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S Sep 21. 2024

감정을 다스리는 이성

2.3-2.5

2.3

이영은 조금씩 클럽 생활에 익숙해졌다. 주사장은 이영이 술이나 마약에 중독되지 않은 유일한 직원이기에 그녀를 특별 대우해 줬다. 그것은 이영을 배려해서라기보다는 주사장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주사장이 약이나 술에 취하기 전에 이영에게 클럽 일을 지시해 놓으면 이영은 일을 모두 처리해 놓았다. 클럽 일은 단순해서 예약된 손님을 제대로 받기만 하면 됐다. 그 외에 폭력이나 살인이 종종 일어나면 경찰을 부르는 것이 다였다. 이영은 처음에는 리셉션 카운터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일을 배우다가 요즘은 점점 자신도 서비스 종업원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손님들과 함께 술이나 마약을 하지 않으면 서비스 종업원을 되기는 힘들었다. 

 

이영은 클럽이 오픈하면 초저녁에는 손님을 맞이하고 그 후에는 감시카메라를 통해서 방의 상태를 관찰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중독자들은 자신에 대한 통제력이 떨어져 간혹 기분이 너무 고조되어 폭력을 행사하거나 기물을 부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 미리 모니터링을 해서 경찰을 부르는 게 큰 사고를 방지하는 방법이고 주사장의 비즈니스에 손실을 덜어주는 길이었다. 하지만 폭력이나 살인 사건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았다. 폭력이나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어떤 구제도 없이 즉시 제4 구역으로 추방되었다. 그러므로 폭력성을 가진 사람들은 제3 구역의 유전자 풀에서 점차적으로 제거되어 갔다. 결국 충동적이지만 힘없고 온순한 중독자들이 주로 단골손님으로 클럽에 드나들었다. 이영은 단골손님들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그들이 선호하는 술과 마약 그리고 종업원도 기억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물려준 가장 좋은 유전자 중에 하나는 암기력이었다. 연극을 오랫동안 해온 집안의 내력으로 인하여 이영은 다른 것은 몰라도 기억력과 얼굴 표정을 짓는 것은 남들보다 뛰어났다. 이영은 주사장과 제니퍼에게 기억력이 좋다는 칭찬을 수시로 받을 수 있었다. 


이영이 예약자 명단과 종업원 명단을 보면서 클럽 오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클럽 입구 모니터 화면에 처음 보는 사람의 모습이 나왔다. 이영의 기억에 그 남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입구의 보안 시스템은 그의 얼굴을 스캔해서 고객 데이터 베이스와 매칭했다. 그가 고객이 아니라고 분류하고 신원을 확인하는 질문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영은 남자가 이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사람인 것을 한눈에 알아챘다. 옷도 그렇고 반짝이는 눈빛도 중독자들이 사는 3 구역의 사람과는 달랐다. 이영이 이 새로운 남자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까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보안 시스템은 남자에게 계속 질문을 했고 남자는 호출 벨을 눌렀다. 그러자 바로 주사장이 카운터로 왔다. 이미 주사장은 방에서 입구의 보안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을 보다가 나온 것이다. “저 사람은 내가 아는 경찰이야. 문을 열어줘요.” 이영은 입구의 문을 열었다. 잠시 후 보통 사람보다 키가 훨씬 크고 골격도 탄탄해 보이는 이수현경감이 들어왔다. 주사장은 그의 앞에 서서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했다. “사고나 고발도 없는데 경감님이 갑자기 오시니 보안시스템이 경감님을 못 알아보고 오작동을 하네요. 어서 오세요.” “시스템 문제인가요? 혹시 내가 들어오는 걸 일부러 막은 건 아니고요?” “그럴 리가요. 저는 불법적인 사업은 하지 않습니다. 경감님이 오시는 걸 막을 이유가 없어요. 아시잖아요.” 


“좋아요. 그렇게 믿도록 하지요. 오늘 주사장님하고 잠시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요. 근데 이분은 처음 보네요. 새로운 직원인가 봅니다.” 이수현경감은 이영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흩어 보았다. 이영도 그 눈빛을 느꼈다. “네, 맞습니다. 이영 씨 인사드려요. 이수현경감님이셔.” “안녕하세요? 이영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이영이라고 했나요? 이름이.” “네. 맞습니다.” “음, 특이한 이름이네요. 다음에 혹시 제가 오면 시간 끌지 말고 입구 문 좀 열어주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음에는 바로 열릴 겁니다. 이영 씨의 기억력은 컴퓨터보다 좋거든요. 이야기는 제 방으로 가서 하시죠.” 주사장은 서둘러 이 수현경감을 데리고 자기 사무실로 돌아갔다. 이영은 그 남자가 경찰관이라는 사실이 별로 기분이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나 자신의 이름을 들었을 때 뭔가 생각하는 표정을 짓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더구나 주사장은 이영이 그 사람과 오래 대화하는 것을 원치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영이 그런 것에 신경 쓸 틈도 없이 출근하는 종업원들이 계속 들어왔다. 이영은 그들의 예약 손님 내역을 확인해 주느라 곧 정신없이 바빠졌다.


주사장의 방에서 이 수현 경감은 최근 이곳에 온 손님들에 대해서 묻고 있었다. “여기서 중앙정부에서 허가하지 않은 마약이나 술을 판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얼마 전 정기 건강검진에서 특이한 성분이 발견된 사람들의 공통점은 주클럽에 다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죠.” “경감님, 누가 그런 소릴했는지 몰라도 특이한 성분이 뭔데 그러시는 건가요? 저희는 허가된 술과 마약만 팔았습니다. 원하시면 현재 손님들이 마시고 있는 술과 마약을 가져가서 다 검사해 보셔도 됩니다.” 주사장은 이 수현 경감을 바라보면서 강한 부정의 표정을 해 보였다. “출입구가 저기 정문 말고도 있겠죠. 아직은 어떤 사건과의 연계가 있어 보이지 않으니 철저하게 감시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을 꾸미는지 모르지만 당장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 이 수현 경감은 다소 딱딱한 말투로 말했지만 얼굴은 전혀 변화 없이 차분했다. 마찬가지로 그의 앞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주사장도 차분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오해십니다. 저는 돈 안 되는 일은 하지도 않고 불법적인 일은 더더군다나 하지 않습니다. 누가 그런 정보를 흘려 넣었는지 몰라도 모함입니다. 저 앞에 직원도 왜 뽑았는지 아세요. 저도 이제는 술도 마시고 약도하고 좀 즐기려고요. 제가 골치 아픈 일을 벌일 이유가 없잖아요. 경감님이 저를 오해하시니 섭섭합니다.” 이 수현 경감은 주사장의 긴 설명이 다소 지루한 듯이 그의 얼굴을 보다가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근데 정말 저 앞에 이영이라는 직원은 이 클럽이랑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던데 어떻게 구한 건가요?” 


그때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주사장이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문이 열리고 이영이 들어왔다. 이영에게는 항상 문을 두드리고 바로 열고 들어오는 게 자연스러운 순서인 것 같았다. “사장님, 오늘 영업 준비가 끝났습니다. 오늘 영업 시작 오 분 전입니다. 혹시 오늘 제가 특별히 알아 두어야 할 사항이라도 있나요?” 이영은 마치 이 수현 경감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자신이 하던 대로 주사장에게 업무 지시를 받고자 했다. 주사장은 이영의 행동이 약간 당황스러웠다. “오늘 특별한 것 없으니까 가서 영업시작하세요. 필요한 것 있으면 나중에 다시 지시할게요.” 이영은 주사장의 지시를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영 씨, 잠시만요. 원래 무슨 일을 했었나요? 이런 일은 처음 해보는 사람 같아 보이네요.” 이 수현경감이 옆에서 이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제야 이영은 이 수현 경감이 있는 것을 의식했는지 눈을 한번 깜빡이더니 천천히 대답을 했다. “저는 연극배우였습니다. 그리고 바에서 바텐더로 일 년 정도 일한 적도 있고요. 제가 이런 일에 서툴러 보이나요?” “서툴러 보이기보다는 뭔가 여기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아서요. 연극배우라. 거의 멸종되어 가는 직업인데 특이하군요.” 이 수현 경감이 또다시 뭔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이영의 대답을 혼자 되뇌고 있었다. “사장님, 그럼 저는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이영은 더 이상 이수현 경감에게 취조당하듯이 질문을 받지 않기 위해서 서둘러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2.4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있는 곳이 의료원이었다. 제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감정 체험을 하기 위해 의료원의 감정 진료실에 들어갔다. 제이는 담당 의사가 누군지 어떤 치료를 받게 될지는 주치의 한주영 박사로부터 설명을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책상과 소파가 놓인 사무실에서 감정 체험 치료가 가능한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생각보다 몹시 어려 보이는 여자 의사가 들어왔다. 얼굴만으로는 도저히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수년간 경험을 쌓은 전문의라고 보이지 않았다.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의사는 손을 들어 말리면서 제이의 앞쪽 소파에 앉았다. “제 이름은 김수지입니다. 제이님의 감정체험 진료를 담당할 의사입니다. 먼저 오늘 받으실 감정 체험 치료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느끼고 표현하면서 살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이성이 극대화되어 감정의 발현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감정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가끔씩 발현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감정 그 차체로 느낄 줄 몰라서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니까요. 그래서 감정체험 진료를 통해서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는 법을 배울 겁니다. 그러면 어떤 감정을 느낄 때 어떻게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지 알게 됩니다. 즉 감정체험 시술을 받으시면 앞으로 감정을 느끼실 때 이성적인 대처를 하면서 당황스러워하거나 우울해하지 않을 겁니다. 혹시 질문 있으시면 중간에 해도 됩니다.”


“네, 주치의한테 감정 체험에 대해서 설명을 들어서 어떤 치료인지 잘 압니다. 그런데 치료실은 따로 없나요?” 제이는 쉬지 않고 말하는 김수지 박사의 말을 듣고 있다가 잠시 그녀가 말을 멈춘 사이에 궁금한 점을 물었다. “여기서 이렇게 마주 보면서 저와 대화를 하고 그다음에 대화를 바탕으로 진단을 내리고 처방을 합니다. 처방은 주로 영화나 연극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감정을 체험하게 됩니다. 자, 그럼 치료를 시작해도 될까요? ” 제이는 마주 보이는 의사의 눈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최근에 어떤 감정을 느끼셨는지 생각나는 대로 되도록 자세히 상황이나 느낌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한동안 집중이 되지 않아서 일을 잘 못했습니다. 어떤 감정인지 너무 복잡해서 설명하기 힘들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텅 빈 느낌이 들고 모든 일에 의욕이 없어졌습니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어도 집중이 되지 않아서 그냥 앉아 있기도 합니다.” “그런 느낌이 들 때 어떤 표정이 되는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제 표정이요?” “네.” “그때 제 얼굴을 거울로 보지는 않아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 혹시 눈물을 흘리지는 않으셨나요?”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주변분들이 얼굴 표정이나 행동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해준 적은 있나요?” “없습니다. 주로 혼자 있을 때만 그런 감정들이 드니까요.” “알겠습니다. 비교적 아직은 감정 통제를 잘하시고 계십니다. 표정이란 본능이죠. 아직도 우리 인간이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죠, 그런데 다른 사람이 최근 제이씨의 어떤 표정변화를 못 느꼈다면 아마도 아직은 감정통제를 잘하고 계신 것입니다. 혼자 있는 시간의 감정 통제가 안 되는 부분이 문제인데 일단 혼자 있는 방이나 사무실에 거울을 갖다 놓고 감정이 느껴질 때마다 본인의 표정을 잘 살펴보세요. 사진으로 찍어서 보셔도 됩니다. 그리고 다음 치료 때에는 저에게 알려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자료를 보니 제이님의 어머니가 얼마 전 돌아가셨군요. 죽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제이님의 삶도 유한하다는 사실을 경험한 것이 처음입니까?” “네, 처음입니다. 그때부터 일에 집중이 안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삶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받아들이면서도 가끔 직접 또는 간접으로 체험하게 되면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낍니다. 일에 집중이 안될 때 이런 생각을 해보세요. 인간의 삶은 유한하기에 의미 있고 그 안에서의 인간의 끝없는 도전들이 위대한 것이다. 아마 그렇게 생각하면 감정이 좀 달라질 겁니다. 자부심과 용기가 생길 겁니다. 다음 주에 만날 때 거울에서 본 자신의 표정에 대해서 더 이야기해 보죠. 이번주 진료는 여기까지입니다. 혹시 질문이나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이건 감정과 상관없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오래전에 행방불명이 된 동생이 생각났어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요즘 동생이 어디로 갔을까 하는 생각도 자주 합니다.” “동생이 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동생의 행방이 궁금한 건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동생이 생각날 때의 표정도 거울을 보고 관찰해 보시고 다음 주 진료 때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왠지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좋았습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제이는 소파에서 일어나서 병실을 나섰다.  


2.5

유미는 제이와 결혼을 하게 된 이후로 1급 시민이 되었다. 그것은 그녀보다는 그녀의 부모님이 만족해하는 일이었다. 이제 자신들의 자식 세대부터는 1급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자부심을 갖게 했다. 그러나 정작 유미는 자신이 1급 시민이 된 것에 대해 많은 변화를 느끼지는 못했다. 거주지가 1급 시민이 사는 지역으로 바뀐 것 말고는 하는 일이나 만나는 사람이 모두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음지 식물에 대한 취미도 그대로였다. 물론 좀 더 넓은 집에서 더 많은 음지 식물을 기르고 관찰함으로 음지 식물에 대한 지식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유미는 임신을 하게 된다면 직장을 관두고 아이를 키우면서 음지 식물에 대한 연구를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닷속에서 산소를 추출해서 육지의 대기 중으로 운반하는 공기정화 시스템의 엔지니어를 하고 있지만 그녀의 관심사는 산소를 만들어 내는 식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연구 욕심은 아직 욕심일 뿐이었다. 그녀는 결혼한 지 한 달 여가 되어가지만 임신을 위한 어떤 단계도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미는 제이가 감정체험 시술을 마칠 시간을 기다려서 제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저녁에 집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제이는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알겠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유미는 제이의 즉각적인 답변에는 만족했지만 그의 답변이 항상 너무 예상가능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면서 그것이 2급 시민과 1급 시민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3급 시민이면 몰라도 1급 시민이나 2급 시민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서 사람을 만나고 2세를 계획하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유미는 그런 감정이 얼마나 시간을 소모하고 비이성적인 판단을 내려서 인간의 삶을 망쳐왔는지 역사시간에 배워서 잘 알고 있었다. 유미는 자신의 자궁 안에 최고의 유전자 조합을 품을 수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결혼을 했다. 유미는 서둘러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그녀가 확인한 바로는 일주일 후에 유미는 배란일이고 그때를 맞추어서 제이와 같이 노력을 하면 올해 안에 임신을 할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올해가 유미에게는 임신 적정 기이고 다음 해부터는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서 임신 확률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왔다. 


유미는 집에 도착해서 그녀가 사랑하는 음지 식물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지하층으로 내려갔다.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한걸을 한걸음 내 디딜 때마다 음지 식물 특유의 흙냄새와 풀냄새가 조금씩 느껴졌다. 유미는 그 냄새를 크게 들이마시면서 미소를 지었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익숙하게 맡아오던 고향 같은 냄새였다. 그녀는 아침저녁으로 항상 모든 일과의 시작과 끝을 이곳에서 식물들과 했다. 특히 식물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느라고 그런지 처음에는 곧 말라죽을 것처럼 시들거렸다. 유미가 정성을 들여서 아침저녁으로 조금씩 물을 주고 영양제를 주면서 돌보자 곧 푸릇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식물들과 잡동사니 고물들 그리고 오래된 책이 보관된 책꽂이가 이제는 넓은 지하실에 서로 제법 잘 어울려 보였다. “오늘 잘 지내고 있었어?” 유미는 식물들을 둘러보면서 항상 그렇듯이 인사말을 건넸다. 조용한 지하층에는 유미의 말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유미는 벽에 붙은 모니터 쪽으로 가서 온도와 습도 그리고 조도를 확인했다. 벽의 옆면에 있는 조명을 밝히자 고서가 꽂혀있는 책장의 유리가 반짝이며 빛을 반사했다. 그때 유미는 저 책장의 고서들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아직 제이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오늘은 제이가 오면 책장이야기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유미가 식물들을 둘러보고 지하실에서 올라오자 제이가 거실에서 유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미는 자신이 식물들을 둘러보는데 너무 집중하고 있어서 제이가 집안으로 들어왔다는 알람이 십 분 전에 울렸지만 듣지 못했다. 제이는 거실의 소파에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유미가 지하실에 있는 것을 알았지만 제이는 그녀의 즐거움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기다렸다. 관심을 가지 돼 거리를 두고 다가가지 않는 것이 그가 유미를 대하는 사랑의 방식이었다. 제이가 집에서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배운 사랑의 방식이었다. “잠든 거 아니죠? 빨리 왔네요?” 유미가 제이가 앉아 있는 소파 쪽으로 다가오면서 조심스럽게 제이에게 말을 꺼냈다. 유미는 제이가 혹시 깊이 잠든 것이면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아, 오늘 병원 약속이 있어서 병원 갔다가 바로 집으로 왔어요.” 유미는 제이의 긴 속눈썹이 깜빡이는 눈을 보면서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자신의 남편이란 것이 새삼 기뻤다. “피곤한가 봐요. 오늘 처음 받는다던 감정치료는 어땠어요?” “첫날이라서 별거 없었어요. 근데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뭐죠? 궁금해서 빨리 들어왔어요.” 제이는 왼손으로 자신 앞에 아직도 서있는 유미의 오른쪽 손목을 잡아서 자신 옆에 앉으라고 끌어당겼다. 


유미가 자리에 앉자 제이는 고개를 돌려서 유미를 쳐다보면서 다시 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 해봐요.” 제이는 유미를 보고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유미와의 대화에 시간을 많이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2세는 언제 가질 건가요?”  “음, 그 문제는 좀 더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예상치 못하는 감정이 생겨서 오늘 막 감정 치료를 시작했잖아요. 감정치료를 다 받고 제 상태가 나아지면 그때 갖도록 해요. 늦어도 올해는 넘기지 않을 거예요. 우리 2세를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가 올해니까요. 그리고 나는 우리의 2세가 최고의 환경에서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물론 유전자로는 최상의 조합이겠지만 태아가 만들어지는 환경도 중요해요.” 제이의 눈은 유미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란 눈과 긴 속눈썹 그리고 낮은 목소리의 제이의 말은 유미의 귀뿐만 아니라 눈과 가슴으로 들어갔다. 유미는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제이의 말이 끝난 뒤에도 잠시 아무 말없이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알겠어요. 우리 2세의 계획에 대해서 당신과 대화를 하고 싶었어요.”  

이전 07화 넥스트도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