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양육자도 ADHD일 때의 어려움에 대하여
티라노는 ADHD약물치료를 시작한 후부터 편식이 극심해졌습니다.
3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낮 시간 동안의 식욕저하 부작용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거든요. 게다가 약을 쉬는 날도 없는 데다가 중1 11월부터 약물치료를 시작했기 때문에 사춘기와 겹쳐서 더욱 고집스러워진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좋아하던 음식들 중 안 먹게 된 음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된장찌개와 된장국, 소고기 뭇국, 팽이버섯계란 전, 고기가 잔뜩 들어간 김치전, 오이지와 양파지, 잔멸치볶음, 콩자반, 생선구이 등 이루 말로 다 헤아릴 수 없는 수준입니다. 지금은 정말로 육식공룡처럼 구운 고기만 먹으려고 합니다. 심지어 요새는 짜장면과 탕수육조차 거부하고요.
편식 상위 1% 티라노와 함께 추석을 맞아 시골에 갔습니다.
낮 12시, 점심상을 다 차려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으려고 하는데 아무리 불러도 티라노가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것도 그럴 것이 아침을 먹은 지 3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 데다가, ADHD약으로 인한 식욕저하가 극심한 시간이거든요.
이를 알 턱이 없는 시부모님께서는 자꾸만 제게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드러내며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어릴 땐 잘 먹었는데 크니까 왜 저러냐?"
'ADHD거든요.'
어차피 지금 쓰고 있는 ADHD 자녀양육서 책이 세상에 나오면 들킬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입이 도저히 떨어지지가 않아서 속으로만 대답을 삼킵니다.
다음날 점심때에도 또 저 얘기가 나옵니다. 결국 전 이렇게 말합니다.
"사춘기라서 그래요. 음식이라도 내가 먹고 싶은 대로 먹을 거야!라고 통보한 적이 있거든요."
그제야 시부모님은 조금은 수긍하는 표정으로 바뀝니다.
이틀을 시부모님 집에서 머문 후, 친정에 갔습니다.
밥때가 맞지 않아서 이번에도 점심을 먹은 지 4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저녁이었습니다. 게다가 전날 자정까지 10시간 동안 차를 탔더니 피곤한지 식욕이 더욱 없는 모양입니다. 그런 티라노를 보고 저희 엄마가 시부모님과 같은 말을 꺼냅니다.
"어릴 땐 잘 먹던 아이인데 왜 안 먹으려고 하니?"
저희 엄마는 시부모님과 달리, 저와 티라노가 ADHD라는 걸 최근에 알게 되셨습니다. 제가 쓰고 있는 ADHD책의 프롤로그와 몇 개의 원고 피드백이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ADHD 커밍아웃을 했거든요. 그래서 "ADHD 약 부작용 때문에 식욕저하가 와서 그래."라고 말했습니다.
근데도 전혀 이해조차 시도하려는 느낌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던 언니가 한마디 합니다.
"네가 그렇게 키워서 그런 거야."
저희 언니는 싱글이고, 아이도 없습니다. 게다가 교육 관련 종사자도 전혀 아니고요. 이런 언니가 무심코 던진 저 말이 또다시 비수가 되어 제 가슴에 박힙니다.
저도 압니다.
엄마인 저 역시 ADHD라서 아기 때부터 편식이 심했습니다. 저는 후각도 매우 예민해서 제가 한 요리는 잘 먹지를 못하는 주부입니다. 요리를 많이 한 날은 더합니다.
큰맘 먹고 2시간에 걸쳐 3가지 요리를 한 날, 퇴근하고 남편이 왔습니다. 맛있겠다며 좋아하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2시간 내내 냄새를 하도 맡았더니 난 도저히 저 음식들을 한 입도 못 먹겠어! 너 먹어." 결국 저희는 그날 배달음식을 시켰습니다. 맘먹고 요리를 많이 한 날일수록 배달음식을 많이 시키는 아이러니가 저희 집에선 자주 일어납니다.
제가 요리를 골고루 하고, 함께 먹을 수 있는 엄마였다면 티라노가 약물 부작용이 있다고 해도 지금처럼 편식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어쩔 텐가요. 이미 엄마인 제가 중증 ADHD인 것을요.
4년이 넘는 힘든 시간을 지나며 저도 발전이라는 것을 했나 봅니다.
예전 같으면 저 말을 끙끙대며 곱씹으며 반복적으로 상처받거나 화를 냈을 겁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습니다.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양육자가 ADHD가 아니라면 ADHD 아이가 편식은 덜 하겠지. 그렇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을 거야! 비 ADHD인 주양육자는 ADHD인 남편과 아이를 진심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데다가, 아이와 남편까지 케어해야 해서 많이 지칠 테니까! 뇌의 문제인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자꾸만 남편과 아이에게 좌절을 느끼거나 화를 내기도 했을 테고!"
주양육자가 ADHD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양쪽 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려움의 종류가 다를 뿐입니다. 저처럼 주양육자 마저 ADHD인 경우엔 ADHD 아이 양육과 케어가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따라옵니다. 저처럼 40대 중반 나이에도 이 정도로 ADHD 증상이 심하게 남아 있는 경우라면 더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마냥 나쁜 것만 있는 건 아닙니다.
아이는 저를 보며 희망을 품습니다.
'저렇게 심한 ADHD인 엄마도 교사가 됐고, 결혼도 했으며 책도 쓰는구나!'라고요.
'엄마를 보면 일상은 많이 우당탕 이어도 생각보다 매력이 있네?'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ADHD 아이에겐 부모의 ADHD는 희망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저는 "네가 그렇게 키워서 그래"라는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맞아서 더 이상 아파하지 않을 겁니다. 무심코 던진 돌은 무심코 옆으로 치워버리면 그뿐입니다. 아니면 어딘가 쓸모를 찾아 주어도 되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