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9.7
9.4
“이 건물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건물이란다. 최고의 유전자를 가진 1급 시민만이 들어갈 수 있단다. 너랑 같이 들어가려고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오늘이 그날이 되었구나.” 건물 앞에서 김정훈은 윤이에게 설명했다. 건물의 입구에 좀 더 다가가자 출입구 관리 직원이 나와서 둘을 맞이했다. 직원은 둘 사이를 한 바퀴 돌면서 바디스캔을 끝냈다. “확인이 끝났습니다. 두 분 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직원이 말을 마치자 출입구의 문이 열렸다. 건물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정면에는 붉은 카펫이 깔린 높은 계단이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안내 데스크가 있었고 왼쪽은 작은 휴식 공간이었다. 김정현은 계단을 올라갔다. “우리는 이미 예약을 했으니 2층 로비로 가면 된다.” 윤이는 계단을 오르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특별한 건물 같아 보이는 것은 없었다. 엉뚱하게 가운데 계단을 만들어 놓고 붉은 카펫까지 깔아 놓은 게 윤이에게는 좀 어설픈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윤이의 생각은 곧 바뀌게 되었다. 계단을 다 오르자 원형으로 빙 둘러서 티타늄으로 만들어진 문들이 있었다. 단순하지만 그게 오히려 사람을 압도하고 있었다. 가운데 로비에는 직원이 있었다. 붉은 카펫은 로비까지 연결되어 있어서 사방으로 문이 둘러 쌓여있어도 일단 무심히 붉은 카펫을 따라 로비까지 걸어가게 되어있었다.
”환영합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 분은 가장 오른쪽 1번 문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로비의 직원은 정중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김정훈과 윤이는 직원이 알려준 대로 오른쪽의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이 열리고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작은 엘리베이터 공간 속에 두 사람이 들어있는 상황이 되었다. 잠시 후 문은 다시 열렸다. 문 앞에는 아까 로비에서 그들을 맞이했던 직원이 와있었다. “잘 오셨습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윤이는 옆에 있던 아버지인 김정훈을 돌아보았으나 김정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버지가 사라졌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일단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직원은 짧은 대답을 하고 자기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윤이는 직원을 따라갔다. 처음 건물에 들어왔을 때의 높은 천장과 반짝 거리는 대리석 바닥은 그대로였지만 사방의 벽은 모두 어두웠다. 오직 직원이 걷고 있는 곳만 환했다. 윤이는 그 직원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윤이의 머릿속에 있던 아버지에 대한 생각들과 이곳이 어딘지 하는 두려움이나 궁금증이 오직 앞에 비치는 빛을 따라 걷다 보니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온 사방이 환해졌다. 윤이가 눈이 부셔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그의 눈앞에는 하얀색 탁자와 그 뒤로 앉아있는 사람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차츰 눈을 더 크게 뜨고 사방을 둘러보자 탁자와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게 뚜렷하게 보였다.
“어서 오세요.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습니다. 환영합니다.” 누군가 그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둘러보세요. 원하시면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도 됩니다.” 윤이는 천천히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보고 아는 사람이 있는지 찾았다. 그가 서서히 고개를 돌리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의 어머니였다. “엄마.” 그가 소리 내어 어머니를 부르자 어머니의 얼굴은 더 또렷하게 보였다. 윤이는 어머니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컴퓨터 모니터와 여러 가지 책들이 쌓여있었다. 그가 하나의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책장이 넘어가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책을 들고 읽었다. 그것은 계속 반복되었다. 그가 어느 책 속에 펜을 들어 글을 적었다. 다시 그의 어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엄마.” 윤이는 그의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분명히 자신 앞에서 열 발자국도 안 되는 책상 앞에 앉아있었는데 그는 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생각과는 달리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 어머니는 돌아가셨는데. 그리고 내가 어머니의 책을 읽던 때는 아주 어린 시절이었는데 이건 지금이 아닌 거야.” 윤이는 속으로 생각을 하면서 자신에게 말했다. 그러나 명확하게 그 생각과 말은 자신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의 얼굴이 다시 보였다. 아까보다 훨씬 선명하고 크게 보였다. 어릴 적에 윤이가 보았던 어머니의 얼굴 그대로 화사하게 화장을 한 얼굴이었다. 어머니는 그의 귀에 말을 하고 있었다. 윤이는 귀를 기울여 그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의 따스한 온기가 그의 볼에 느껴졌다. 윤이는 너무나 오랜만에 느끼는 어머니의 따스한 온기여서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졌다.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눈앞에 있던 어머니가 사라졌다. 그 많던 사람들도 모두 사라졌다.
윤이는 다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하얀 벽으로 둘러 쌓인 작은 방이었다. “이제 좀 괜찮니?”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너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치료를 하고 있는 중이다.” “제가 봤던 것은 다 뭐죠?” “너의 기억들이지.”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네가 원하면 얼마든지 나갈 수 있어. 아무도 막을 사람은 없어.” 윤이는 다시 방을 둘러보았다. 온통 하얀 벽뿐이고 문은 보이지 않았다. “나가고 싶지만 문이 보이지 않아요. 문은 어디에 있죠?” “잘 찾아봐라. 네가 스스로 찾아서 나오는 걸 보고 싶구나.” 윤이는 벽을 더듬기 시작했다. 미세한 틈이라도 손에 느껴지면 그곳을 밀 생각이었다. 천천히 벽에 손을 대고 눈을 감고 움직였다. 미세하게 작은 틈새가 느껴지자 온몸을 기대어 지그시 벽을 밀었다. 벽이 밀리면서 드디어 윤이는 처음 들어왔던 사방이 어두운 복도로 나왔다. 사방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멀리 보이는 은빛의 문만이 환했다. 윤이는 그쪽으로 재빠르게 뛰어갔다. 문 앞에 서자 문이 열리고 그 안에 아버지가 있었다. “어서 와라.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여기가 익숙해지면 네가 혼자 찾아오게 될 거다.” 윤이는 빠져나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다시는 이곳에 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속으로 하면서 문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잠시 시간이 흐르자 반대 편의 문이 열리고 처음 들어왔던 대리석 바닥에 붉은 카펫이 깔린 로비가 보였다. 윤이는 아버지보다 먼저 대리석 바닥에 발을 내디뎌 힘차게 밖으로 나왔다.
“무결성이 증명되었습니다. 일급 시민의 자격이 그대로 유지되고 모든 권리를 행사하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김정현은 윤이를 데리고 나오면서 중앙정부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제 너는 다시 일급시민의 자격이 중앙정부로부터 확인되었다.” “조금 전에 제가 경험한 것들은 뭔가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네가 일급시민으로 누려야 할 권리를 다 누리기 위해서는 적합한 신체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걸 확인한 것뿐이야.” “제 신체가 아니라 뇌와 기억을 확인한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건 아니다. 인간의 기억을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지. 아직도 그런 기술은 발달하지 않았어. 하지만 뇌의 어느 부분을 활성화시키면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는 확인할 수 있지. 그것뿐이다. 너의 몸은 그저 태어났을 때처럼 완벽한 1급 시민으로 어떤 변형도 되어있지 않다는 걸 확인했을 뿐이야. 너는 순수한 인간으로 최적의 유전자 조합을 가진 1급 시민이다. 이제 1급 시민으로 네가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가 있단다.” “저 건물에서 일하고 싶어요.” 윤이는 손가락으로 거리의 맞은편 낮은 산 위에 있는 중앙정부의 본부 건물을 가리켰다.”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저기서 일 할 수 있지.” “아버지가 했던 일을 저도 하고 싶어요.” “내일부터 가서 일하면 된다. 이제 저녁을 먹으러 가자. 너의 어머니가 좋아하던 식당에 미리 예약을 해두었다.” 윤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아버지의 뒤를 따라 묵묵히 걸었다.
9.5
이수현 경감은 스케쥴러에서 나오는 라이브 메시지 요청으로 잠이 깼다. 밖은 아직도 어두운 새벽이었다. “오늘은 생활지역으로 가서 사람들을 만나세요.” “아직 공장을 다 둘러보지 못해서 오늘도 공장으로 가려고 했는데 일정이 변경된 건가요?” “네, 오늘은 생활지역으로 가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세요. 감시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하시기 바랍니다. 경감님의 스케쥴러에 바디캠 기능을 항상 켜놓으시는 것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생활지역에 거주지를 마련했으니 오늘부터 그곳에서 머무시기 바랍니다. 스케줄러에서 숙소를 확인하세요.” “알겠습니다.” 경찰국장과의 메시지를 주고받은 이수현경감은 3 구역 지도를 보고 오늘 그가 돌아다닐 곳의 동선을 구성했다. 그가 익숙한 지역은 시내의 클럽이 있는 유흥가 밀집지역이었다. 그에게는 주사장이 있는 주 클럽과 그 주변이 가장 익숙했다. 그 외에 도심 주변부는 대체로 거주 지역이었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지역들도 많았다. 이수현경감은 창가로 가서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해서 조금씩 환해지는 밖을 바라보았다. 그가 어제 다녀온 공장이 있는 지역이 보였다. 높은 벽으로 둘러 쌓이고 세모난 지붕의 공장이 여러 채 모여서 산처럼 보였다. 거기 중간쯤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 위의 하늘은 유독 검게 보였다. 멀리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인지 소리는 가냘프고 불안이 가득했다.
“오늘은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에어카에 다가가자 안에 있던 공장장이 바로 나와서 이수현 경감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갈 데가 많은데 일단 목적지를 순서대로 입력해 보고 더 좋은 동선이 없는지 같이 확인해 봅시다. 내가 여기 사정을 잘 모르니 공장장이 도와줘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이 주변은 제가 잘 알고 있으니 도움이 되실 겁니다.” 차 안에 타서 동선을 표시한 지도를 띄우자 공장장은 말없이 몇 초간 바라보았다. “제가 순서를 바꿔보았습니다.” 지도에는 공장장의 추천 동선이 오렌지색으로 표시되었다. 이수현 경감이 오늘 처음에 가려고 했던 시내의 유흥지역은 모두 제외시키고 외곽의 주거지역을 먼저 도는 것이었다. “주거지역은 넓게 펼쳐져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먼 곳은 서해 쪽에 있는 어부의 도시로 주로 어부의 후손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곳부터 시작해서 숙소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 동선이 가장 편할 겁니다. 그리고 유흥지역은 24시간 밝은 곳이니 밤이나 새벽에 가도 됩니다.” “그렇게 하죠. 나는 원래 유흥지역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에게 먼저 찾아가려고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네요. 오늘 머물 숙소가 유흥지역에 인접한 곳이니 공장장이 짜준 동선대로 가는 게 좋겠군요.”
공장장 케이와 이수현 경감은 같이 움직이는 것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수현경감이 더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서해의 가장 끝 주거 지역으로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입니다. 제가 밖을 경계하면서 갈 테니 경감님은 쉬셔도 됩니다. 그곳에 특별히 가야 할 곳이 있나요?” “거기서 사람이 가장 많은 곳으로 가도록 하죠.” “그럼 항구 앞에 시장으로 가겠습니다. 그곳은 배들이 오가는 곳이고 사람들이 가는 식당이나 카페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산자원의 일차 가공이 이루어지는 공장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이수현경감은 서해의 항구 도시는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공장장 케이가 없었다면 항구도시에 대한 정보를 얻고 공부를 하느라고 시간을 썼을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공장장 케이와 동행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케이는 사람보다 지식을 습득하고 적절히 사용하는데 훨씬 빨랐고 지치지 않았다.
“왜 나와 동행하려는 결정을 하게 된 건가요?” 이수현경감은 케이가 어떤 이유에서 자신과 동행하는 의사결정을 내리게 됐는지가 궁금했다. 요즘 나오는 로봇들은 명령이 없어도 자신이 수집한 모든 정보를 바탕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 어제 제가 경감님과 동행한 것은 업무의 연장이었습니다. 오늘은 중앙정부 경찰국의 요청으로 앞으로 제3 구역에서 경감님을 수행하는 새로운 직무를 추천받았습니다. 저에게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되는 좋은 기회라고 여겨져서 수락했습니다.” “그렇군요. 아마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나도 그렇고 공장장도 그렇고 제3 구역 전문가가 될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에어카는 그 사이 제3 구역의 서쪽으로 계속 비행하고 있었다. “ 저는 오늘 바다를 처음 보게 됩니다. 실제 바다를 처음 보게 되어 기쁩니다.” 조용한 가운데 케이가 기쁜 어조로 말했다. 케이의 말을 듣자 이수현경감은 자신도 무척이나 오랜만에 실제로 바다를 보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오랜만에 바다를 봅니다. 그동안 많은 지역을 돌아다녔지만 바닷가 쪽으로는 갈 일이 없었어요. 해저도시에 세미나 때문에 갈 때를 빼고는.” 바다는 쓰레기 더미가 쌓여가고 자원이 고갈되어서 해안도시의 인구가 점점 줄었다. 바닷가에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내륙의 도시로 이동했다. 지금은 바다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정화되어 다시 수산자원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어부의 자손들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해양 쓰레기를 제거하던 작업을 하던 자손들이다. 어부의 자손들은 이미 오래전 바다가 오염될 때 사라졌다. 이수현경감이 만날 사람들은 대부분 해양 쓰레기 수거 작업을 하는 시민들이고 일부는 수산물가공이나 선박정비소에서 일하는 시민들이었다.
어부의 도시에 도착해서 가장 사람이 많다는 시장에 차를 세웠다. 거리는 마치 역사책에 나오는 근대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백 년은 더 되어 보이는 낡고 낮은 건물들이 항구 주변에 모여 있었다. 그 앞에 보이는 항구는 상대적으로 거대해 보였다. 바닷속에 반쯤 잠겨 있는 데이터 센터와 물류 센터 그리고 그 옆의 쓰레기 처리장이 물에 반사된 빛을 반짝이며 자리 잡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습기와 비린내가 풍겼다. 이수현경감은 마스크를 쓰고 공기정화기를 가동했다. 케이는 차에서 내리기 전부터 시장 거리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에 가자고 했다. 거기서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그다음에는 항구로 가는 계획을 세웠다. 이수현경감이 케이의 계획에 따르기로 했다. 시장의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검게 그을린 피부를 하고 덩치가 컸다. 여자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수현 경감은 평생 이 도시에서 바닷속의 쓰레기를 줍는 사람들에게 어떤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수현경감에게는 이 해안가 도시의 냄새부터 그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어서 오세요.” 카페에 들어가자 사람들이 반쯤 차 있었다. “앉고 싶은 자리에 앉으세요. 메뉴는 테이블 옆에 있습니다. 천천히 보시고 메뉴를 정하시면 주문하세요.” 로봇은 어색한 몸짓으로 가까스로 사람들과 테이블을 피해서 주방 입구 쪽 자리로 돌아갔다. 이수현경감은 창쪽의 빈자리에 앉았고 뒤에 따라오던 케이는 그 앞에 앉았다. “여긴 확실히 시대가 거꾸로 가고 있는 게 맞아요. 1세대 서빙 로봇이 아직도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네요.” 케이는 자신과는 다른 로봇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떤 판단도 내리지 못하고 짜인 프로그램으로 일정한 업무만을 하는 1세대 로봇은 그의 조상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고물 덩어리로 보였다. “삼십 년 전에 내가 어린 시절에 봤던 기억이 나는데요. 아마 1 구역에서 있던 로봇이 은퇴하고 여기로 온 것이겠죠.”
거리에서 본 덩치 큰 사람들은 카페 안에 보이지 않았다. 카페 안에 있는 손님들은 대부분 팔이나 다리가 또는 머리의 반쯤이 로봇인 사람들이었다. 바닷가 일이 얼마나 험한 일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지금 이 안에 있는 34명의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49세이고 30명이 로봇인간입니다. 인간은 주방에 한 명 있는데 여기서 대를 이어 장사를 한 주인입니다.” 케이가 보여주는 인구분석표를 보면서 이수현경감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분석표에 있는 엠휴먼으로 표시된 한 명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이 그런 기분을 들게 했다. 이수현경감은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중앙정부의 인구 분류상 자신은 인간이라는 단어 앞에 엠자가 붙은 인간이었다. 사람에 따라서 그 엠자의 의미는 뮤턴트(Mutant, 돌연변이)라고 칭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메니퓰레이트(Manipulated, 조작된)라고 칭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정확히 그 엠자의 의미는 공식적으로 마더(Mother, 어머니)의 약자였다. 대대로 이어져 오는 주요한 유전자를 계속 보전시키기 위해서 유전자 편집으로 만들어진 특수 인간 집단이었다. 한마디로 인공의 어머니를 가진 인간이었다. 이수현 경감도 그 부류에 속했다. “길에서 보던 덩치 큰 사람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하군요. 혹시 아까 그 사람들을 스캔해서 분석한 자료도 있나요?”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린 건 이수현 경감 자신이었다. “물론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일단 주문을 먼저 해야겠습니다. 저기 서빙 로봇이 뒤뚱거리며 다시 오는 걸 보고 싶지는 않거든요. 저는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겠습니다. 경감님은요?” “나는 수분 섭취를 하고 싶네요. 이게 좋겠군요. 여기서만 파는 거라고 하는데 한번 맛을 보죠.” 케이는 자신의 음료와 이수현경감이 고른 해양심층수를 시켰다.
9.6
주문한 음료를 기다리면서 이수현 경감은 천천히 카페를 둘러보았다. 카페 안에는 조금 전 길에서 본 덩치 큰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지금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요?” 이수현경감과 눈이 마주치자 케이가 물었다. “아까 길에서 본 사람들이 여긴 안 보이는 게 이상하군요.” “저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아까 그 사람들은 모두 일하러 가고 여긴 은퇴자들이 모이는 것 같군요.” 조금 전 입구에서 그들을 맞이했던 구형 로봇이 주문한 음료를 가지고 다가와서 멈췄다. 어색하지만 로봇은 음료를 탁자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더 시킬 것이 있으면 다시 불러주세요. 좋은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로봇이 가려고 하자 케이가 말을 시켰다. “여기에서 저녁에는 식사도 할 수 있나요? 우리가 오늘 저녁 식사를 할 장소를 찾고 있는데 로컬 사람들이 좋아하는 식당으로 추천해 주실 만한 곳이 있나요?” 한 번에 두 가지 질문을 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내부 프로세스의 속도가 늦어서 그런지 로봇은 잠시 멈춰서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케이는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고 쳐다보고 있었다. 이수현 경감은 로봇이 가져다준 해양 심층수를 한 모금 마셨다.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해양심층수가 그의 입 맛에는 그냥 생수와 별다른 점이 없게 느껴졌다.
“저녁에 이곳은 간단한 안주와 맥주를 마실 수 있습니다. 이 근처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은 여러 곳이 있지만 가장 유명한 곳은 바로 옆의 라운드테이블이라는 식당입니다. 그날그날 이곳 해산물을 이용한 오늘의 요리가 나옵니다. 참고가 되시기 바랍니다.” 로봇은 넘어질 듯 말 듯 뒤뚱거리며 다시 돌아갔다. 케이는 그 모습을 보고 측은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에 다시 와야만 아까 길에서 봤던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케이가 서빙 로봇이 가고 난 뒤에 말을 했다. 이수현 경감은 말없이 해양심층수를 마시고 있었다. “휴먼이 한 명 들어옵니다.” 케이가 식당 문이 열고 들어오는 한 여자를 재빠르게 스캔하고 말했다. 그의 소리에 이수현경감은 창밖을 주시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카페입구를 보았다. 한 여자가 천천히 걸어 들어와서 바 쪽으로 가서 앉았다. 옆모습과 뒷모습만 보여서 나이는 알 수 없었지만 걸음걸이로 보아 젊은 사람 같았다. “케이, 저 사람에게 말을 시킬 방법이 없을까?” 이 수형 경감의 질문이 다 끝나기도 전에 케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바 쪽으로 가고 있었다.
“혹시 이 지역에 사시는 분인가요?” 케이가 다가가서 여자의 옆에서 물었다. “네, 그런데요.” “안녕하세요? 저는 케이라고 합니다. 동쪽의 공장지대에서 왔는데 혹시 지역에 대해서 좀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여자는 케이의 얼굴을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도를 보면 도시에 대한 정보가 다 나올 텐데 왜 나에게 묻지라는 표정이었다. “바쁘지 않으면 제가 차를 대접하겠습니다. 우리는 저쪽 창가자리에 있는데 같이 차를 마시면서 짧게라도 이야기를 할 시간을 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케이의 설득이 맘에 들었는지 여자는 케이가 가리키는 창가 쪽 자리를 보더니 일어서서 케이와 같이 이수현 경감이 있는 자리에 왔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저의 일행입니다.” 이수현 경감은 여자가 다가오자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고 여자의 얼굴이 낯익었다. “혹시 전에 주클럽에서 봤던 분 아닌가요?” “아, 맞습니다. 김이영이라고 합니다. 혹시 제 기억이 맞다면 주클럽의 주사장님과 아시는 경감님이시군요.”
“이 지역에 무슨 사건이라도 난 건가요?” 이영은 자리에 앉자마자 이수현경감에게 물었다. “그럴 리가요. 그랬으면 이렇게 한가하게 물이나 마시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냥 정보 수집 겸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여긴 한 번도 와보지 않은 곳이라 누구든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영 씨는 여기 어떤 일로 와계신 건가요?” “여기는 주방장을 만나러 왔습니다. 어릴 적 친구거든요. 집에 왔다 가는 길에 들른 겁니다. 집이 여기서 10킬로 정도 내륙에 있는 예술가 마을입니다.” “아, 그러셨군요. 그럼 이 지역에 대해 잘 아시겠네요.” “저도 이 지역은 그냥 가끔 와보는 정도라 잘 모릅니다. 해양업자들의 일이 힘든 일이라 해외나 중앙정부에서 보낸 로봇이 많아서 여기는 점점 외국 같은 곳으로 변하고 있죠. 저보다는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게 이 지역에 대해 알기는 쉬울 겁니다.” “그럼 혹시 길에서 덩치가 큰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걸 봤는데 그 사람들도 외국인인가요?” “그럴지도요.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항구입니다. 저는 이만 친구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요.” “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도 주클럽에서 일하고 있나요?” “네, 나중에 또 주클럽에 오시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친구분을 만나는데 저희가 방해 한건 아니길 바랍니다.” 이영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바로 돌아갔다.
주방장이 나와서 이수현 경감 쪽을 보면서 이영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수현 경감과 케이는 이영이 만나고 있는 주방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까 본 사람들이 외국인들일까요? 흠, 중앙정부에서 외국인을 따로 외국인으로 표시하지 않으니 직접 물어보지 않고는 데이터 상으로는 몇 퍼센트나 여기 지역에 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외국인이라는 표현도 낡은 표현이긴 하지요. 이미 일 년 전부터 중앙정부가 글로벌하게 통일되었으니 그냥 같은 사람일 뿐이지요.” “그렇긴 하지만. 그럼 어떻게 할까요? 항구 쪽으로 가서 아까 그 덩치 큰 사람들을 더 만나 볼까요? 아니면 저녁에 여기 다시 와서 사람들을 만날까요?” “일단 우리 숙소로 돌아가죠. 피곤하기도 하고.” 이수현경감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9.7
이수현 경감과 케이는 숙소로 돌아왔다. 호텔도 아니고 그렇다고 집도 아닌 오래된 기상 관측소가 그들의 숙소였다.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서 주변은 조용했다. “주차장에 차가 없는 걸 보니 여긴 우리밖에 투숙객이 없나 봅니다.” 내부로 들어서자 아담한 로비와 위층의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위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케이와 이수현 경감이 움직일 때마다 그 둘의 소리만이 조용히 빈 공간을 채웠다. 이 층으로 올라가자 사방이 모두 창으로 되어 있고 벽에는 침대와 소파가 하나씩 있었다. “이게 우리가 묵을 침실 겸 휴게소네요. 임시로 만든 대피소 같은데요.” 케이는 벽 한쪽으로 가서 충전기에 기대 서서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었다. “밖에서 봤을 때는 오래되고 어설퍼 보이지만 있을 건 다 있네요.” “여긴 어쩌면 우리가 묵기에 가장 최적의 장소라고 여겨지네요. 사방에서 누가 오는지 쉽게 볼 수 있으니까”
이수형경감은 케이의 반대쪽으로 가서 창문을 통해 밖을 살펴보았다. 언덕의 아래 멀리 그들이 왔던 서쪽의 마을이 조그맣게 보였다. “케이, 그쪽 창문으로 유흥지역이 보이나요?” “네, 4킬로 전방부터 유흥지역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왜 내가 조금 전에 갑자기 숙소로 가자고 한 줄 아세요?” “아니요. 너무 갑자기 가자고 해서 의외였습니다.” “나는 이영 씨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영 씨뿐 아니라 그 카페의 사람들도.”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제가 주변을 경계하면서 다녔는데 저는 카페에 이영 씨가 들어오기 전까지 항구의 길에서 이영 씨가 우리를 감시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이영 씨뿐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도 우리를 따라다니지 않았습니다.” 케이는 자신의 능력을 이수현경감이 의심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지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케이, 흥분하지 말고 내 말을 잘 들어봐요. 당신 말대로 누군가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감시하지 않은 건 틀림없습니다. 당신이 그걸 모를 리가 없죠. 하지만 우리가 카페에 갔을 때 김이영이란 사람이 온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부의 도시에 왔다는 것을 알고 만나러 온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판단하신 거죠?” “우리가 카페에 들어갔을 때 주방장은 보이지 않았죠. 그런데 나올 때 보니 주방장이 보였는데 스캔해 보니 체온이 높았죠. 조금 전에 김이영 씨와 같이 들어온 게 틀림없습니다. 그 카페는 인간이나 로봇에게 가장 쾌적한 온도인 24도를 유지 중이었고 외부는 30도가 넘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어요. 따라서 김이영 씨가 주방장을 만나러 왔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주방장을 만나러 왔다는 것은 핑계이고 우연을 가장해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 등장한 것입니다.” “그건 좀 의심스러운 부분이군요.” “김이영 씨를 추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숙소로 돌아오자고 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거기서 할 수는 없었어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저녁 스케줄은 유흥지역에 가서 김이영 씨를 감시하게 되나요?” “그것보다 오늘은 어부의 도시로 다시 돌아가서 로봇이 추천해 준 식당에 가는 겁니다. 거기서 또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은 분명히 김이영 씨나 주방장이 어떤 의도를 갖고 심어 놓은 사람일 거예요. 우리는 그 사람을 만나 보는 겁니다. 김이영 씨는 우리가 어부의 도시를 알아가는 걸 원하지 않는 말투였습니다.”
이수현경감은 인간이 직접 수집하는 정보를 기계가 수집하는 정보보다 높게 평가했다. 그것은 그가 기계를 불신해서가 아니었다. 기계는 정직했지만 인간은 기계를 늘 자신의 의도대로 조작하는데 능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경감님과 나누고 싶은 중요한 이야기를 하거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숙소에 돌아와서 하는 게 좋겠군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너무 의식하지는 마세요. 주변에서 우리가 뭔가 이상한 행동을 하면 우리가 뭔가를 눈치채고 있는 걸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최대한 그들의 의도대로 행동하고 그들이 누군지 가까이 다가가는데 목적을 둬야 합니다.” 이수현경감은 며칠 동안 케이에게 적응되어서 그가 실리콘 피부를 갖고 있는 차가운 기계 덩어리인 것을 이제는 의식하지 못했다. 마치 자기 옆에 있는 동료에게 말하듯이 그를 대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저는 김이영 씨와 그 주변을 좀 더 알아보고 있겠습니다. 경감님은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에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케이는 이미 충전을 다 마치고 창가로 가서 밖을 경계하면서 경감에게 말했다. 케이의 눈에 이수현경감의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금 쉬고 있을 테니 저녁시간 전에 깨워주세요.” 이수현경감은 케이가 있는 반대쪽의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았다.
이수현경감이 소파에 기대어 졸고 있을 때 케이는 주변을 경계하면서 이영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있었다. 케이가 이영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중앙정부에 기록된 간단한 프로필과 그녀의 정기적인 병원 검진 기록밖에 없었다. 가족들 중에도 범죄를 저질러 감시대상자가 된 이는 없었다. 3급 시민도 휴먼이므로 범죄기록이 없으면 감시 대상자가 아니고 모든 정보는 개인화되어 공개되지 않았다. 로봇과 휴먼의 차이는 이런 권리에서 구별되었다. 하지만 케이는 간단한 그녀의 프로필에서 여러 가지 정보를 뽑아내고 있었다. 우선 케이는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와 학교에 대해 조사했다. 그리고 카페에서 봤던 주방장의 얼굴 기억을 바탕으로 그 도시와 학교 출신의 사람 중에 동일한 인물도 찾아낼 수 있었다. 케이는 이영보다는 어부의 도시에서 줄곧 일해 온 주방장의 가족 관계에서 특이한 사항을 발견했다. 그의 아버지는 복싱선수 출신이었고 중앙정부의 감시 대상자였다. 전과 기록은 딱 한번 있었다. 스물두 살 때 시민의 급수에 따라 거주와 이동 지역 제한에 관한 규정이 생겼을 때 3급 시민들이 일으켰던 폭동의 주된 가담자였다. 그 시대에는 시민의 급수에 따라 행동 지역의 제한 구분이 된 초기였다. 그것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일부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켜 범죄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고 해도 그의 아버지는 폭동의 주된 가담자로 시청에 방화를 하고 장악한 후에 끝까지 경찰에 저항해서 붙잡힌 범죄자였다. 비슷한 충동적인 성향과 복싱선수의 튼튼한 신체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면 주방장도 비슷한 길을 가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