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2
2.1
날씨가 좋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다만 햇살이 뜨거웠다. 오경수 박사는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길가의 나무들이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 너무 아름답다.” 오경수 박사는 차 안에서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말했다. 옆에서 그것을 듣고 있던 김정훈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할 뿐이었다. 차창 밖으로 노랗고 빨간 잎들이 햇볕에 반짝이면서 무심하게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속도를 조금 줄여줘.” 오경수 박사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차 창 밖으로 지나치는 모든 장면을 하나하나 감상하면서 보고 싶은 눈빛이었다. 최근 그녀는 이성과 감정의 밸런스를 조율하지 않았다. 평생 동안 감정을 억누르는 호르몬을 사용하여 이성을 극대화시켜 사용해 온 그녀로서는 죽기 전에 해본 마지막 일탈이었다. 그리고 일탈은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미 평생을 이성 위주로 살아온 그녀로서는 감정 억제 호르몬 주사를 맞지 않아도 감정이 이성을 앞지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했다. 지구상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기 몇 시간 전이었다. 오 경수 박사는 감정이 조금씩 요동치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이미 그곳에는 제이와 유미가 와 있었다. 그들은 오 경수박사와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 시간을 냈다. 제이는 어머니를 위해서 자신이 쓴 작별의 편지를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읽어 드리고 싶었다. “벌써 왔구나. 고맙다.” 제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오 경수박사의 가족 일행이 약속된 병실로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의사와 간호사가 그들을 맞이했다. “자, 가족들이 다 오신 건가요? 그럼, 오늘 일정을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서로 이별의 시간을 가지세요. 시간은 충분합니다. 그리고 여기 벨을 눌러 주시면 제가 오겠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모인 곳에서 제가 약을 투여할 것입니다. 약을 투여하면 10분 이내에 평화롭게 잠들 것입니다.” 의사는 빠르게 설명을 마치고 간호사와 함께 방을 나갔다. 빠르고 간결한 설명이었다. 듣고 있던 오경수박사를 비롯한 가족들은 말없이 굳은 표정을 하고 모두 자기들만의 생각에 감겨 있었다.
방안 가운데 탁자가 있고 해바라기 꽃이 한아름 꽃병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탁자 주변에는 푹신한 소파가 둘러앉기 좋게 놓여있었다. 그리고 안쪽으로는 유리벽으로 된 방안에 침대가 있었다. 그 침대는 얼마후면 오 경수 박사가 누워서 세상을 떠나는 장소가 될 것이다. 제이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게 했다. “여기서 저희와 이야기를 하다가 어머니가 준비가 되면 말씀하세요.” 제이는 어머니 옆에 자신도 앉으면서 유미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유미와 아버지도 맞은편에 있는 일인용 소파에 각각 앉았다. 제이는 양복 주머니 안쪽에서 편지를 꺼냈다. “제가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어왔는데 먼저 읽어드릴게요. 그동안 어머니께 드리지 못한 말들을 적어봤어요.” 누구보다 제이는 적극적으로 어머니와 대화를 이어갔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침착하게 자기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그의 장점이자 어쩌면 잘 훈련된 이성의 힘일지도 몰랐다. 오 경수 박사는 그의 아들 제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의 삶이란 유한한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도 막상 그 유한함이 자신에게 다가오면 일단 부정하게 된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고 그러므로 인간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 경수 박사는 결국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 앞에서 자신이 더 살 수 없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운명에 대한 겸허한 받아들임의 의미로 슬픔을 느꼈다. 제이는 천천히 자신이 써온 편지를 읽었다. 모두 침묵 속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제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나아 보였다. 제이는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서 해주었던 일들 중에 기억나는 일들과 감사한 일들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듣는 오경수박사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고 있었다. 잠시 후 제이는 편지를 다 읽었다. 조용한 침묵 속에서 몇 초가 흘렀다. 그리고 결국 오 경수 박사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옆에 있던 정훈과 그의 아들 제이는 그것을 놀라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평생 동안 한 번도 남편이나 자식 앞에서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없던 오경수 박사였다. “어머니, 혹시 아픈데라도 있으신 건가요?” 제이가 물었다. “아니.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 창밖을 좀 더 바라보고 싶구나. 혼자 있고 싶다. 모두 잠깐 나가줬으면 좋겠어.”
오 경수 박사는 가족들이 나간 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 더 이상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고요함 가운데 감정이 잦아들었다. 오경수 박사는 이런 식으로 감정에 휩싸여 평생을 살았더라면 자신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밖에서 정훈과 제이는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평생 동안 눈물 흘리는 것을 보인적 없던 사람이 죽음을 앞에 두고 흘리는 눈물을 보고 놀라고 있었다. “이제 그만 어머니한테 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확실히 감정이 많이 올라와 있었어요. 어머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죠?" "별일 없을 거다." "하지만 이성이 마비된 거 같아 보였어요." "요즘 감정시술이나 감정 억제제를 사용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 "그렇다고 설마 어머니가 이성을 잃으신 줄은 몰랐어요.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정해진 수순인데 슬픔을 느끼시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제이는 유미 앞에서 너무 감정적인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 것이 창피하게 느껴졌다.
가족들이 다시 방으로 돌아오자 오 경수 박사는 천천히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한 번씩 포옹을 했다. 그리고 제이에게는 그녀가 찾은 오래된 일기장을 넘겨주었다. 모든 그녀의 흔적들이 디지털화되어 남아 있겠지만 그녀의 생각과 일상이 그녀의 손으로 쓰인 오래된 일기장은 특별히 남겨주고 싶었다. 그녀는 이제 편안히 잠이 들 수 있도록 침대에 누웠다. 누워서 보는 창밖의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다. 그러나 이제 아까보다는 감정의 요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제이는 옆에서 어머니가 준 일기장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의사를 불러요.” 오경수 박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훈은 오 경수 박사의 요청대로 그녀의 죽음에 조력을 해 줄 의사를 불렀다. 잠시 후 의사와 간호사가 한 명씩 방으로 들어와 그녀의 권리를 설명해 주고 확인 사인을 받은 후 그녀의 팔에 주사를 놔주었다.
오 경수박사가 택한 선택은 너무나 간단하지만 위대한 선택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절제 함으로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불과 1세기 만에 세계에 정착된 죽음의 선택권리와 조력 서비스가 가져온 인류의 변화는 엄청났다. 가장 이상적인 연령별 인구의 분포가 유지되었으며 식량과 에너지 난을 줄였다. 또한 불필요한 국가 간의 경쟁을 줄임으로 세계가 하나의 국가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오 경수 박사는 말없이 조용히 잠들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지켜보는 정훈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오경수 박사가 그리워했던 그녀의 둘째 아들 윤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2.2
제이는 회사에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일을 하려고 책상에 앉으면 여러 가지 생각이 몰려왔다. 제이는 이제까지 한 번도 감정에 흔들려서 일을 못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너무 많은 새로운 일들이 그에게 일어났다. 그 일들은 그에게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그의 이성이 흔들리게 만들었다. 제이는 전과 같이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인간이 감정을 제어하는 호르몬 시술을 받았다고 해서 감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감정이 순간적으로 폭주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것은 울음이나 웃음을 절제하게 만들고 반드시 생각한 후에 웃고 울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줬다. 제이는 일을 멈추고 어머니가 건네준 오래된 일기장을 읽었다. 자신의 나이만큼 오래된 일기장은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시대의 이야기였지만 어머니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완벽한 2세를 위해서 나름대로 유전자 분석을 통해서 최고의 파트너를 찾아 결혼을 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았지만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환경이 아이를 키우는데 최적의 환경일까 고민하는 어머니의 여러 가지 고민들이 일기장에 적혀 있었다.
이제 제이도 얼마 지나면 자식을 낳게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가장 이상적인 나이에 가장 이상적인 유전자를 갖고 있는 여자와 결혼을 했다. 지금의 시대는 제이가 태어났던 삼십 년 전과는 다르다. 이제는 아이들이 갖고 있는 유전자의 발현을 위한 최적의 환경을 시스템화해서 아이들을 맞춤으로 양육해 준다. 제이는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보인 눈물을 보고 난 후부터 고민이 생겼다. 제이는 왜 일을 해야 하고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의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인간이라면 언젠가 한 번은 느끼게 되는 삶의 지루함이나 공허함이 어머니의 정해진 죽음을 직접 대면하고 생겨났다. 그는 스케쥴러를 켜고 감정시술 예약 날짜를 앞당기려고 스케줄 조정을 신청했다. 다행히도 예약 변경이 바로 이루어졌다. 감정시술은 삶에 대한 애착을 높이고 알게 모르게 쌓여 있는 감정의 찌꺼기를 배출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는 아직까지 감정시술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춘기를 지나면서 오는 삶의 공허함이나 무의미함에 대한 극복을 위해 십 대부터 감정시술을 받았다.
“오늘이 지나면 좀 나아질 거야.” 제이의 주치의 한 주영박사는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제이에게 말했다. “난 심각하다고. 이틀정도 일에 집중을 할 수 없었어. 전혀 일을 할 수가 없었어. 아무래도 내 이성이 전과 같이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고.” 제이는 다시 한 박사를 향해서 외치듯이 조금 더 큰소리로 말했다. 화면에 보이는 한 박사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답했다. “자, 여기에 보이는 너의 바이탈 사인들은 다 정상이야. 이제까지 너는 너무 완벽하게 이성이 잘 작용하고 있어서 못 느꼈지만 다른 사람들은 많이 느끼는 일이야. 감정 조절 호르몬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이성이 마비된 것도 아니야. 단지 새로운 감정을 느낀 것뿐이니까 걱정하지 마. 익숙해지면 무뎌질 거야. 그리고 내일 감정 시술을 받아보면 달라질 거야. 가벼운 운동을 하던가 해. 기분 전환이 될 거야. 지금 내가 내리는 처방은 밖으로 나가서 딴 일을 해보라는 거야. 그럼 난 바빠서.” 한 주영 박사는 모니터에서 사라졌다. 제이는 한 박사의 조언을 듣고 나서 모니터 화면을 서둘러 끄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항상 미리 정해진 일정으로 하루를 보냈다. 오늘과 같이 일정에 없는 일을 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이 일상적이지 않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막상 회사를 나오자 제이는 갈 곳이 없었다. 집으로 일찍 돌아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보러 가고 싶지도 않았다. 유미가 일하는 곳에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일하는 사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문득 준호의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행방불명되고 나서 한 번도 그의 집에 가서 그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한 적이 없었다. 준호도 자신처럼 뭔가 새로운 감정을 느끼고 충격을 받아 집에 칩거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준호의 변호사가 그와 취할 수 있는 연락을 다 해봤으므로 그가 집에 없을 확률이 더 높았다. 하지만 그는 준호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준호를 찾아보고 싶었다. 제이는 무작정 준호를 찾아보려는 생각으로 준호의 집으로 향했다. 며칠 만에 처음으로 뭔가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 것이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들었다. 그는 준호의 집으로 가는 도중 준호의 변호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가 준호의 흔적이라도 찾으러 준호의 집에 들어가겠다는 메시지에 변호사는 바로 준호를 대신하여 본인이 허가를 하겠다고 답을 보내왔다. 제이는 자신이 왜 여태까지 준호를 찾으려고 시도조차 안 했는지 스스로에게 의아했다.
준호의 집은 시내에서 북쪽으로 1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산 위에 있었다. 2군 지역과의 경계가 되는 지점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주변은 집들이 듬성듬성 있어서 조용하고 한적했다. 처음 방문한 것은 아니지만 오래전에 와본 곳이라 낯설었다. 높은 벽으로 둘러 쌓인 집은 겉에서 보기에는 작은 성처럼 보였다. 담 안에 둘러싸인 집을 밖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제이는 준호의 변호사가 알려준 대로 집의 출입구에서 암호를 넣고 보안체계를 풀었다. 거대한 대문이 잠시 후에 부드럽게 좌우로 열렸다. 제이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준호의 집으로 들어갔다. 대문 안의 풍경은 숲 속같이 나무들이 좌우로 펼쳐져 있고 정면에 집의 입구가 보였다. 겉에서 보는 것보다 안은 훨씬 더 나무가 많이 우거지고 넓었다. 아주 오래전 준호가 이곳에서 회사의 투자 설명회를 연 적이 있었다. 그때는 회사 초창기라 수익보다는 투자가 더 많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집은 엄청나게 넓었다. 제이는 넓은 정원을 지나 현관문으로 걸어가면서 준호가 왜 회사 운영자금도 모자라는 회사 초창기부터 이 큰 집을 샀는지 궁금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센서는 게스트의 몸전체를 스캔했다. 센서는 문 앞뿐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스트의 바이오 데이터를 최대로 모으는 것으로 추측되는 여러 개의 센서들이 마당이나 집의 지붕등에서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 집을 오분만 돌아다니면 내 모든 바이오 데이터를 이 집이 수집해서 갖고 있겠군.’ 제이는 살짝 불쾌함을 느끼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정면으로 보이는 커다란 시계와 거실의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책꽂이에 눈길이 갔다. 제이는 천장이 높은 거실의 책들을 흩어보면서 준호의 관심사가 참으로 다양하다는 생각을 했다. 책꽂이가 있는 면의 양쪽으로는 유리로 된 벽면이 보였고 한쪽은 멀리 산이 보이고 한쪽은 나무가 많은 정원이 보였다. 거실을 지나 짧은 복도를 지나면 다른 건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거실이 있는 건물이 게스트들이 왔을 때 파티를 하는 곳이라면 옆 건물은 준호가 머무는 공간이었다. 제이는 안쪽으로 준호의 공간으로 들어가서 준호가 남긴 단서를 찾고 싶었다. 복도를 지나자 출입문에서 다시 몸 전체를 스캔했다. 물론 준호의 변호사가 제이에 대한 보안 해제를 이미 해놓아서 출입문은 잠시 후 바로 열렸다. 처음 들어갔던 거실보다 훨씬 더 넓은 연구실 같은 방이 나왔다. 정면으로는 벽면에 모니터들이 대충 세어도 십여 개가 달려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컴퓨터 시스템을 제어할 수 있는 터치패드와 음성인식 시스템이 있는 커다란 책상이 있었다. 제이는 눈에 보이는 책상 앞에 앉아서 의자를 돌려 반대 편을 보았다. 들어온 출입문 외에 위층과 아래층으로 가는 계단입구가 보였다.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양쪽의 유리벽에서 보이는 외부의 모습은 거실에서 봤던 모습과 같았다. 그렇지만 이 방은 뭔가 더 서늘하고 어두웠다. 조명이 그랬고 방 안의 공기가 그랬다. 제이는 다시 모니터 쪽으로 의자를 돌려 앉았다. 주인이 떠나간 컴퓨터들은 모두 조용하게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제이가 음성인식 시스템의 마이크를 두드리자 시스템이 반응했다. 비밀번호를 대고 지문인식기에 지문을 스캔하라는 설명이 흘러나왔다.
제이는 잠시 망설였다. 준호의 변호사에게 컴퓨터 접근 권한도 받을 수 있는지 연락을 해보던가 아니면 포기하던가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제이가 잠시 망설이고 앉아 있을 때 다시 같은 명령이 흘러나왔다. 제이는 게스트로 접속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시스템에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의외였지만 제이는 설명에 따라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만들었다. 잠시 후 제이는 준호의 컴퓨터에 들어가게 되었다. 컴퓨터 안에 모든 파일들과 프로그램에는 접근 권한에 제한이 전혀 없었다. 어쩌면 준호는 누구든지 자신의 컴퓨터에 접속하기를 바랐던 것처럼 모든 파일들과 프로그램들도 보기 쉽게 정리되어 있었다. 제이는 시스템에서 가장 최근에 준호가 접속한 파일들을 찾았다. 제이는 대충 눈에 띄는 파일들을 열어 보았지만 별다른 특이한 점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 이제까지 준호가 해오던 일과 관련된 논문 자료나 분석 자료들이었다. 혹시 일기장 같은 것은 없는지도 살펴보았으나 문서 파일은 대부분 유전자 분석 관련 일에 대한 것이었다. 제이는 한동안 생각보다 별 다른 게 없는 컴퓨터 파일들을 뒤적거렸다. 그러다 순간 왜 이렇게 많은 모니터들이 있는지가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단순히 문서 작업을 하고 유전자 분석 관련 일을 하는데 이렇게 많은 모니터는 필요하지 않았다.
제이는 컴퓨터 안의 프로그램들을 흩어보기 시작했다. 넥스트도어라는 프로그램을 눌러보았다. 회사에서 공급하는 사역 침팬지들의 임상 실험을 모니터링할 때 자주 쓰는 프로그램이었다. 컴퓨터가 살며시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정면의 모니터에 화면이 떴다. 화면은 작은 창으로 여러 개가 나누어져 있었고 너무 작아서 어떤 화면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제이는 보이는 대로 작은 창 하나를 클릭했고 다른 모니터에 띄울 수 있었다. 화면에는 숲이 보였다.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줌을 할 수도 있었다. 줌인하여 보았으나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제이는 또 다른 창을 클릭해서 모니터에 띄었다.
화면에 들판이 보이고 그 안에 침팬지들이 보였다. 줌인을 해서 보니 침팬지들은 밀밭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 것 같았다. 제이의 회사에서 유전자 분석을 통해 새로운 조합으로 개발된 사역 침팬지를 훈련하는 농장이었다. 제이는 다른 창을 또 띄었다. 침팬지들이 무리를 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줌인을 해서 보니 서로 소리를 지르고 싸움을 하는 게 보였다. 제이의 회사에서 개발하는 침팬지들은 야생성이나 포식자로서의 난폭함을 유전자에서 제거한 침팬지들이었다. 화면에 보이는 침팬지들은 특별히 더 공격성이 나타나는 변이들이었다. 아무래도 준호가 개인적으로 임상실험을 하는 침팬지 같아 보였다. 제이는 당장 내일 회사에 가면 현재 개발 진행 중인 사역 침팬지 품종들의 리스트를 뽑아서 체크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이는 준호의 컴퓨터에 있던 연구 논문과 관련자료를 자신의 클라우드 공간에 복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면에 나오는 실시간 모니터링이 되는 침팬지 농장의 장소들을 특정하기 위해서 화면이 전송되는 곳의 GPS 데이터도 캡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