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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를 피해 햄스테드 히스로

by 발걸음 Mar 07. 2025

햄스테드 히스(Hampstead Heath)라는 이름의 공원을 어디서 접했을까 기억을 더듬는다. 2023년 7월 11일 오후 5시, 나는 근 11년 만에 런던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앉아 창밖으로 흐린 하늘 아래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는 히드로 공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고작 1년 만인 2024년 8월 1일 오후 5시 파리 생라자르 역을 출발해 해저 터널을 통과한 후 런던 세인트판크레스 역으로 향하는 유로스타의 소박한 좌석에 앉아 몽상에 잠겨 있었다. 파리에서 런던까지 고작 두 시간 만에 도착한다는 사실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실은 순식간인 운행 시간이 놀랍다기보다는 성급한 것 같았다. 평생의 기다림 같았던 1년 만의 방문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초고속 열차에 대한 이러한 느낌은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실은 여름 이후로 앓았던 ‘런던 열병’을 도착하기 전에 조금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햄스테드 히스라 하는 야생 들판 같은 공원에 있다는 근사한 여자 전용 못에 어서 몸을 던지고 싶어서 온몸이 근질거릴 지경이었기에 흥분을 누그러트려야만 했다.


 나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행운의 기회를 온전히 소유하고 싶은 욕심에 런던과 영국과 관련된 책이라면 읽고 또 읽었다. 그중에는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가 쓴 영국 역사서에부터 팬데믹 때 사임한 전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이 기자 시절 출판한 『런던 위인전』, 장장 7년 동안 홀로 영어 사전을 집필한 불굴의 사나이인 사뮤엘 존슨(Samuel Johnson)과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제임스 보즈웰(James Boswell)과 그들의 친교 그룹에 대해 풀어나간 레오 담로슈(Leo Damrosch)의 『더 클럽』 등과 같은 인물 중심의 역사서에서부터,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런던 산책 에세이, 런던의 채링크로스로드에 있는 한 중고서점 직원들과 20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전후의 물자 부족에도 불구하고 따뜻함 넘치는 삶을 엿보게 하는 헬레인 한프(Helene Hanff)의 책 등이 있었다. 더 이상 책만 주야장천 읽고 있기에는 임박해 오는 여행이 얄밉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그 독서 중,  2023년 10월에서 이듬해 6월 그 사이 어디에선가 햄스테드 히스라는 이름을 접했을 텐데 대체 어느 책에 쓰여있었던 걸까? 혹시 책이 아니라면 누구한테라도 들었던 걸까?


 런던에 발을 내디뎠지만 한여름이라 하더라도 일반적인 한국 기준으로는 서늘하고 춥기까지 한 8월의 날씨에 홀딱 젖은 채 오들오들 떨며 고생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일정을 강행하다가는 동행하는 가족의 원망을 혼자 감당해야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진난만하게 반가워할 수만은 없는 기상 이변의 징후, 34도의 이례적인 폭염이 찾아왔을 때 드디어 남편과 아이, 엄마를 포함한 우리 넷은 햄스테드 히스로 향했다. 뉴크로스 역 튜브 개찰구에 있던 역무원이 우리를 향해 이런 날씨에 어딜 가느냐고 물었다 (런던 출신이 아닌 영국인들이 느끼기에 런던 사람들은 불친절하지만 내 시선에서는 런던 사람들은 무척 친절하다. 그들은 낯선 사람과도 말을 쉽게 틀뿐만 아니라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언제 끝이 날지 알 수 없기도 하다). 나는 검은 얼굴에 희끗희끗한 수염을 기른 낯선 이의 관심에 반가웠지만 뭣 때문인지 입 밖으로 튀어나온 대답은 속마음과는 정반대로 미적지근했다. 햄스테드 히스에 수영하러 간다! 며 노래를 하고 춤을 춰도 부족한 터에 마치 별일 아닌 듯이 말했으니 말이다. 마치 “그냥 햄스테드 히스에 가요”, “나한테는 특별한 일은 아니에요.”, “나는 밥 먹듯이 거기 가서 수영하는 그런 사람이에요.”라고 은연중에 과시하듯 말이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어쩐지 관광객 티를 내는 게 촌스럽기도 하고 민망해서 그랬던 것 같다. 명성 있는 곳마다 당장이라도 짐을 다시 싸서 도망가고 싶게 만드는 8월의 관광객 인파에 나마저도 런던 시민들의 고충에 깊이 공감하며 괴로움을 호소할 정도였으니까.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마음의 발걸음』에서 “관광객이 찾아다니는 것은 진정성과 이질성이지만, 관광객의 손이 닿은 것은 진정성을 잃고 동질화된다……관광지가 된 곳에서는…… 관광객 문화라는 림보가 만들어진다. 관광객이 보러 오는 곳이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곳이 된다”라고 꼬집은 바 있듯 나를 그런 관광객의 동류 정도로 만들고 싶지는 않으니까. 역무원은 내 말투를 다행히 눈치채지 못하고 장난기 가득한 눈알을 굴리며 “아하, 히스, 제대로구먼. 이 사람 놀 줄 아네. 오늘 같은 날 히스가 최고지. 나 대신 즐거운 시간 보내다 오슈. 부럽수다!” 라고 쾌활하게 응수했다.


 튜브에서 내려 버스 2층의 맨 앞 좌석에 자리 잡자 버스는 느릿느릿 흔들흔들 언덕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달렸다. 아니, 기어갔다. 런던의 버스는 더운 날에는 숨을 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푹푹 찐다. 에어컨이 없다고? 대체로 그렇다. 최근 기후 변화로 인해 런던의 여름에도 무더위가 덤비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더위보다는 찬 기운이 힘이 세기에 그렇다. 앞에서 언덕을 힘겹게 올라가는 자전거 때문에, 또 교통 신호를 아랑곳하지 않는 행인들 때문에 찜통 버스가 더욱 맥을 못 추고 꾸물거렸다. 늘 그렇듯이 활짝 열 만한 창문도 하나 제대로 없는 버스 안 승객들 중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우리밖에 없어 보였다. 이곳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에 대해선 격분하며 거리로 나서지만, 버스가 더운 것이나 출근길에 갑자기 운행이 멈추고 다음 기사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는 좀체 불평하지 않는다. 막 열두 살이 된 내 아이가 이내 온몸이 땀범벅이 되어 앞으로 픽 쓰러지는 와중에 나와 엄마는 발끝에서 피식피식 새어나가는 마지막 남은 생기를 최대한 위로 쥐어 짜올려 런던 출신처럼 인상을 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더위를 불평하기에는 솔직히 너무 지쳤다고 하는 편이 맞았을 것이다. 길 양 가로 병풍처럼 펼쳐진 타운하우스 행렬을 지나니 밖에 테이블을 내놓은 ‘웨일즈의 공주’, ‘프리메이슨의 무기’, ‘스페인 사람들의 여관’ 따위의 간판이 달린 펍에는 대낮부터 간만의 무더위를 즐기며 맥주를 마시는 손님들이 보였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차갑고 까슬까슬한 맥주 한 잔을 더 이상 참지 못할 무렵 버스가 언덕 위로 올라가자 인상적인 부잣집들이 창밖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그쯤에서 마침내 우린 버스에서 탈출했다. 


 켄우드 하우스라는 이름의 대저택에서 시작하는 햄스테드 히스의 북쪽 게이트로 들어서자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거대한 녹지와 어림잡아도 수백 살은 되었을 커다란 나무들이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곧장 내달려가 나무 그늘 밑에 다리를 뻗고 눕는 기분,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한 시간 동안이나 묵은 땀을 몽땅 날려 보내는 그 느낌이란! 그건 마치 사지를 베베 뒤틀면서 미세한 근육을 모조리 안으로 팽팽하게 조여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드디어, 드디어! 깨끗한 화장실이나 인적이 없는 덤불을 발견한 희열과 비슷한 정도라고 할 것이다. 그건 고문에 가까운 무더위를 감내하고 우리 앞에 차려진 최고의 잔치였다. 게다가 잠시 후 나는 곧 차디찬 연못에 온몸을 내던질 것이었으니 부러울 게 없었다.


 구불구불한 긴 몸으로 기어가는 뱀처럼 런던 가운데를 굽이쳐 흐르는 템스강을 중심으로 한참 북쪽에 위치한 이 공원은 야생의 분위기가 물씬 살아있는 초대형의 녹지(진짜 야생은 아니지만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공원과는 다르다. 그래서 이름도 들판이라는 뜻의 히스이다)로 크기는 약 3.2 제곱 킬로미터에 달한다. 이 숫자가 의미하는 규모를 머릿속으로 가늠하려면 약 2.9 제곱 킬로미터인 여의도 안에 얼마나 많은 아파트와 빌딩과 교회와 도로와 있는지 상상해 보면 된다. 또 다른 흔한 계산법을 적용하면 이곳에 축구장이 무려 448개나 쏙 들어간다는 말씀이다(뉴스에서는 왜 항상 여의도를 기준으로 땅의 크기를 설명하나 했더니 역시 그게 가장 이해하기 쉬운 방법 것 같다. 축구장을 기준으로 크기를 비교하는 관행도 직접 해보니 납득이 간다).


 켄우드 하우스의 매끈한 정원을 지나 고목이 우거진 숲길을 통과해 남쪽으로 향하자 아담과 이브가 철없을 시절 뛰놀았을 듯한 야성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인 들판이 나타났다. 들판 위에 구름 그림자가 군데군데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런 광경은 언덕과 산으로 시야가 막히는 한국에서는 좀체 보기 어려운, 광활한 평지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누렇게 익은 잡초 사이에 솟아있는 덤불에서는 젊은 여자 하나가 뭔가를 채집하고 있는 듯했다. 덤불을 지나자 들판의 왼편에서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소리는 주변을 모든 감각 기관을 자석처럼 끌어당길 만큼 즐거움, 신선한 즐거움을 가득 안고 있었다. 웃음소리의 진원지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가장자리를 둘러싼 촘촘한 덤불과 나무 때문에 비밀스러운 요새나 다름없었기에 외부에서 안을 엿보는 건 불가능했다. 구글 지도를 확인하니 놀랍게도 우리가 있는 위치를 알리는 푸른 점이 여자 전용 못 경계의 왼쪽에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내 마음은 이미 시원한 물에 첨벙 뛰어들고 부푼 기대는 풍선처럼 저 멀리 하늘 위로 날아가고 있었다. 열흘 후 집으로 돌아가는 남편과 바통 터치를 하고 동생이 우리의 여정에 합류하면 그때 같이 오리라 다짐하고 나는 다시 남녀 공용 못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구글 지도를 따라 숲에 난 오솔길을 걸어 남쪽을 향해 내려갔다. 공원이 얼마나 거대한지 가도 가도 사방팔방 끝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늘에는 초록색 깃털을 한 새들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무리 지어 날아다니다 나무에 앉아 휴식을 취하곤 했는데, 이처럼 위도가 높은 영국에 앵무새 종류로 보이는 새가 서식한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데보라 리비(Deborah Levy)가『살림 비용』에서 작가 자신이 이혼 후 이사 들어간 아파트에 친구가 방문했던 날 자정 무렵, 발코니에 있는 그들을 향해 날아오던 초록색 새에 대해 서술했던 게 기억났다. 누구의 무엇이 아닌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고 ‘한 번도 그려지지 않은 새로운 여주인공’의 삶을 창조하려 버둥거렸던 리비가 보았던 앵무새. 어쩌면 그것의 후손이거나 친척일지도 모를 새를 역시 리비가 살았던 런던 북부에서 나도 보고 있다는 생각. 평행선을 그리던 우리의 삶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것 같은 묘한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드디어 흙길로 들어섰고 조용하고 한가하던 공원에 점차 커지는 음악과 인파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우리를 맞이했다. 남녀 공용 못이었다.


 나는 곧바로 개표소로 달려갔다. 하지만 개표소 앞에는 방문객들이 헛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직원 말로는 여름에는 매주 월요일마다 인터넷으로 시간제 예약을 받는데 이미 그 주치 예약은 안타깝게도 당일에 매진되었다는 것이다. 대안이 없지는 않았다. 오전 11시 전 혹은 오후 6시 이후에 선착순 입장을 하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오후 4시를 향해가는 그 시간에도 벌써 6시 선착순 입장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추세였기에 단념하는 편이 현명했다. 나는 김 빠진 타이어 같은 모양새로 물에 발도 한번 담가보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우린 대신 남녀 공용 못과 반대편에 있는 녹조가 가득 낀 못 사이의 자그마한 풀밭에서 물을 바라보며 소풍을 즐기기로 했다. 여성 전용 못이 베일에 싸인 것과는 달리 남녀 공용 못은 외부에서도 보이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규모는 적당히 크기도 했고, 작다고 할 수도 있는 정도였다. 전체 못의 일부만, 대략 1/3 정도만 사용하도록 되어있었는데 수영 가능한 부분의 규모는 어림짐작으로 50m 레인이 예닐곱 개 있는 실내 수영장보다는 더 커 보였다. 저 멀리 머리만 물 위에 내놓고 유유히 헤엄치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가 앉은 풀밭은 인파로 붐비는 반면 못 안은 꽤 한적 해 보였다. 아마도 시간제 예약으로 인원을 소수로 유지하는 듯했다. 


 남녀 공용 못을 등 뒤로하고 반대편 못을 향해 앉아서 오리 몇 마리가 유유히 헤엄쳐 지나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녹조가 가득 끼인 이 못은 예전에는 모형 보트 애호가들이 보트를 띄우며 노는 장소였지만 그런 놀이가 지난 유행이 된 오늘날은 오리와 백조와 해오라기들의 서식지로, 간혹 산책에 지친 개들이 잠시 물놀이를 하다 가는 수영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못의 오른쪽에서 누군가 나무 막대기를 던지자 애타는 눈을 반짝이는 개 한 마리가 물로 돌진해 첨벙 뛰어들었다. 이후로도 작은 개, 큰 개, 점박이 개, 털북숭이 개, 겁이 많은 개, 늙은 개 등 온갖 종류가 못에서 노는 모습에 구경꾼인 나도 갈증이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이윽고 못의 건너편 가장자리에서 놀던 한 남자가 못으로 뛰어 들어갔다. 남자는 둥둥 떠있는 깃털 사이를 가로질러, 조류를 헤치며 오리가 앉아있는 부표까지 헤엄쳐 갔다. 부표 위에 앉은 오리가 꿈적도 않고 태연하게 남자를 바라보는 동안 남자는 친구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가 불러일으킨 충동 때문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왼쪽 덤불에서도 속옷만 걸친 여자 몇 명이 출현해 조심스레 물에 들어갔다. 곧 터지는 웃음과 고함소리. 어깨를 웅크리는 모양새로 보아 이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물은 어지간히 차가운 모양이었다. 내 아이도 결국 참지 못하고 규정을 어기는 무리에 합류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한 남자가 나타났다. “혹시 모를까 봐 그러는데 여긴 녹조 때문에 위험하다오. 딸아이가 나오면 꼭 씻으라 해요. 특히 얼굴. 어른들은 몰라도 아이들은 재수 없으면 큰일 날 수도 있으니까.” 나는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실은 딸이 아니라 남자아이라고 귀띔 했다. 그랬더니 남자는 “써니(아들아), 머리는 물에 담그지 말고 놀아라. 재밌게 놀아!” 하고 외치며 떠났다. 더위를 식히며 앉아있으려니 귓가에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아랍어, 그 외 내가 모르는 언어가 끝도 없이 음악처럼 스쳤다. 런던에서 영어는 주연이 아닌 조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 못의 주인공이 우리 인간이 아니라 나무와 새와 물고기와 개들인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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