 파고다공원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근대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여러 방면에서 개혁 정책을 추진하던 고종이 당시 제정 고문으로 일하던 영국인 존 맥리비 브라운(John McLeavy Brown)의 제안으로 폐허가 된 원각사 터를 서양식 공원으로 조성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종로 지역은 예로부터 교통 요지로 상점과 노점이 밀집한 경제 중심지였기에 늘 시민들이 북적였다는 점이 공원 설립에 적절했다.
20세기 초와 일제 강점기에는 파고다공원에서 지식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토론하고, 집회를 열거나 즐겨 교류했다. 특히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 대표 33인이 이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계획이었으나 일제의 감시로 인해 다른 장소로 급히 이동하자 마침 공원에 홀로 도착한 독립운동가 정재용 선생(당시에는 학생 신분이었음)이 주머니에서 독립선언서를 꺼내 들고 팔각정 단 위에 올라가 “우리는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라고 외치며 낭독하였고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문으로 걸어갔다고 한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 형을 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게 되었지만, 3.1 운동의 불꽃은 이렇게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되었다.
1992년에는 탑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탑골공원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센트럴파크도 한때 버려지다시피 되었듯이 90년대부터 종로 일대도 쇠락의 조짐을 보였고 공원 역시도 그러하였다. 언젠가부터 공원은 옛 풍경을 그나마 기억하는 남성 노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그들이 여전히 그곳으로 향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무료 급식소에서 제공하는 한 끼 식사와 장기나 바둑을 함게 둘 동년배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앞으로 그들이 더 이상 방문하지 못하는 형편이 된다면 이 공간은 어떻게 될까? 탑골 공원의 푸른 미래를 상상해보려 하지만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