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
“미친놈아-” 여자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여자와 남자는 이미 몇 시간째 이어진 언쟁으로 지쳐 보였다.
“아니 네가 더 미쳤지. 넌 진짜 정신병원 가야 해.” 남자도 지지 않았다.
늦은 밤, 대학가의 낡은 원룸 건물, 그중에서도 가장 구석진 방 안에서 격한 소음이 벽을 타고 흘러나왔다. 한때는 연인이었을 두 사람이, 일그러진 얼굴로 세상에서 가장 각진 단어를 고르고 있다.
“이젠 네가 무서워.”
“연락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날 사랑하기는 하는 거야? 어떻게 사랑이 변해?”
숨 쉴 틈도 없이 말을 쏟아내는 여자를 보며 남자는 깊은 한숨과 함께 시선을 방바닥의 낡은 장판으로 떨궜다. 그 위엔 함께 뒹굴었던 시간의 흔적 대신, 싸늘한 먼지만 내려앉아 있었다.
“후…. 그래, 잘됐네. 우리 그만 만나자.”
“……뭐?”
“그만하자고. 더는 너랑 못 만나겠다. 지긋지긋해.”
그 순간,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던 풍선이 바늘에 찔린 듯, 여자는 그대로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방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대학가 원룸촌에서 소음은 예민한 문제였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의 울음소리는 굳게 닫힌 창문을 비집고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어떤 이들은 흥미로운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어둠 속에 서서 귀를 기울였고, 또 어떤 이는 익명사이트에 소음 민원을 올리고 있었다.
"갈게. 잘 지내.”
남자가 현관으로 발을 옮기자, 여자는 반사적으로 남자와 낡은 현관문 사이에 위태롭게 끼어들었다.
“나와.”
남자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온기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런 감정도 없었던 것처럼. 다급해진 여자는 필사적으로 ‘남자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과거의 헌신들을 열거했다.
“오빠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내가 군대도 다 기다려주고, 오빠 힘들 때마다 내가 얼마나-”
“너, 내가 정말 모를 줄 알아? 내가 잠들 때마다 내 휴대폰 뒤지고, 위치 추적 앱 깔아서 몰래 스토킹 하고, 매일 내 옷에서 여자 향수 냄새라도 나는지 개처럼 킁킁거리고! 그것뿐인 줄 알아? 내 동아리 여자애들 신상 다 캐내고, 나랑 말이라도 섞었다 하면 귀신같이 알아내서 밤마다 카톡으로 협박하고!”
“아니, 그건 오빠가 자꾸 의심하게 만드니까…….”
“행동 하나하나 전부 질리고 소름 끼친다고! 비켜, 비키라고!”
남자는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여자를 짐짝처럼 거칠게 밀쳐냈다. 여자는 그대로 싱크대 앞에 처박혔고 닭 똥 같은 눈물만 흘렸다. 떨군 고개에 긴 머리카락이 불규칙적으로 흔들렸다. 그 짧은 정적의 순간, 여자의 머릿속으로 남자와 함께했던 모든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벽에 붙여 놓았던 폴라로이드 사진들, 나란히 꽂혀 있던 두 개의 칫솔, 같은 디자인의 커플 잠옷, 그가 좋아했던 반찬들로 채워지곤 했던 작은 냉장고, 그에게 요리를 해주던 싱크대의 온기, 그리고 아직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싸구려였지만 빛나던 1주년 기념 반지까지. 한때는 선명한 색채로 반짝이던 모든 것이, 이제는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무채색으로 희미해져 가는 순간이었다. 슬픔은 이내 격렬한 분노와 뒤섞여 터져 나왔다.
“그래, 3년이나 사귀었으니 질렸겠지! 그러니까 그렇게 껄떡거리고 다닌 거잖아.”
“우리, 이걸로 진짜 끝이야. 다신 서로 얼굴 보는 일 없도록 하자.”
남자는 그녀의 절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만 뱉어냈다. ‘끝’이라는 단어가 비수처럼 날아와 박히자, 여자는 이성을 잃고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작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미친 듯이 때렸다. 그러나 남자는 거대한 바위처럼 아무런 미동도,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 완고함 앞에서 여자는 제 행동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깨닫고는, 이내 그의 품을 파고들어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남자는 여자를 안아주지도,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않았다. 그저 한 뼘 아래, 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여자의 정수리만을 무감각하게 내려다볼 뿐이었다. 여자에게 아주 작은 미련의 불씨조차 남기지 않으리라, 남자는 독하게 마음먹었다.
그는 여자의 어깨를 거칠게 밀어내고 그녀 옆을 지나쳤다. 그 순간 여자는 못 가게 막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고, 남자의 등을 향해 냄비 등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고 소리치며 할퀴고 찌르고......
그렇게 또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야, 방 안의 공기는 거짓말처럼 급속도로 차분해졌다. 마치 조금 전의 격렬한 싸움은 한 편의 악몽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여자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한참을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텅 빈 눈으로 소맷자락을 이용해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어지럽게 널린 방 안을 기계적으로 치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집 앞 편의점에서 가장 큰 사이즈의 검은색 비닐봉지를 사 왔다. 깨진 유리 조각, 찌그러진 페트병, 음식물 쓰레기, 그리고 이제는 너덜너덜해진 남자의 옷가지들을 말없이 담았다. 자취해 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분리수거는 지독히도 귀찮은 일이었고, 쓰레기봉투 값은 생각보다 늘 부담스러웠다. 이윽고 여자는 아직 반도 채 차지 않은 봉투의 입구를 대충 묶어 침대 아래 깊숙이 밀어 넣었다.
두 사람은 과에서 유명한 CC였다. 3년을 만났고, 그중 1년은 이 작은 원룸에서 함께 살았다. 그림자처럼 항상 붙어 다니는 두 사람을 보고 주변에선 ‘결혼한 부부 같다’며 놀리곤 했지만, 그때 둘은 분명 행복했었다. 때때로 사소한 다툼도 있었지만, 여느 평범한 연인들처럼 금세 웃으며 화해하곤 했다. 하지만 그가 18학번 신입생 여자와 바람을 피우다 들킨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의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았고, 여자의 집착은 병적으로 변해갔다.
다음 날, 그는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강의실에 홀로 앉아 있는 여자. 그리고 여자의 핏기 없는 얼굴을 본 사람들은 지난밤 사이에 벌어졌을 험악한 일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함께 듣던 세 개의 전공 수업 동안에도 그의 빈자리는 계속되었고, 이틀, 사흘이 지나도록 그는 학교 어디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동기들이 여자에게 그의 안부를 물었지만, 그럴 때마다 여자의 눈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눈물이 한두 방울씩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방에 들어서자 퀴퀴하면서도 어딘가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로 치우지 않고 침대 밑에 방치해 둔 검은 비닐봉지 때문일 것이다. 그 원룸은 이상하게도 방음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환기 효과는 현저히 떨어졌다. 창문을 열면 바로 좁은 골목길과 마주 보는 구조 탓에 평소에도 창문은 거의 열지 않고, 오직 욕실의 작은 환풍구에 모든 환기를 의존했다. 다행히 계절은 늦가을을 지나 겨울로 향하고 있어, 냄새가 그리 심하지는 않은 편이었다. 여자는 들어오는 길에 사 온 라벤더 향 디퓨저 병의 마개를 열고 리드 스틱을 꽂았다. 공교롭게도 라벤더는 그가 가장 좋아했던 향이었다.
여자는 그간의 모든 감정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낡은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익숙한 선율은 기승전결을 따라 고요하고 편안하게 방 안을 채웠다. 이윽고, 누군가 여자의 방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며 무어라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음악 소리에 묻혀 명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거칠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임은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왔구나.”
여자는 눈을 감은 채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문 앞에는, 제복을 입은 두 명의 남자가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들은 대답 없는 방문을 더욱 거칠게 두드리다 못해, 결국 발로 차기 시작했다. 클래식 음악은 장엄한 피날레를 향해 치닫고 있었고, 여자는 허리를 숙여 침대 밑 비닐 속 남자와 눈을 맞췄다. 여자의 눈물이 광대를 거슬러 이마로 향했다.
“사랑해-.”
그의 큰 두 눈동자는 여전히 여자의 얼굴을 가득 담고 있었다.
※ 본 이야기는 작가의 상상으로 창작된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