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한 민수의 걸음은 위태로웠다. 휘청거리며 걷던 민수에게 '사주, 팔자'라는 글자가 적힌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길의 끝까지 비슷한 천막들이 이어져 있었다. 마음이 무거운 민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무심히 걷다가 가장 허름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에는 남루한 차림의 노인이 웅크리고 앉아 민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지?"
"점 보는 분이 그런 것도 몰라요?"
"여기 들어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고민이 있어서 들어오지. 나는 아는 게 없어. 그냥 해결해 줄 뿐. 잔말 말고 니 고민이나 풀어봐."
민수는 노인의 솔직한 대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무 힘들어서 찾아왔는데 힘들어 보이지 않을 것 같아 표정을 고치고 노인 앞에 앉아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정말 죽을 것 같아요."
"뭐 때문에?"
"부모님의 간섭이 싫어 직장을 구하자마자 집을 나왔어요. 처음엔 모든 게 내 세상 같았거든요. 하지만 혼자 살다 보니 돈은 안 모이고, 이리저리 빚만 늘어가고, 직장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가면서 그만 두기를 바라는 것 같고....."
"그게 단가?"
"얼마 전에 여자 친구와 헤어졌어요. 1년 넘게 사귄 친구인데 결국 더 잘 사는 사람 만나서 떠나가더라고요. 몇 번을 찾아가 매달려 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건 부끄러운 내 모습뿐이었어요. 그때부터 정말 죽고 싶은 마음만 남아 있어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너무 벅차요. 선생님. 말씀해 주세요. 저에게 살아갈 의미라는 건 남아 있는 건가요?"
노인은 알 수 없는 글씨가 가득 쓰여 있는 책을 덮고 민수의 어깨를 훑어보았다. 천천히 그의 모습을 살피던 노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한 참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등 뒤에 어둠이 많아."
"그런 게 보여요?"
"어둠을 떨쳐 내야 해."
"어떻게 하면 어둠을 떨쳐 낼 수 있나요? 선생님 제발 알려주세요."
어지러운 몸을 간신히 부여잡고 앉아있던 민수는 번쩍 상체를 들어 올렸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간청했다.
"선생님, 제가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그래요. 내 등, 지금 내 등 뒤에 있는 어둠을 어떻게든 떨쳐 내야 겠어요. 제발 그 방법 좀 알려주세요."
"결과가 어떠하든지 후회 안 할 자신은 있나?"
"지금 이 거지 같은 상황만 떨쳐 낼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래, 각오가 확실하니 알려 줘야겠군. 오늘 밤 자네 꿈에 커다란 우물이 나타날 걸세. 우물이 보이면 우물 안으로 몸을 숙여 그리고 니 등 뒤에 있는 어둠을 모두 쏟아 내는 거야. 훌훌 털어내고 가벼워지면 마지막 주문을 외우면 된다네."
"마지막 주문이 뭔데요?"
"니 이름을 거꾸로 부르면 돼."
"이름을 요? 내 이름이 권민수니까 수민권이라고 말하면 돼요?"
"이제 가 봐."
"복채는 제가 카드밖에 없어서. 계좌를 불러 주시면, "
"됐고 얼른 가서 잠이나 자."
민수는 휘청거리며 천막을 나왔다. 택시를 잡아 타고 집으로 오자마자 잠이 들었다. 노인의 말대로 검은 우물이 꿈속에서 나타났다. 어차피 너무 취해 꿈과 현실이 뒤 섞여 있는 밤이다. 이상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 민수는 천천히 다가가 우물 안을 살펴보았다. 끝도 없는 어둠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 민수는 상체를 밀어 넣고 하고 싶은 말을 퍼부었다.
"이 지긋지긋한 삶, 내 등 뒤에 있는 어둠과 불행, 모두 네가 다 가져가 버려!"
눈물과 콧물이 함께 우물 속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축축한 느낌이 들어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집에 들어와 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잠이 들었나 보다. 꿈이 현실처럼 느껴지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식은땀이 흐른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따뜻한 물에 샤워를 했다. 한 결 편안해지는 기분이다. 밤 새 일어난 모든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꿈에서라도 마음의 짐을 풀어낼 수 있어서 그런 걸까? 현실의 나는 어제 보다 분명 나아진 기분이 들었다.
출근 준비를 하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아버지의 전화였다. 너무 오래간만에 화면에 뜬 '아버지'라는 글자에 민수는 주춤거리고 있었다. 전화는 끊어졌고 5분 뒤, 문자로 아버지의 전화 목적을 알 수 있었다.
'퇴근하면 집으로 올 수 있겠니?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마지막으로 집을 찾아간 지가 5년이 넘었다. 한 때는 명절이면 계좌로 용돈을 보내기도 했었지만 가족 간의 선의도 불편하게 느껴지면서 소식을 끊고 산지 3년이 넘었다. 불쑥 찾아온 아버지의 문자 한 통이 여간 불편했다. 무시할까 싶었지만 하나뿐인 혈육,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일, 이 기회에 부딪혀보자고 생각하며 퇴근 후 부모님 집을 찾았다.
"그래 들어와라. 잘 지냈냐?"
아버지는 아들의 방문에 너무 반갑지도 어색하지도 않은 인사로 맞이했다. 왠지 그런 아버지가 낯설게 느껴졌다.
"네, 아버지는 괜찮으세요?"
"나야 뭐 나이들은 거 빼고 뭐 있겠냐."
"그런데 어머니는요?"
"엄마는 방에 계셔."
"왜요? 어디 안 좋으세요?"
"민수야."
"네?"
"사실 엄마가 말이야."
"무슨 일 있으셨어요?"
"네가 나가고 나서 알츠하이머성 치매 판정을 받았단다."
"네?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네가 걱정할까 봐 알리지 말라고 하셨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원망이 터져 나왔지만 원망은 고스란히 민수 자신에게 돌아왔다. 어머니를 외면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스스로 부끄러운 삶이라 고백하면서 외면했던 시간들이 한순간에 밀려왔다. '지금까지 내가 피해 왔던 건 무엇이었을까?'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이었을까? 받을 수 없는 가족의 관심이었을까?
"엄마가 이제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고 거동도 잘 못하셔. 너에게 연락이 오길 기다렸지만 이젠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아 연락해야 하나 싶었는데 마침 오늘 아침 엄마가 너를 찾는 거야. 나도 깜짝 놀랐어. 네가 불편해하리라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꼭 엄마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단다."
혼을 내야 할 아들에게 아버지는 타이르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머니의 현재 상황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어머니를 만나기 전 감정을 잘 추스르고 편안하게 대화하라고 일러주셨다.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머니는 의료용 침대에 누워 천정을 바라보고 계셨다. 민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시고는 손을 뻗어 민수의 손을 잡았다.
"잘 왔어. 그거 가지러 왔지?"
민수는 첫 대화부터 막혀버렸다. 어머니지만 치매 환자를 만나게 된 건 처음이었다. 어떻게 대화를 이어나가야 할지 고민할 때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다.
"경희 씨가 숨겨 놓았잖아. 어디 있는지 알려줘야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아버지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나 보다.
"킥킥킥, 그래 아무도 모르지? 내가 숨겨 놓은 거. 아저씨 화장대 서랍 안에 주머니 좀 가져다줘."
아버지는 알고 있다는 듯이 서랍 안에 있는 지퍼가 달린 주머니를 찾아 어머니께 드렸다.
"이게 뭔지 알아?"
"뭔데요?"
"내 보물 주머니. 이거 너 줄게."
지퍼를 열고 보니 통장과 도장 하나가 들어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멈춰버린 민수에게 아버지는 어머니를 대신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
"엄마가 너 집 나갈 때부터 모은 거야. 넉넉하지는 않지만 지금 사는 월세에서 전세로 옮길 수 있을 정도는 될 거다."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나니 머릿속이 하얗게 텅 비어져 버린 기분이 들었다. 액수가 무슨 문제겠는가! 단 한 달도 멈추지 않고 차곡차곡 쌓여 있는 숫자들 속에는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걱정과 응원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민수는 갑자기 어젯밤 꿈이 떠 올랐다. 깜깜한 우물, 그곳에 자신의 고통을 쏟아냈던 순간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깜깜한 우물은 어머니의 기억이 아니었을까? 민수는 자신의 고통을 모두 어머니의 기억 속에 함께 묻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어머니의 기억 속에 고작 한 줌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그 속으로 밀어 넣은 건 아니었는지.....
끝까지 울지 않으려 했다. 부끄러워 도저히 어머니 앞에서는 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마지막 한 마디에 민수는 남은 제어력을 모두 풀어 버리고 펑펑 흐느껴 울었다.
"이제 말을 해야지? 수민권씨."
사랑의 끝은 어둠입니다.
사랑은 결국 시간이 흐르면 잃고야 맙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저주입니다.
항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사랑만이 우리가 가진 문제를 치유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이 가식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정말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내면의 깊은 자아는 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힘들 때, 정말 믿을 수 없을 때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잘 되든 못 되든 항상 같은 모습으로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
어머니는 여전히 자신의 시간을 깎아서 아들에게 줄 것을 만들고 계십니다.
우울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정말 힘든 시간 속에서도 사랑에 대한 믿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우울의 긴 터널로 밀어 넣은 것도,
그 터널을 빠져나오게 하는 힘도 모두 사랑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세상에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지라도
나는 지금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랑합니다.
부디 당신도 그러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