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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로 요리를 배웁니다.

멘토의 의미

by 사이의 글

곰취를 살짝 데쳐 찬물에 헹군다. 열기가 식으면 한껏 머금은 물기를 손으로 짠다. 너무 세게 짜면 나물의 식감이 죽으니 적당히 눌러야 한다. 초보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단어, 적당히. 어느 정도가 적당히 인지는 경험으로 알 수 있을 뿐이라서, 나 같은 초보자에겐 대충 하라는 말이 되고 만다. 볼에 담긴 곰취 위에 간장을 적당히 넣고, 참기름도 살짝 두른다. 다진 마늘도 조금 넣고, 깨를 솔솔 뿌린 후 오른손으로 살살 무친다. 취나물이 완성됐다. 고소하고 향긋한 나물향이 입맛을 돋우는 것을 보니, 다행히 '적당하게' 잘 무친 듯하다. 그 자리에서 한 입 먹어본다. 응? 뭔가 다른데.


김밥으로 집밥 만들기에 대한 용기를 잃은 뒤, (4장) 퇴원한 아내를 위해 연어장을 만들고 (5장) 심기일전해서 기본적인 나물부터 다시 만들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벌써 간을 못 맞추다니. 요리 초보의 집밥은 시작부터 어렵다.


나물에는 보통 국간장을 쓴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물론 진간장을 써도 되지만, 맛이 달라지니 고려해서 써야 한단다. 아. 둘이 다르구나. 그제야 간장 라벨에는 국간장, 조선간장, 양조간장, 진간장처럼 다양한 이름이 붙는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는 진간장 밖에 없었고, 초보자에겐 그 간장이 그 간장일 따름이었다.




'간장 사용법 한 방에 끝내 드립니다.' 그즈음 내 고민을 엿들은 알고리즘이 유명 셰프의 유튜브 영상을 피드에 올려주었다. 유튜브는 이미 엄청난 레드오션이다. 국가대표 출신의 운동선수가 운동 노하우를 알려주면서 개인 생활도 공개하고, 의사가 건강 정보를 알려주면서 먹방도 찍고, 회계사가 기업 분석을, 정치외교학 박사가 시사를, 물리학 교수가 과학을, 보컬 트레이너가 노래를, 미슐랭 쓰리 스타 셰프가 요리 이야기를 하는 곳이 지금의 유튜브다. 콘텐츠 경쟁의 시대. 배우고자 하는 이에겐 참 좋은 세상이다.


곧바로 스타 셰프의 간장 강의를 들었다. 각 간장 별로 간단한 설명을 나열해 주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영상 속 요리사는 더 근본으로 들어가 메주를 띄우는 것부터 이야기했다. 볏짚에 대롱대롱 매달린 메주가 두 달 정도 지나면, 곰팡이가 붙으면서 발효가 된다. 그 메주를 소금물에 담근다. 다시 두 달이 지나면, 소금물은 간장이 되고, 메주는 된장이 된다. 메주는 꺼내서 된장으로 만들고, 간장이 된 소금물은 천에 걸러서 다시 항아리에 담아 숙성을 시킨다. 이 숙성 기간에 따라 국간장 (조선간장), 중장, 진장이 되고, 시간이 오래 흐를수록 처음 물에 넣었던 소금은 점점 결정이 되어 가라앉는다. 다시 말해서 첫 간장인 국간장이 가장 짜고, 숙성 기간이 긴 중장과 진장은 짠맛이 줄면서 단맛이 깊어진다. 여기에 공장에서 나오는 양조간장의 제조 방식, 그리고 우리가 자주 쓰는 진간장의 특징까지 그는 꼼꼼하게 알려주었다.




요리를 해보겠다고 다짐했을 때, 멘토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동안 살아오면서 경험한 모든 일에서 멘토를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진학, 취업, 연애, 결혼, 사업, 가장 가까이는 글쓰기까지. 이것부터 시작하라고, 어느 방향으로 가라고, 어렵게 느끼지 말라고 누군가 말해준다면 출발선 앞에서 한참을 주저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런 나에게 유튜브는 닫힌 문 틈으로 스며든 봄바람처럼 출구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이제 우리는 멘토를 손바닥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멘토는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에 나오는 인물, 멘토르가 어원이다.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는 큰 문제에 봉착한다. 아버지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으로 집을 비우자, 지역의 남자들이 오디세우스의 아내이자 텔레마코스의 엄마에게 구혼을 하며 집을 차지한 것이다. 당시 문화가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구혼자들은 구혼을 거부하는 텔레마코스의 어머니를 압박하며, 집을 차지하고 먹을 것을 축내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 어쩌면 구혼은 핑계일 뿐이고 고향의 왕이었던 오디세우스의 재산을 탐하는 것이 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텔레마코스는 기도한다. 어서 아버지 오디세우스가 돌아와 저 구혼자들을 쫓아내게 해달라고. 그때 오디세우스의 친구, 멘토르가 텔레마코스에게 찾아와 해야 할 일을 알려준다.


구혼자들에게 돌아가라고 공개적으로 말해라.
그리고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러 떠나라.


아직 소년인 텔레마코스가 두려워하자, 멘토르는 이렇게 말한다.


어린애 같은 생각은 하지 마라. 그럴 나이는 지났다. 용기를 내라.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 멘토의 역할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요리를 차근차근 원리부터 알려주는 셰프처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멘토는 스마트폰으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게 독려하는 멘토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용기까지 주는 이를 원하는 것은 욕심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일에 그만큼 열정을 쏟아주는 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인생의 멘토는 나 자신이기도 해야 한다. 삶을 변덕스럽게 만드는 과제를 두려워하지도, 회피하지도 말라고. 당당히 마주해서 하나씩 풀어가라고. 스스로를 계속해서 일으키는 것은 나의 몫으로 만들어야 한다. 정보는 타인에게 얻기 쉬워도, 용기는 타인에게 얻기 어려운 법이니까.


그런 의미로 포기하지 않고, 취나물을 다시 무쳤다. 곰취를 살짝 데쳐 찬물에 헹군다. 열기가 식으면 한껏 머금은 물기를 손으로 짠다. 너무 세게 짜면 나물의 식감이 죽으니 눈치껏 누른다. 볼에 담긴 곰취 위에 '국간장'을 적당히 넣고, 참기름도 살짝 두른다. 다진 마늘도 조금 넣고, 깨를 솔솔 뿌린 후 오른손으로 살살 무친다. 완성. 고소하고 향긋한 나물향이 입맛을 돋우는 것을 보니 '적당하게' 잘 무친 것 같다. 한 입 먹어본다.

짜다.

'적당히'는 언제 맞출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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