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단편소설

by 류완



"2021214"

"2021214"


반복해서 부르는 숫자에 눈을 떠보니 깜깜한 밀실에 조명 하나가 나를 비추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고 나는 의자에 앉아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방이 막힌 어두 컴컴한 방이었다.

'도대체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과 함께

앞에 서 있는 남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채워졌다.


"누구세요?"

"저에 대해서는 알 필요 없습니다."

"누구신데 저를 여기 가두어 두신 거죠?"

"당신은 누구나 한 번씩 겪게 되는 인생 대전환의 기회를 맞이하셨습니다."

"그런 게 어떻게 저에게 일어날 수 있지요?"

"괜찮아요. 누구든지 결혼하고 10년이 지나면 모두 지금과 같은 선택의 기회가 주어져요."

"무슨 선택인데요?"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두려움은 점차 호기심으로 변했다.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선택이 있다고? 그렇다면 지금 여기가 지옥은 아니라는 말이겠군.'

일단 가장 큰 걱정거리는 한 꺼풀 벗겨낸 것 같았다.

무슨 선택인지 모르겠지만 여기를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 만으로도 심장 박동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느낌이다.


"당신은 지금의 아내 김희영 씨와 결혼한 지 10년을 맞이했습니다.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요?"

"당신이 지금의 아내를 선택하면 이대로 아내와 계속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선택이 있나요?"

"여기에 다른 세 여성의 신상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내 손에 세 여성에 관한 기록과 사진이 붙은 자료를 내밀었다.


"당신이 만약 이 분들 중 한 명을 선택한다면 당신의 아내는 선택한 여성으로 바뀌게 됩니다."


자료는 제법 자세한 사항까지 적혀 있었다. 재산, 키, 몸무게, 자녀 유무, 취미와 좋아하는 음식까지

이 정도 자료라면 자기가 적어 낸 자소서 이상으로 상대방을 알 수 있기에 충분했다.


"왜 이 세명의 여성인 거죠?"

"이 분들이 당신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분들은 자신의 남편을 버리고 저를 선택했다는 거군요?"

"네, 잘 아셨습니다. 역시 당신은 기록에 나와 있는 대로 상황 파악에 능하시군요."


이제는 이 선택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내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데 세 여성이나 나를 선택했다니

뜬금없이 눈 뜨고 만난 낯선 상황에서 이처럼 황홀한 기회는 다시금 얻기 어려울 거라 여겨졌다.

하지만 선택은 언제나 신중해야 하는 법, 궁금한 몇 가지를 물어보기로 했다.


"제가 이 여성들을 선택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세 여성분들은 미혼인 채로 살아가게 됩니다."

"다른 여성을 선택하게 되면 지금까지의 삶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지 지금 이 선택은 기억에서 지워집니다. 그리고 선택하신 분과의 삶만 새롭게 설계되어 기억으로 남게 됩니다. 선택받지 못한 다른 분들에 대해 죄책감조차 가질 수 없습니다. 애초에 기억에 남지 않게 되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제가 제 아내를 선택하면 이 세 여성은 모두 혼자 지내게 되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모두 각자 싱글로 혹은 선택에 따라 이혼의 경험을 지닌 채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혼이요?"

"네, 간혹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았음을 인정하기 싫은 분들을 위해 이혼 경력을 세팅해 드리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도 있군요."

"자 이제 선택하시지요. 시간은 넉넉히 드릴 수 없습니다."


고민이 멈추지 않는다. 지금의 아내와 사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세상에! 여기 한 여성은 왜 나를 선택했는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멋진 여성이다. 이미 이 여성과 결혼 후 행복한 미래를 그리고 있는 자신이 떠오를 무렵 검은 옷의 남성이 나의 선택을 재촉한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선택하셨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음............."

"10초 내로 선택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선택하지 않은 걸로 하겠습니다. 열, 아홉."

"잠깐만요. 할게요."


그 짧은 순간에 무의식적으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나의 선택은,


"지금의 아내 김희영으로 하겠습니다. 지금의 아내와 계속 살겠습니다."

"선택에 번복은 없으신 거죠?"

"네, 저는 확신합니다. 그냥 이대로 계속 살게 해 주십시오."


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온다. 이 순간을 기억 못 한다고 하지만

내가 다른 여자들 사이에서 아내를 선택했음은 꼭 전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아쉬움도 살짝 남아 있지만, 지금까지 그리 나쁜 삶은 아니었으니 그런대로 괜찮다 싶었다.


그 순간 아무도 없다고 느꼈던 등 뒤에 불이 켜지더니 없었던 문이 하나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선택하신 대로 저 문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왜 앞 문이 아니고 뒤로 나가야 하는 거죠?"

"안타깝게도 김희영 씨는 당신이 아닌 다른 남성을 선택했습니다."

"네? 뭐라고요."

"당신은 이제 홀로 살아가야 합니다. 뒷 문으로 나가시면 혼자 사는 삶의 몇 가지 항목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남은 선택은 잘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아니 왜? 제 아내 가요? 미쳤어요?"

"선택에 따른 결과입니다. 결과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그럼 나도 마누라 선택 안 하지. 젠장."


투덜거리며 뒷 문으로 나오니 여러 가지 상황 설정을 표시하는 안내 판이 보인다.

못내 아쉬워서 그랬을까? 이혼남을 선택하고 개나 키우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2021214"


제복을 차려입은 경찰 같은 사람이 나와서 이름 대신 숫자로 나를 불렀다.


"이 의자에 앉으십시오. 당신은 이제 2021년 2월 14일, 47세 이혼남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글은 혼자 사시는 분들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얼마 전, 아내에게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이랑 결혼하겠다고 말했는데

아내는 생각해 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냥 떠오른 생각을 적어본 소설입니다.

담담하게 적어 내려가다 보니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가 된 것 같아 뿌듯합니다.

이 모든 영광을 아내에게 바칩니다.


딱히 삐치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다음에 다시 그런 질문을 받게 된다면 나도 생각해 보겠다고 말할 계획입니다.

분명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입니다.

이건 절대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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