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초단편소설

by 현범

상담실의 공기는 인공적인 라벤더 향과 어색한 침묵으로 채워져 있었다. 여자는 마주 앉은 남자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그러니까, 매일같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씀이시죠?” “네. 오늘도 여기 오는 내내 그랬고요.” 남자는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군요. 잘 찾아오셨어요.” 여자는 싱긋 웃으며 설문지를 내밀었다. 남자는 이름과 주소, 가족 관계 같은 인적사항들을 기계적으로 채워나갔다. 그는 자신의 삶을 몇 개의 객관식 문항과 단답형 정보로 요약하는 데 익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상담은 그의 삶을 훑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남자의 이야기는 흠잡을 데 없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한 아픔이 있었지만, 그 후의 삶은 오히려 더 단단해진 듯했다. 그는 폭력적이고 무책임했던 아버지를 반면교사 삼아,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누구에게나 유쾌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살아왔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아주 좋은 편이에요. 싫어할 만한 말이나 행동은 애초에 하지 않거든요. 과대표를 하면서 인정도 많이 받았고… 아, 2년 넘게 만난 여자 친구와도 크게 싸운 적 없이 잘 지내고요. 제가 좀 더 배려하는 편이긴 하지만요.” 남자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이야기는 누가 봐도 20대의 이상적인 삶, 그 자체였다.

상담사는 그의 완벽한 서사를 조용히 듣고 있다가, 옆에 있는 작은 가습기를 틀었다. 하얀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며 라벤더 향이 더 짙어졌다. “상담센터에 온다는 사실을 주변에 이야기한 적 있으세요? 여자 친구에게라도.” “아뇨. 아마 제가 이런 곳에 온다는 건 상상도 못 할걸요? 제 이미지랑도 안 어울리고. ‘기쁨을 나누면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는 자신의 철학을 방어막처럼 둘렀다. 상담사가 처음으로 그의 눈을 깊이,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방 안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킬 듯한, 아주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무언가 물었다.

그 질문은 그의 내면에 단단하게 쌓아 올린 댐의 가장 약한 부분을 정확히 찔렀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균열이었지만, 이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그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 왜 멈출 수가 없는지. 상담사가 중앙에 놓인 곽 티슈를 조용히 밀어주었을 뿐인데도, 그의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눈물과 함께, 잊고 있던, 혹은 애써 묻어두었던 아이가 터져 나왔다. 아버지의 고함 소리에 숨죽이던 아이. 조그마한 소리에도 온 신경을 곤두세우던 아이.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가여운 아이. 그는 그 아이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밝은 척하느라, 착한 척하느라, 괜찮은 척하느라, 자신의 진짜 감정들을 더 깊고 어두운 곳으로 숨겨왔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그렇게 스스로를 경멸하며 칭찬을 갈구했다. 그는 아직, 너무나 어렸다.

한참을 울고 난 남자는 상담센터를 나섰다. 횡단보도 앞, 수많은 사람들이 무심한 강물처럼 그를 스쳐 지나갔다. 남자는 움직이지 않고,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는 처음으로,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를 고려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위한 문장을 뱉었다. “엄마, 나 오늘 집에 가도 돼? 집밥이 너무 먹고 싶어서.” 수화기 너머, 어머니의 목소리가 반가움에 한 톤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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