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 아이의 학습중단 위기가 불러온 나비효과
전 늘 왜 이모양일까요? 분명 초6 때 영어학원 중단 사건으로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ADHD인 티라노 씨는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 놓은 루틴이 깨지면 다시 되돌리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요. (06화 성실하던 학군지 초6남아, 위기를 불러온 어이없는 이유 참고) 그래놓고 바보같이 똑같이 답습해 버렸습니다.
곰곰이 돌이켜보니 이번 수학학원 중단 위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티라노 수학학원은 방학마다 특강이 있습니다. 월수금엔 방학특강, 화토에는 정규수업, 일요일은 클리닉이 있어서 방학에는 일주일에 6번 수학학원에 갑니다. 방학특강은 숙제가 없고, 정규수업만 숙제가 있고요.
문제는 8월 첫 주에 일어났습니다. 휴가와 대학병원 진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방학특강을 일주일에 두 번이나 빠지게 된 것입니다. 학습 무기력으로 학교에서만 숙제해서 방학에는 숙제가 밀리곤 했습니다. 다행히 특강 땐 숙제를 내주지 않아 여유가 있어, 특강 시간에 밀린 정규수업 숙제를 했고요.
월요일에 휴가로 빠져 숙제가 밀린 채 화요일 정규수업엘 갔고, 수요일 특강 때 밀린 숙제를 조금 했으나, 금요일에 특강을 또 빠져 숙제가 잔뜩 밀린 채로 토요일 정규수업을 맞이한 것입니다.
토요일 학원 가기 직전, 갑자기 내게 할 말이 있답니다.
"지금 선생님이랑 안 맞아. 학원 몇 달 쉬었다가 겨울에 2학년 선생님으로 바뀌면 그때 다시 다니고 싶어."란다. 풀이가 기똥차다며 극찬하더니, 갑자기 돌변합니다. 숙제가 밀려서 압박감이 너무 커서 도저히 못하겠답니다.
"최상위반이라 몇 달이나 쉬면 그 반에 다시 못 들어가."라고 했더니 다행히 받아들입니다. 어린아이처럼 겨우 겨우 어르고 달래서 우선 보내놓았습니다.
학원이 끝나고 집에 들어오는데 표정이 매우 밝습니다. 혹여 말 꺼냈다가 또 쉬겠다는 말이 나올까 봐 이틀 동안 눈치만 보며 내버려 두었습니다. '이제 괜찮아졌나 보네.' 싶었는데 화요일 정규수업 가기 직전, 티라노는 갑자기 또 압박감이 폭풍처럼 몰려오며 돌변합니다. 분명, 며칠 전엔 그냥 쉬고 싶다더니 마음이 바뀌었답니다.
그땐 쉬고 싶었는데, 지금은 수학 자체를 아예 손 놓고 싶어!
랍니다...ㅠㅠ 이때가 8월 12일이었다. 숙제는 됐고, 수업만이라도 듣자며 어르고 달래고 꼬시는 나는 17살 ADHD 아이 엄마입니다.
이때부터 나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아니라) '잠자는 학군지 속 ADHD아이 엄마'가 되었습니다.
티라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네게 강요 안 할 거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엄마가 예전에 네게 강요했던 걸 얼마나 후회했나 몰라.
예전에 정말 미안했어.
그리고 이때부터 수학숙제마저 하라는 잔소리를 버렸습니다. 우울감은 과수면을 불러왔습니다. 낮엔 최대한 늦게까지 자다가 깨서는 정말로 수학공부마저 버릴까 봐 불안해서 울고, 티라노가 하교한 이후엔 태연한 척 연기했습니다.
티라노가 갑자기 아빠에게 체스를 두자고 제안해 옵니다.
감기몸살을 핑계로 이틀째 잠에 빠져 있던, 숙제 잔소리마저 끊은 지 일주일이 다되어 가던 날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빠와 두기 시작한 체스는 어느새 셋이 번갈아 두게 되었습니다. 체스를 함께 두며 티라노의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던 어느 날, 전 넌지시 제안했습니다.
오랜만에 보드게임도 셋이 해보면 어때?
그렇게 우리가 즐겨하던 보드게임판이 벌어졌습니다. 올해 들어 처음이었고요.
이렇게 배꼽 잡고 소리 내어 웃은 게 얼마만인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웃었습니다.
미묘한 심리전으로 속고 속이길 반복하다가 정말 빵 터져서 얼마나 크게 웃었는지 모릅니다. 티라노 드립력이 그새 많이 늘었습니다. 약물치료 3년이 다되어가서 정말 전두엽이 조금 뚫렸나 싶어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역시 죽으란 법은 없나 봅니다.
하나 남은 수학마저 잔소리를 거의 끊었더니, 몇 가지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아이가 거실로 다시 나와 있기 시작했습니다. 작년처럼 보드게임을 다시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 표정도 점차 밝아지고 있었고요.
티라노야.
강요 같은 부탁 좀 할게. 다음 주부터는 수학숙제 좀 하자?
오늘 학원 가기 전 이렇게 말했더니, 싱글싱글 씩 웃습니다. 그래도 화내지 않고 웃어주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아이에게 압박감을 불러온 것도, 아이 방문을 닫게 만든 것도 모두 엄마인 나의 과잉 기대와 욕심 때문이었다는 걸, 모든 공부 중단 위기가 온 이제야 깨닫습니다.
난 널 포기하지 않아.
비교와 경쟁이라는 험난한 세상에 널 꺼낸 내가, 네가 스스로 일어설 날까지는 도우며 책임질 거야.
엄마는 할 수 있어.
엄마는 ADHD라서 과몰입과 과제집착력 하나는 정말 끝내주거든.
엄마는 엄청난 노력파라서, 찢어지게 가난했을 때도, 먹고살만한 지금도 엄마는 늘 최선을 다해서 살거든.
엄마는 네 달란트를 찾아서 빛이 날 수 있도록 흙먼지를 닦아만 줄게.
그걸 어떻게 사용할지는 네 몫이야.
네가 어떤 모습이어도 엄마는 널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