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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영 Oct 22. 2023

현대무용이 어려운 이유

많은 사람들이 현대무용을 어렵다고 말한다. 이유는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탄츠위드’를 발행하면서 무용전공자가 아닌 일반 독자들과 무용관람시간을 가지며 알게 된 것이 있다. 첫째는 무용을 어렵다고 하지만 한 번도 보지 않았던 독자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과 둘째, 움직임 하나하나가 가진 언어적 의미를 고민한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의 문제는 정기적인 무용관람을 통해 해소되었다. 직접 보면서 작품의 의도를 생각하고 움직임을 통해 전해져 오는 다양한 것들을 감상하며 어렵기보다 재밌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진짜 문제는 두 번째였다. 움직임 하나하나를 계속해서 ‘저건 왜 한 거지? 어떤 의미가 있는거지?’라며 동작 하나하나를 언어로 치환하며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음성 외에 표정이나 제스처같은 어떤 정보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낯선 언어를 듣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끔찍하지 않을 수 없다. 무용 공연을 볼 때 많은 관객이 그 상태로 객석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면 서글픈 일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언어를 배우기 훨씬 전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온 몸으로 말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이 언어로 모든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때때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과 마주하곤 한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가족과 집을 잃은 이들의 애통한 모습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반대로 죽었다고 생각한 사랑하는 이를 다시 만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그저 기뻐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비통함에 할 말을 잃고 가슴을 쳐 본 사람이라면, 너무나 기쁜 나머지 펄쩍 펄쩍 뛰며 눈물을 흘려본 사람이라면 말이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게 얼마나 적은 분량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메라비언의 법칙에 의하면 누군가와의 소통에 있어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7%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무용공연을 언어적으로만 이해하려고만 할 것인가? 언어부분의 7%를 제하고 나머지 시각과 청각에 의한 소통의 방법을 택한다면 훨씬 풍성하게 무용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니 이제 무용을 언어로 치환하는 대신 온 몸의 감각으로 느껴보면 어떨까?

현대무용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고 이론적 배경을 설명하는 일은 차치하겠다. 다만 본질적인 부분만 설명한다면 몸을 매체로 하는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움직임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몸을 통한 움직임이 표현매체로 사용되는 것이니 만큼 언어적인 이해를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현대무용 중에도 언어의 비중이 높거나 서사를 따라 진행되는 스토리텔링형 작품들도 있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움직임을 주요 표현수단으로 활용한다.

이 때 걷거나 뛰거나 하는 일상의 모든 동작을 비롯해 멈춰 있는 상태까지도 얼마든지 춤이 될 수 있다. 나를 표현하는 움직임은 모두 춤의 재료가 된다. 그냥 걷는 것은 춤이 아니지만 나의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한 경쾌한 발걸음은 춤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표현을 하기 위한 의도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 이것이 현대무용의 가장 큰 특징이다. 클래식발레나 전통무용은 이미 만들어진 것을 이어가는 것이라면 현대무용은 이렇듯 늘 새로운 움직임들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펼쳐낸다. 

이런 춤이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한 가지 요소가 더해져야 한다. 바로 관객과 무엇을 나눌 것이냐 하는 의도이다. 이것이 안무이다. 안무는 관객과 나누고자 하는 어떤 생각을 실체로 만드는 일이다. 안무자는 상상했던 것들을 무대에 구체화시킨다. 단순히 동작들을 나열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원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모든 것을 찾아낸다.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것은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김성용 감독의 말처럼 안무는 리서치의 과정을 빼놓을 수 없다. 현대무용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이 리서치의 과정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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