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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나무 잎을 따다

by 발걸음

요즘도 2층 거실 창 밖을 내다보면 봄에 모자와 팔 토시와 장갑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비닐봉지와 칼을 들고 나물 채집을 나서는 자그마한 아줌마와 할머니들이 간혹 보인다. 오랫동안 나는 그런 풍경을 타인의 취미, 한물 간 과거의 유산, 나와는 무관한 풍경쯤으로 여겼다. 그런데 그런 엄마를 곁에서 보고 자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이가 들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채집에 끌리게 되는 걸까? 언제부턴가 나도 봄을 기다린다. 봄은 무엇보다도 지천에 널린 쑥의 계절이다. 끈덕지게 보도블록 사이를 뚫고 올라오는, 들판을 덮은, 바닷가에서 해풍을 맞고 번성하는 쑥을 보면 이제 나도 엄마처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걸 보면 봄철 별미인 쑥 된장국을 만들어 먹을 생각에 설렌다. 새순을 뜯어 깨끗이 씻고 육수에 된장을 풀어 국을 끓인다. 요즘은 한살림에도 쑥이 나오지만 어쩌다가 비닐 포장지에 담긴 쑥을 장바구니에 넣을 일이 생길 때마다 영 마땅치 않은 마음을 억눌러야 한다. 대문만 열면 흐드러지게 있는 쑥을 굳이 차를 끌고 가게에 가서 사고 있는 나의 게으름에 먼저 불편해진다. 또 하늘과 땅의 도움으로 자연스레 자라는 것을 취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볼모로서 굳이 에너지를 들여 생산하고 운반하고 거기에 수반되는 에너지의 낭비에 동참한다는 생각에 그렇다. 물론 이 세상엔 깊이 알면 불편한 것이 많다.


운 좋게도 채집 활동이 선사하는 기쁨과 설렘을 가슴 깊이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영순 언니네 정원에서 무참히 난사당한 뽕나무 잔해 덕분이었다. 당시 언니네 집에 도착했을 때 인부 몇 명이 정원에서 전기톱을 들고 한창 작업 중이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너무 웃자란 탓에 작은 정원에 온통 그림자를 드리워 다른 식물이 좀처럼 활개를 펴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뽕나무를 밑둥까지 잘라낼 참이었다. 잠시 후 전기톱이 굉음을 울리며 나무의 근육 깊숙이 파고들고, 곧 톱이 떨리는가 싶더니 마지막 힘줄과 혈관이 끊어지자 언니의 비명 소리와 동시에 뽕나무는 오래도록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듯 '쿵' 하고 쓰러졌다. 최근까지는 애꿎기만 한 그늘이었던 나무는 그동안 숨겨왔던 존재의 무게를 최후의 몸부림으로 또렷하게 드러냈다.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대장처럼 보이는 아저씨는 정원을 살리려면 뽕나무를 제거하는 게 최선이라며 재차 강조했다. 그리고 지금 막 생각났다는 듯 급히 덧붙였다. “참, 내가 나무 실어가 버리기 전에 어서 잎이나 뜯어요. 마침 지금이 잎 채취하기에 제일 좋을 때여. 그걸로 나물 해 먹으면 최고라고!” 나는 그것을 곧장 쓰레기장으로 보내지 않고 뽕나무의 장엄한 최후에 걸맞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여 다행이다 싶었다. 게다가 뽕잎을 말려 가루로 만든 건 맛본 적 있었지만 나물은 들어본 적도 없었던 터라 그 맛이 궁금했다. 우리는 주저할 필요도 없이 곧장 이 보물이 사라지기 전에 양껏 채취하려고 쓰러진 나무에 달려들었다. 나무 한 그루에서 나온 잎을 다 따기에 부족한 시간이 원망스러울 정도였지만 큰 바구니는 금세 윤기 흐르는 여린 잎으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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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춘천의 차디찬 수돗물(상수도원이라 춘천 물은 무더위에도 낮은 기온을 유지한다.)에 잎을 담가 정성스레 헹구어 건져냈다. 그런 후 나물 무치는 임무를 나에게 맡겼다. 나는 끓는 물에 소금을 살짝 넣어 데친 후 예쁜 초록색이 유지되도록 다시 찬물에 헹궜다. 나물 무치는 건 기억 속의 엄마 방식을 따라 한 것인데 마침 언니네 집에는 정말로 중요한 재료인 방앗간에서 갓 짠 진짜 들기름이 있었다. 물기를 꼭 짜낸 나물에 으깬 마늘을 약간 넣고 간장으로 간을 한 다음 마지막으로 들기름을 듬뿍 뿌려 조물조물 무친 후 커다란 접시에 담았다. 언니는 오랜만의 우리 가족의 방문을 위해 특별 요리를 준비했지만 그날 식탁에서 주인공이 된 건 뽕나물 무침이었다. 싱그러운 나뭇잎의 향, 쫄깃쫄깃한 식감. 그날 이후로 나는 동네 산책길 몇 곳에서 자라는 뽕나무 위치를 확인해 두었고 해마다 겨울이 물러가면 여린 잎이 솟아나기를 학수고대했다.


국토 개발이 본격적으로 가속화되기 전까지는 한국 전역에 뽕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양잠은 1950, 60년대만 해도 흔한 부업이었기에 누에의 먹이가 되는 뽕나무는 전국 곡곡에 흔하게 식재되어 있었다. 엄마 어렸을 적 외할머니 또한 부업으로 누에를 쳤다고 한다. 엄마는 뽕나무 잎을 따서 애벌레를 먹이고, 누에가 뽀얀 고치를 만들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언젠가 창덕궁의 궁궐 정원인 후원을 관람한 적이 있었다. 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삼국시대부터 누에를 길러 비단으로 된 옷감을 짜는 ‘잠업’은 농업과 함께 중요한 일 중 하나였고 이 전통은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졌다고 한다. 궁궐에서도 ‘잠업’을 중요하게 여겨 직접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려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사실을 보여주는 행사로 해마다 창덕궁 후원에서는 열렸던 ‘친잠례(親蠶禮)’를 들 수 있다. ‘친잠례’는 왕비가 손수 누에 치기의 모범을 보여 양잠을 장려하기 위한 의식을 말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창덕궁 후원에서 왕비가 왕세자빈을 비롯한 수행 여성들을 거느리고 뽕나무에서 잎을 따서 누에에게 먹이는 순서로 의례는 개시되었다. 1767년(영조 43) 3월에 작성된 『친잠의궤(親蠶儀軌)』에 의하면 왕비가 먼저 뽕잎 다섯 장을 따서 누에에게 먹였다.


잎을 먹일 누에는 없지만 대신 나의 혀는 뽕잎을 달라고 아우성친다. 봄이 오기를, 새순이 나기를 기다린다. 논길 산책로에서 자라던 그 많던 뽕나무들, 나에게 아낌없이 내주었던 그 나무들은 이제 토지 개발로 다 사라졌지만 다행히 여전히 놀이터 입구에 커다란 것 한 그루, 집 바로 옆 공터 뒤쪽에 또 한 그루가 있다. 이 두 그루의 뽕나무를 살피며 새순이 나길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보인다. 아마도 과거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걸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나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신도시 주택가에는 별로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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