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고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움츠렸던 나는 미뤄뒀던 여러 가지 일들을 시작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귀찮고 힘들었던 일들이 바람이 불고 그늘이 생기자 해보고 싶었다.
마음의 문을 열어 들어오는 정보에 대해 귀를 기울여보기로 했다.
'변화를 갖고 싶었고 누군가 무언가를 권하면 사양하지 않고 한번 해보기로 했다. '
가벼운 변화로는 운동을 정기적으로 돈을 내고 하기로 했다. 이건 다른 사람의 권유로 시작해 본 것이다.
예전의 나라면 헬스만 열심히 뛰었지 정기적으로 만나서 운동을 하는 것을 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결심대로 한번 시도해 봤는데 나쁘지 않았다.
또 특별한 일정이 없다면 집 주변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임장을 다니기로 했다.
임장이라는 것이 꼭 부동산을 보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동네 구경에 가깝다. 말로만 듣고 전해 듣기만 한 동네가 정말 어떤 동네인지 알아보고 구경했다. 모든 카더라 통신은 직접 눈으로 보고 직접 귀로 들으면 무성한 불안이 가라앉는다. 내가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랐지만 눈, 귀가 가장 크게 열려있을 20대를 몽땅 서울에서 보내다 보니 아는 게 없었다. 그렇게 내가 사는 동네를 다시 걸어보면서 살펴보게 됐다.
그렇게 보다 보니 지역의 격차도 배우게 되고 또 마을마다 사람들의 심리도 조금은 알게 됐다.
자연스레 내가 사는 지역과 비교분석을 하게 되었다. 장단점이 교차했고 그러니 저절로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경우의 수'가 쌓여있었다. 내가 나 혼자만 살고 있다면 이렇게 심도 있게 고민을 했을까? 가족이 있으니 더 나은 자산의 형태, 더 나은 교육 환경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다양한 선택지가 생기자 내 마음속에는 이 불편한 마음이 무엇인지 답답했다.
이 감정은 욕심이 커져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욕심의 키(key)가 남(주위 사람, 환경)에게 달렸다고 믿는 상태였다. 변화를 갖겠다는 것은 남들의 관심, 그들의 방향성을 받아들여 보는 것을 말한다.
순간적으로 비교, 분별심으로 괴로울 수 있지만 관계라는 것은 나와 다른 관점을 만나보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를 해보는 것이다.
지금 세상은 욕망의 시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많은 욕망으로 둘러싸여 있다.
수많은 욕심이 있고 그 욕심으로 둘러싼 진심이 무엇인지 각자 본인만이 답을 알고 있다. 그 욕심을 바라보는 관점과 행동에 어리석음을 조절하는 것이 각자의 몫이다. 욕심을 집착으로만 발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방향으로 어떻게 끌어올릴지 고민하는 것이 현명하다. 욕심은 키워봐야 내 그릇을 알게 되니까. 깊이 파고 들어봐야 그것이 욕심으로 끝낼 일인지 계획을 해서 움직이면 될 건설적인 일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욕심은 크든 작든 자신의 그릇에 따라 담아서 잘 발효시키면 소망이 되고 그 소망을 행동하면 개척자가 된다.
그릇이 커도 여백과 소박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청빈한 만족감을 가져갈 수 있다.
여러 가지를 시도하다 보면 이념이 섞여 시야를 가릴 때가 있다.
모든 남의 말이 다 맞을 리가 없고 내가 믿고 있던 신념만이 정의가 아닐 수도 있다.
사람들의 생각을 참고는 하되 내 중심 즉, 정신을 놓게 되면 그때부터는 비구름을 만난 태풍의 눈처럼 더 무겁게 덩치를 만들어 가라앉게 된다. 그렇게 중심을 잡으려면 다양한 변화에 나를 노출시켜봐야한다.
지식과 정보가 많은 요즘이라 숨어버리고 아무것과도 소통하고 싶지 않다고 닫아두는 연습은 100세 시대에는 맞지 않다고 본다. 쉬는 시간이 있어야 하지만 우리는 다양한 견해와도 교류를 해야 하고 수많은 정보의 밀물을 관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 관찰의 과정에서 '내'가 주인공이 되어 판단하는 연습을 해봐야 한다.
옳고 그르다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니라 견해를 바라보는 내가 더 풍성하고 성숙한 해답을 내고 싶다고 느낀 한 주였다. 계절이 바뀌듯이 나에게 들어오는 수많은 변화를 느껴볼 예정이다.
구독자님들도 각자가 생각하는 작은 변화를 생각해 보는 한 주가 되길 바랍니다.
여름 내내 벵갈고무나무는 새 잎을 저렇게 무성하게 내어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