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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초보 남편의 김밥 말기 대환장 파티

자신에게 축적의 시간을 충분히 줄 것

by 사이의 글

김밥은 내게 패스트푸드다. 김밥집에서 김밥을 한 줄 주문하면, 몇 분 만에 깔끔히 포장된 봉투를 건네받는다. 한 입에 한 조각씩. 일 하면서도 먹을 수 있으니 이만큼 간편한 음식도 흔치 않다. 재료 균형은 또 어떤가. 계란, 시금치, 당근, 오이, 단무지, 햄, 그 외 치즈나 참치, 불고기가 탄단지를 맞춰준다. 그래서 나는 김밥을 ‘한국식 패스트푸드’로 여겼다. 햄버거보단 훨씬 건강하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는 패스트푸드. 특히 내가 자주 가던 김밥집 사장님이 김밥을 마는 모습을 보면, 만드는 과정 역시 얼마나 간편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주문을 받자마자 김 한 장을 펼친 뒤, 밥을 얹고 미리 손질한 재료를 착착 올려 한 번에 또르르 말아버린다. 툭툭 잘라내는 칼질로 대략 열 조각을 내면, 알록달록한 단면의 김밥이 가지런하게 포장지에 싸인다.


그래. 이거야. 어느 날 김밥을 주문하고, 사장님의 능숙한 손놀림을 보던 중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건강을 생각해 직접 밥을 해 먹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먼저 도전할 메뉴는 도시락이라고 생각했다. 집에서 먹는 밥보다, 나가서 먹는 식사의 질이 더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눈에 들어온 메뉴가 바로 김밥. 생각난 김에 바로 도전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땐 몰랐다. 누군가가 어떤 일을 굉장히 쉽게 해낸다면, 그건 그 사람이 고수라는 의미였다는 걸.






유튜브를 검색하다가 하나의 레시피를 참고하기로 했다. 영상 길이는 대략 9분. 재료 손질부터 치즈와 참치 김밥까지. 모든 과정이 친절하게 소개되어 있어서 차근차근 따라 하기만 하면 될 듯했다.


착각이었다. 마트에 들러 재료를 고르는 일부터 난관이었다. 집에 참기름이 있던가. 굵은소금은 본 것도 같은데. 오이는 몇 개가 필요하지. 해보지 않은 일을 하려니, 첫 단추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계산대에서 하나씩 바코드를 찍고는 마침내 이 모든 과정에 회의감이 몰려왔다. 약 45,000원 정도가 나온 것. 참치나 불고기 김밥처럼 가격대가 높은 김밥을 열 줄 정도 사 먹을 수 있는 돈인데, 과연 이렇게 사서 열 줄은 제대로 만들 수나 있을까. 내가 지금 맞게 하고 있는 건가.


점심으로 먹으려면 의구심에 사로잡혀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얼른 집으로 와서 바로 재료 손질에 들어갔다. 당근은 흙당근을 사서 흙을 박박 씻어내야 했고, 칼질이 서툴러 채 썰기는 한 세월이었다. 오이고 당근이고 햄이고 어묵이고 죄다 삐뚤빼뚤하게 썰렸다. 계란은 지단을 부치다 찢어지고, 햄과 어묵을 볶다가 기름이 튀고, 시금치는 너무 데쳐서 흐물거렸다.


요리 초보자의 김밥 말기 대환장 파티는 결국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아까 분명 9분짜리 영상을 보고 시작했는데 말이다.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누군가가 어떤 일을 굉장히 쉽게 해낸다면, 그건 그 사람이 고수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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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 준비는 끝났고, 이제 본격적으로 김밥을 말면 되었다. 영상에선 '이제 재밌게 말기만 하면 돼요.' 하는 말이 나왔다.


거짓말. 쉽다고 말하는 고수들의 말은 걸러 들어야 한다. 김밥 말기 1차 시도는 보란 듯이 실패했다. 아직 덜 말렸는데 김의 길이가 모자랐던 것. 아무래도 재료가 많았던 모양이었다. 2차 시도는 욕심을 버리고 재료를 조금씩 넣었는데, 역시나 김으로 재료를 다 감지도 못한 채 끝났다. 2차 시도도 실패. 처참한 모양의 김밥이 두 줄, 아니 두 덩이가 나왔다. 버릴 수 없으니 일단 먹으면서 심기일전하기로 했다.


김밥 두 덩이를 먹고 배가 부른 덕일까. 3차 시도에는 진전이 있었다. 우선 김이 제대로 말리긴 한 것. 하지만 중간이 터지고 말았다. 김밥 옆구리 터진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김을 한 장 더 꺼내서 수선을 시작했다. 터진 부위에 김을 한 장 잘 붙이면 그럴듯하게 될 것 같다는 초보자의 착각. 뭔가 이상했다. 말면 말수록 김밥은 깔때기 모양이 되어갔다.


결국 세 번째 김밥은 저녁에 먹기로 하고, 4차 시도에 돌입했다. 비록 김밥 속이 느슨한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드디어 아슬아슬하게 성공했다. 완성된 김밥은 점심을 거르고 일하고 있을 아내에게 가져다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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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 편하다고 만들기도 쉽다는 보장은 없는데, 과거 내 인생은 늘 이런 식이었다. 보기 좋은 결과물만 보고 과정을 쉽게 보는 태도. 그래서 늘 무모한 줄도 모른 채 도전하고 실패의 쓴맛만 보다가 결국 포기하기를 반복했다.


대략 열다섯 해 전에, 전문직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다. 이유는 해당 전문직 시험에 합격한 선배의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는 게 일차적인 계기였다. 물론 그 선배가 합격했으면 나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오만도 한몫했다. 약 삼 년을 두문불출했던 선배의 고통스러운 시간이 당시 나의 눈에는 보이질 않았다. 누군가가 이룬 일이 쉬워 보인다면, 사실 그가 고수라는 의미일 텐데 말이다. 결국 나는 낙방과 고립된 수험 생활의 여파로 꽤 오랫동안 우울증과 무기력증, 그리고 대인기피증과 싸워야 했다.


무너진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는 글쓰기가 큰 역할을 했다. 글쓰기는 마음속 그늘에 볕이 들게 하는 작업이었다. 하루는 옆구리가 터져버린 김밥처럼,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이 의식의 흐름대로 쏟아지기도 하고, 어떤 날은 잘 말린 김밥처럼 가지런하게 정제된 글로 여과된 마음을 써 내려가기도 했다. 차곡차곡 글을 쌓는 동안 일상이 돌아왔고,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며,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언젠가 1인 출판사를 운영하며, 글 쓰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것. 기왕이면 글이 쓰고 싶은 많은 사람과 함께 가고 싶다는 것.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 축적의 시간을 충분히 주겠다는 것.

그렇게 지금은 숙성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의 첫 김밥을 먹은 아내는 맛있다고 했다. 정확히는 내 남편이 만들었는데 왜 맛있지, 하는 반응에 가까웠다. 연신 맛있다를 연발하다가 한 조각 먹어보라며 젓가락을 건네는데, 이미 터진 김밥 두 줄을 먹어서 배가 부르다는 말로 나는 거절했다. 맛있게 먹는 아내를 보니 흐뭇함이 밀려왔다. 만드는 고생은 그렇게 다 잊히는 듯했다.


이거 다 하는데 얼마 들었어?


아내의 질문에 곧장 현실로 돌아왔다. 45,000원에 두 시간 넘게 걸렸다는 말이 쉽게 나오질 않는 걸 보니, 오늘의 달콤한 결과물보다는 처절했던 과정이 깊게 각인된 듯했다. 아내는 또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답을 하지 못했다. 씻고, 썰고, 볶고, 말고, 자르고, 포장하고, 치우는 과정을 복기하니, 정신이 아득했다. 생각 좀 해보겠다며 말을 얼버무리며, 요리 초보 남편의 김밥 말기 대환장 파티는 일단락되었다.


다음 날 점심, 자주 가는 김밥집에 들렀다. 사장님은 치즈 김밥 한 줄을 순식간에 내놓았다. 역시 고수의 김밥은 패스트푸드다. 물론 아무리 고수라 하더라도 재료 준비 과정은 만만치 않았을 테다. 김밥에 들어간 재료를 세어보니 아홉 가지였다. 한 줄에 4,500원.


아무래도 김밥은 사 먹는 게 맞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직접 요리해서 먹겠다는 것 자체가 욕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요리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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