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간 하루

단편 소설

by 류완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두통인지 숙취 때문인지 모르겠다.

오늘 아침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일어났다.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나서도 개운하지 않은 걸 보니 어제 있었던 일이 아직도 성에 차지 않은 것 같다.


도대체 그 남자는 나의 어떤 점이 불만이어서 그런 태도를 보인 걸까?

나 역시 그가 완벽한 이상형은 아니었지만 너무 오래간만에 이성을 만난 탓인지

이런저런 실수도 하고 헛소리도 좀 한 것 같은데

그렇다고 다시 연락 주겠다는 말 한마디 없이 택시를 태워 보내는 매너는 뭐람?


그래 솔직히 그 사람, 좀 맘에 들었다.

싫다는 사람, 억지로 떠밀려 나간 만남치고는 젠틀하고 편안해 보이는 모습에

함께 있는 내내 좋은 감정이 흘렀다.

첫 만남에서 이런 감정을 느껴보기는 처음인지라 말도 더듬고 횡설수설한 것도 사실이다.

만난 지 10분도 안 지났는데 내가 을이고 저 남성이 갑인 상황이 알아서 파악이 되더라.

상황을 반전시켜보고자 노력했던 말과 행동이 도리어 그 상황만 악화시켰던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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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로 간 와인 바에서 벌컥벌컥 들이켠 이름 모를 포도주에

정신줄 놓아버린 마지막 장면을 끝으로 나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한 마디로 어제 소개팅은 망했다.


그때였다.

늦은 주말 아침을 깨우는 전화 벨소리.

소개해준 회사 동기이면서 두 살 많은 언니의 연락이 온다.

'받을까 말까'

딱히 선명한 기억도 없으니 뭐라 말해줄 내용도 없는데......

그래도 내 인생 망했음을 통보라도 해 줘야 언니의 따뜻한 위로가 위장을 채워주지 않겠는가.


"여보세요?"

"뭐야, 목소리가 왜 이래. 아직도 자고 있었던 거야?"

"주말인데 뭐 어때. 늦잠 좀 잘 수도 있지 뭘."

"얼른 씻고 잘 좀 꾸며 봐. 미용실이라도 다녀오던지."


기분도 꿀꿀한데 한 껏 멋을 부리란다.

왠지 어제 나눈 이야기와 다르지 않은 것 같은 반가움이 흘러나온다.


"4시에 만나기로 한 거 아냐?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


뭐지? 또 다른 만남이 하나 더 있었나? 아니면 어젯밤 불편한 만남에 대한 또 다른 보상일까?


"언니 무슨 말이야. 어젯밤 이미 망하고 왔는데 누굴 또 만나래?"

"야 이 기지배야 어젯밤엔 나랑 부장님 욕하느라 밤새웠고, 오늘 4시까지 준비하고 나가라고 몇 번을 얘기했냐. 그렇게 정신줄 놓고 사니까 니가 아직까지도 남자가 없는 거지. 야 이년아 빨리 안 일어나!!"


뭔가 스토리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기분이다.

나는 분명 어제 그 남자를 만났는데 언니는 오늘 밤 다시 만나라고 한다.

무슨 일인가 싶어 핸드폰의 시계와 날짜를 확인했다.


'11시 30분, 토요일'


뭐지?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꿈이란 말인가?


"어 알았어. 언니 일단 끊어 봐. 나 정신 좀 차리고 다시 연락할게."

"니가 차릴 정신은 있기나 하냐?"


뚜욱---


전화를 끊고 심호흡을 깊이 삼켰다.

나는 분명히 어제 그 남자를 만났다. 심민호. 이름도 얼굴도 착해 보였던 그 남자를 기억한다.

그런데 그 남자가 꿈이라고? 아닌데, 내가 분명히 지하철을 타고 홍대역 근처 카페로 갔는데?


일단 일어나 오늘 입을 옷을 골랐다.

어제 입었던 스타일리시한 원피스는 꺼내지 않았다.

편안한 청바지에 흰색 포플린 셔츠를 꺼내 침대 위에 내려 두었다.

가볍게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은 후 집을 나섰다.


집 근처 자주 가는 카페에서 오후의 브런치를 즐겼다.

왠지 모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어젯밤 내가 체험했던 시간이 꿈이었는지 실제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무튼 나에게 한 번 더 선택할 수 있는 날이 주어졌다.


그래 아마 오늘 오후 4시에 홍대역 3번 출구에 있는 작은 카페에 가면 그 남자를 만날 수 있겠지.

그는 흰색 니트에 진한 회색 블레이저를 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의 모습에 맞춰 의상을 선택한 건 아니다.

치마를 입어도 그에게는 어울릴 만한 모습일 테니까.

다만 어제의 어색한 모습은 버리고 편안한 감정으로 다시 만나고 싶었다.

물론 이게 꿈이라면 어젯밤 악몽 같았던 내 모습이 현실일 테지?


아차차, 2시간 뒤에 커피를 마셔야 하는데 벌써 한 잔을 마시고 있네.

뭐 어때. 커피는 잘 못 마신다며 밀크 티 한 잔 주문하고 반만 마시지 뭐.

이상 야릇한 미소가 진한 커피 향 위로 타고 오른다.

마치 오늘은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그와 나눌 첫인사부터 그가 좋아하는 취미까지 모두 기억이 난다.

올레~ 오늘은 내가 승리자다. 나는 너를 알고 너는 나를 모르니까.

그러니 오늘은 내가 너를 가지고 놀 수 있겠지?

세상에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오는 일이 나에게 일어나다니 이건 분명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할 수밖에.

나는 오늘 운명의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 남자는 나를 사랑할게 분명해.


시간에 맞춰 지하철을 타고 홍대로 향했다.

어제 보단 덜 붐비는 걸 보니 여유롭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리라는 기대감이 생겼다.

홍대역 3번 출구를 빠져나왔다. 50미터 전방에 만나기로 한 커피숍이 보인다.

그래 맞아 저기였어.

분명히 저 매장의 문을 열고 들어간 후 왼쪽 세 번째 테이블에 그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흐흐흐

늑대를 사냥하는 한 마리의 여우가 된 기분이다.

문을 열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야릇한 미소와 함께 백치미를 머금은 연기력을 뿜어내며

매장 안을 두리번거리다 왼쪽 세 번째 테이블을 확인했다.

있다.

한 남자가 그 자리에 있다.


그런데 흰색 니트에 진한 회색 블레이저가 아니다.

청바지에 회색 카디건을 걸친 남자가 그 자리에 앉아 있다.


큰일이다. 어젯밤 그 남자가 아니다.

내가 만난 그 남자는 정말 꿈속에 존재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오늘 아침의 숙취는 언니와의 술자리 때문이었단 말인가?

이런 젠장, 진짜 소개팅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시작하기도 전에 망한 느낌이 진하게 풍겨 나온다.


"김민주 씨? 안녕하세요. 심민호입니다."

"네, 반가워요. 민주예요. 김민주."

"저는 아이스 카페라테 마시고 있었어요. 민주 씨는요?"

"저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할게요."


주문을 하러 카운터로 향하는 남자의 미소가 눈이 부시다.

아차차, 내가 마실 음료는 내가 사 왔어야 하는데,

남자의 자연스러운 유도에 처음부터 끌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꿈을 깨고도 여전히 내가 을인 건 변하지 않았다.

싱글벙글한 저 남자의 미소가 여간 신경에 쓰인다.


웃지 마 이 양반아. 난 지금 죽을 맛이니까.






웃자고 써 본 소설입니다.

요즘엔 옛날과 같은 소개팅은 없다고 하더라고요.

만남이 있기 전 서로의 정보를 sns를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호기심보다는 확인하는 차원에서 만나는 관계가 많다고 합니다.


저는 모르지요.

연애 경험도 많지 않고(?) 마지막 연애는 23년 전이니까요.

그때는 '어디 학교 무슨 과 누구 오케이?'라는 요청에

오케이하고 나면 만날 때까지 상대방을 알 수 없었습니다.


상상으로 그려낸 이야기입니다.

내가 아닌 여성의 마음으로 그려보았습니다.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를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그게 소설 아닌가요?


타인의 경험을 내 것으로 만들 때 삶이 더 풍성해진다고 믿습니다.

살짝 어긋난 이야기가 있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어차피 우리의 모든 첫 만남은 판타지 아니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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