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S Nov 10. 2024

시스템의 진화

8.3-8.6

8.3

김 준호 박사는 중앙정부와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의외로 협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서로가 원하는 것이 명확했다. 그것을 서로 주고받음으로 협상은 마무리되었다. 김준호 박사는 이제 일상이탈자 신분이 아니라 1급 시민 신분을 다시 유지하게 되었다. 대신 그가 개발한 식량과 에너지 공급에 대한 모든 관리 시스템을 중앙정부에 제공하기로 했다. 물론 로봇과 사역 침팬지들에 대한 관리 시스템은 그 자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정보에 반응하여 계속 진화하는 의사결정 체제였다. 따라서 그 정보는 중앙정부가 제공받아도 수만 개의 코드 뭉치로 된 블랙박스일 뿐이었다. 물론 중앙정부는 누가 그것을 만들었는지 코드의 로직을 보면서 그걸 만든 사람을 유추하여 김준호 박사의 조직을 더 알아내고 싶을 뿐이었다. 사람에게 지문이 있듯이 프로그램 코드에도 개발자의 지문처럼 코드의 로직이 남아있었다. “이 정도면 최소 세명의 개발자가 일 년은 걸려서 만들었을 겁니다. 쉽게 개발자를 유추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물론 시간을 주시면 시중에 나와있는 국내외 모든 의사결정 시스템을 다 수집해서 비교 분석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개발자도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박진 비서가 중앙정부에서 일하는 가장 뛰어난 의사결정 프로그램 개발 책임자 이경박사에게 김준호박사의 관리시스템을 보여줬을 때 들은 말이었다. 그가 엄살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렇게 수많은 의사결정 시스템이 중앙정부나 해커들 사이에서 개발되어 쓰이고 있었다. 박진비서는 이경 박사의 대답이 신뢰가 갔다.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운이 좋으면 또 금방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니 일단 최대한 6개월로 알겠습니다.” 


박진비서는 본능적으로 김준호 박사가 중앙정부에 위협이 되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욕심이란 것이 제거된 대부분의 인간에게 김준호 박사는 위협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김준호 박사와 협상이 다 마무리되었습니다. 일단 2년 계약을 했고 그의 시스템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제공받기로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시스템 로직입니다. 우리보다 더 빨리 진화하는 로직을 갖고 있다면 우리가 사라 질지도 모릅니다. 개발자를 먼저 밝혀내는 게 문제의 뿌리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박진비서의 보고에 총리는 빠르게 자기의 의견을 밝혔다. “그 부분에 대해서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발자가 밝혀지면 그다음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직 그 부분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자유의지에 의한 포기를 받아내지 못한다면 무력에 의한 포기를 받아내야 하지만 그것은 마지막 수단입니다. 그리고 그건 글로벌 중앙 정부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그 부분은 제가 진행하고 있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총리님. 그럼 저는 일단 시스템 개발자를 찾는 일과 에너지와 식량 생산 기지에 정보원을 파견해서 데이터를 직접 수집하는 일에 집중하겠습니다. 혹시 다른 지시 사항은 없으신가요?” “없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총리는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총리와 면담 이후 박진 비서는 경찰 국장을 호출했다. 잠시 후 스크린에는 경찰 국장이 나타났다. “지난번 의논 했던 3 구역과 4 구역에서 데이터를 직접 수집을 할 정보원을 준비시켰나요?” “네, 경험이 있는 정보원으로 한 명 구해놨습니다. 며칠 뒤에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관리자들이 3 구역의 공장이나 농장에 들어가서 사역 침팬지와 로봇이 일하는 곳을 둘러보는 일은 매달 열흘에 한번 꼴로 있습니다. 그때를 맞춰서 우리 요원이 들어갈 겁니다.” “제3 구역의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데이터 수집부터 하시기 바랍니다. 실제 인구수와 그들의 DNA샘플링 같은 것 말입니다. 우리가 모니터링하는 자동 수집 데이터가 믿지 못할 데이터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데이터오류나 조작이 어디서 발생하는지도 조사해야 할 겁니다.” 박진비서는 경찰 국장에게 단호한 표정으로 지시했다. “아시겠지만 제3 구역의 모든 사람들은 출생 때부터 칩인식이 되어있어서 그들의 위치와 바이탈에 대해서 트랙킹이 되고 있습니다. 인구수나 DNA를 조사한다는 것은 출생부터 관리가 안되고 있다는 것인가요?” “그 지역은 온갖 범법자들이 있는 곳이니 우리가 모르는 출생이 일어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직접 데이터를 수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원천 데이터 소스의 점검입니다. 누군가 그것을 조작한다면 우리는 속고 있어도 알 수가 없을 겁니다. 김준호박사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돌연변이가 그 지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아니면 국제적인 해커의 도움이 있을 수도 있고. 중요한 것은 제3 구역의 인구수나 그들의 상태를 조작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데이터의 왜곡을 확인하고 나면 왜곡하는 이유를 찾아보는 게 급선무 일 겁니다.” 


“알겠습니다. 또 다른 지시 사항은 없으신가요?” “한 명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으니 최소 한 명 더 적합한 요원을 선발해서 교육시킨 후 준비되는 대로 투입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너무 많으면 김준호 박사가 눈치를 챌 수도 있으니 일단 처음 들어간 사람이 잘해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첫 번째 요원이 투입된 후에 상황을 파악하고 다음 투입 계획을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네 좋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직접 데이터 수집을 위한 요원이 투입되면 그때 수시로 다시 미팅을 합시다. 앞으로 경찰국장과 나 그리고 데이터 수집요원 셋은 현재 우리 정부의 가장 비밀스럽고 중대한 업무를 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작전은 시작부터 최상급 중요도로 분류되어 영구 봉인되고 작전이 수행되는 도중 모든 일들은 참여자 외에 총리님만이 접근 권한이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정부의 가치를 지키려는 결정에 따르므로 향후 업무상의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을 겁니다. 그럼 작전의 성공을 빕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경찰 국장은 박진비서의 지시를 받은 후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8.4

윤이가 제이의 집 지하실에서 책 속에 빠져 있을 때 재영에게 메시지가 왔다. 윤이는 반짝이는 메시지의 표시에서 재영의 이름을 발견하고 메시지를 바로 열어보았다. “형네 집에 있는 거야?” “응, 지금 할아버지가 물려준 오래된 책을 읽고 있어.” “오래된 책을 읽고 있다고? 나도 그런 책을 읽고 싶다.” “오늘은 여기서 계속 책을 읽을 건데 네가 괜찮다면 와서 같이 읽어도 좋아.” 물론 윤이는 재영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와도 좋다는 답장을 했다. “그럼 내가 지금 갈게. 역사박물관에 가서 연락할게.” 윤이는 재영이 온다고 하자 잠시 당황스러웠다. 그렇지만 다시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어서 제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재영이가 여기로 조금 있다가 올 거야. 나랑 같이 책을 읽을 거야.” 제이는 윤이의 메시지를 거실에서 읽었다. 메시지에 태그 된 재영을 검색해 보니 언어학자로 나왔다. 윤이와 같이 학교에 다니다가 국제관계 전문가였던 부모님을 따라서 해외로 나간 아이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렇게 해.” “윤이 친구가 같이 책을 읽으러 온데요.” 제이는 자기 방에 들어가서 일을 하고 있는 유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물론 그녀는 지금 일에 빠져있어서 누가 오든지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재영이가 오면 알려줘. 내가 문 앞에 나가서 데리고 올게.” 제이는 윤이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잠시 후 재영은 역사박물관 정문에서 윤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여기 역사박물관 앞이야.” “위치전송했어. 근데 옛날 길이라 네가 잘 찾지 못할 수도 있어. 우리 형이 문 앞으로 나간다고 하니까 일단 박물관 방향으로 있는 담을 따라서 걸어와.” “응, 그렇게 할게. 고층건물이 없고 사람 다니는 길만 있으니 여긴 정말 다른 시대에 온 느낌이 드네.” 재영은 박물관의 담 길을 따라서 걸었다. 돌과 흙으로 만들어진 오래된 담을 옆으로 하고 작은 돌들이 박혀 있는 길이었다. 그녀가 살고 있는 대로변에서 불과 몇 분 지나왔는데 다른 시대에 온 것처럼 분위기가 달랐다. 재영이 어디가 박물관 문일까 의구심이 들 무렵 정면에 한 남자가 보였다. 그 사람은 재영을 보자 손을 흔들었다. 재영도 손을 흔들면서 걸음을 빨리해서 다가갔다. “재영 씨죠? 여기는 오래된 건물이라 찾기가 쉽지 않은데 잘 찾아왔군요. 제이라고 합니다. 윤이 형이에요. 여기로 들어가세요.” “네, 반갑습니다. 이재영입니다.” 길이 끝나면서 정면에 돌로 만들어진 벽사이에 나무로 된 문이 있었다. 문을 들어서자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집이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이미 백 년은 이어져 내려온 건물임이 느껴졌다. 그녀가 들어서자 집 주변은 좀 더 환하게 밝혀졌다. “윤이랑 친한 친구였나 봐요?” 제이가 집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면서 재영에게 물었다. “어릴 때는 그랬어요. 제가 해외에 가면서 헤어졌지만.” “윤이에게 아직도 연락하는 어릴 적 친구가 있다는 건 오늘 처음 들었어요.” “아, 다시 만난 지는 며칠밖에 안 됐어요.  윤이가 고서를 읽고 있다고 하길래 실례인 줄 알면서도 제가 오겠다고 했어요. 제 직업이 언어학자라 언어에 관심이 많은데 사라진 언어를 찾고 익히는 데는 오래된 책만큼 좋은 것도 없거든요.” “아닙니다. 잘 왔어요. 윤이도 혼자 책을 읽은 것보다는 친구랑 같이 읽는 게 좋을 거예요.” 


“여긴 정말 딴 세상에 온 느낌이 드는 장소구나.” 재영은 지하실에 내려오자마자 윤이를 보고 말했다. “오래된 집이니까. 더구나 여기 지하실은 백 년 전 그대로 거의 고친 게 없어서 그럴 거야.” 재영은 지하실을 천천히 둘러보느라 윤이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여기 책들은 정말 오래되어 보이는구나.” “오래된 건 백 년이 넘은 것도 있고 대부분 오십 년 이상 된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보시 던 거니까.” “와, 이런 책들은 박물관에서나 본 것 같은데 실제로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니. 우리 조상들은 이런 책들에서 정보를 얻고 전달했다고 하는데 그 사실이 이제야 실감이 난다.” “과거에는 대부분 책을 집에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 집은 아마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많이 갖고 있었을 거야. 할아버지가 책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하셨거든. ” “ 우리의 정보 관리 체계가 점점 디지털화되면서 물리적인 책이 없어지기 시작했지. 그리고 정보를 필요할 때마다 즉흥적으로 꺼내 쓰는 게 보편화된 지금은 아예 물리적인 책이라는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야. 물론 인공지능 시스템 안에서 과거의 책은 일부가 남아서 계속 진화되고 있지만 정보가 아닌 소설 같은 책은 사람들이 찾지 않아서 결국은 소멸된 거나 마찬가지고. 너희 집에 이미 백 년 전에 소멸된 유물들이 이렇게 있다는 건 정말 놀랍다.” 재영은 책 꼿이 에서 책을 하나 빼냈다. “이게 소멸해 버린 소설이란 거구나. 내가 좀 읽어도 되지.” “응, 근데 종이가 상하지 않게 조심해서 읽어.” “물론이지. 귀중한 자료들인데 내가 망칠 수는 없잖아.” 재영과 윤이는 조용히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 간간히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이 지하실의 빈 공간에서 울려 나왔다. 


“근데 너희들은 여기서 밤이라도 새울 거야?” 제이가 재영과 윤이가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 책상으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아, 시간이 많이 지났네. 나는 괜찮은데 재영이는 이제 가봐야 될 것 같은데.” 윤이가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서 재영이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도 괜찮아. 나는 내일 강의가 없어.” “다들 책에 푹 빠져 있구나.” 제이가 윤이와 재영이를 보며 말했다. “너무 귀한 책들이라서 읽다가 중간에 그냥 멈출 수가 없네요. 괜찮으시면 여기서 이 책을 좀 더 읽다가 가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재영은 제이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아, 특별히 방해될 건 없어요. 근데 여기 의자도 딱딱하고 오래 있기에는 불편할 텐데요.” “그런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여기가 아늑하고 오히려 집중이 잘되고 좋은 걸요.” “그래도 여기보다는 거실이 편할 겁니다. 거실에 올라와서 편하게 앉아서 책을 봐도 돼요.” “아닙니다. 여기가 좋아요. 책들이 이 공간에서 잘 보존되어 왔는데 혹시 다른 장소로 옮겨 가서 문제라도 생기면 안 되니까요. 그래야 다음에도 또 와서 볼 수 있잖아요.”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내가 미처 그런 생각을 못했네요. 재영 씨는 책을 정말 좋아하는 게 느껴지네요. 이 책들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니 나도 기분이 좋네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여기서 보다가 집에 가도록 할게요.” “아, 그럼 그렇게 하세요. 다음에도 언제든지 책이 읽고 싶으면 와서 보도록 하세요. 그럼 저는 이만 쉬러 가겠습니다.” 제이가 지하실에서 나갔다. 


“너네 형은 참 친절한 것 같아.” 윤이는 재영의 이야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 소설책은 아닌 것 같은데 너는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는 거야?” 재영은 다시 윤이에게 물었다. “아, 이건 역사책이야. 정말 신기한 일들이 많이 적혀있어. 너도 나중에 시간 되면 한번 읽어봐.” “역사책? 그럼 사람들이 나라별로 다른 말을 하고 뭐 그런 사실들에 대한 건가?” “응, 나라별로 다른 말을 하고 서로 땅이나 식량을 뺏기 위해서 전쟁도 하고 그런 이야기들이 있어.” “땅이 부가가치를 생산할 때는 그랬었지. 우리가 최근 백 년 동안 얼마나 빨리 진화되었는지 상상이 안 간다.” 재영이 생각에 잠긴 듯이 중얼거렸다. “근데 비교적 시간이 자유로워 보이는데 너는 어떤 일을 하는지 내가 물어봐도 될까?” 재영은 윤이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윤이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내가 주로 하는 일은 바텐더야.” “바텐더?” “응.” “내가 아는 한 바텐더라면 술을 만들어주는 일을 하는 사람인데. 그럼 여기서 살지 않고 3 구역에서 살고 있다는 거야?” “응, 지금은 그래.” 재영은 몹시 놀란 얼굴로 윤이를 쳐다보았다. 


“지금은 이 책을 읽는 것보다 너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왜 네가 3 구역에서 살게 되었는지.” “그냥 내가 원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 나중에 자세한 이야기는 해줄게.”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너무 궁금하지만 나중을 위해서 좀 참을게. 근데 다시 3 구역으로 돌아갈 거야? 그럼 너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너한테 놀러 가도 될까?” “물론이지. 원한다면 언제든지 놀러 와도 돼. 그렇지만 네가 좋아할지는 모르겠다.” “나는 언어학자야. 소멸되는 언어를 찾으러 세계 곳곳을 많이 돌아다녔는데 제3 구역이라고 못 가겠니.” 재영은 반짝이는 눈으로 윤이를 쳐다보면서 답했다. 윤이는 재영이 자신에게 순수한 관심을 가져주고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이제까지 3 구역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자신을 유전자적 우월성을 가진 1급 시민인 것 때문에 관심을 갖고 다가왔기 때문이다. 


8.5

이 수현 경감은 윤이를 늦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경찰국장으로부터 메시지가 들어왔다. “늦은 시간이지만 급한 일이라 연결했습니다.” “네, 괜찮습니다. 어떤 일이시죠?” “3 구역이나 4 구역에서 직접 정보 수집을 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 수현 경감이 적합하다는 판단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래전에 공장 기계 오류등 사고 현장 조사를 하면서 직접 정보 수집을 하는 일은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입체분석이 가능한 영상 정보가 있으니 직접 수집은 안 하는데 그런 일이 필요하신 건가요?” “그와 비슷한 일입니다. 여러 가지 정보 소스의 원천 수집 기계들이 오류를 일으키거나 누군가 해킹으로 다른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 발생한다는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걸 해결할 요원이 필요합니다.” “흠, 그렇다면 그건 정보 수집이라기보다는 정보 수집을 하는 현장을 확인하는 일이 먼저겠네요. 그러고 나서 수동으로 샘플 정보를 수집해 오는 일이 되겠네요.” “맞습니다. 우린 그 수동으로 수집한 샘플정보를 시스템으로 수집한 정보와 매칭시켜 보면 되고요. 그런데 우려되는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경찰 국장은 잠시 말을 중단했다. “흠, 어떤 점이 우려스러운 건가요?” “과거 제3 구역에 파견 나갔다가 실종된 요원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때는 무기협정이 이루어지기 전이라 어디서든 무기를 구할 수 있어서 사람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죽이는 일들이 빈번했지만. 그렇다고 무기가 없고 감시 카메라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3 구역이 지금은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해커들이 카메라를 무력화시킬 수도 있고 술과 마약이 아직도 존재하는 지역이라 사람들이 난폭할 수 있습니다.” 


이 수현 경감은 누구보다 신체적인 능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그것이 제3 구역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통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저 혼자 가게 되나요? 아니면 파트너와 같이 가게 되나요?” “지금으로서는 혼자 가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곳곳의 감시 카메라를 활용해서 최대한 실시간으로 경감님의 활동을 모니터링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제가 제3 구역에 가 본 경험으로 위험한 지역에 가지 않는 한 그렇게 난폭한 사람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긍정적인 대답을 들어서 다행입니다. 내일 회의가 있을 예정이니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회의에는 정보국 원로들도 참석해서 더 구체적인 대응 전략을 논의할 겁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도 다룰 것이니 꼭 시간 맞춰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경찰 국장이 화면에서 사라졌다. 이수현 경감은 오랜만에 맡게 되는 큰 업무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근래에 들어서 세계적으로 평화조약이 유지되고 모든 구역의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을 하도록 기획 출산이 이루어지면서 분쟁이나 사고가 없었다. 경찰이나 군인은 가상현실을 통해서 테러나 전쟁에 맞추어진 환경에서 훈련을 받지만 심리적인 면은 실제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이성이 뛰어난 이수현경감도 실제 상황에서 느끼는 긴장이나 당황스러움을 최대한 제어하기 위해서 실제 경험이 필요했다.   


이 수현 경감은 경찰국장과의 통화 이후에 밤새도록 자신의 경험을 꺼내서 복기를 하고 있었다. 그가 이제까지 경험했던 여러 가지 테러나 사건 사고를 기억에서 꺼내서 실제와 같이 가상현실에서 재현하면서 자신을 보호하는 본능을 일깨우고 있었다. 이미 시간은 오전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윤이가 제이의 집에서 돌아왔다. “형네 집에 재미난 일이 있었나 봐요. 하룻밤 자고 오는 걸 보니.” 이 수현 경감은 윤이가 제이의 집에서 다음 날이 돼서야 나타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특별히 재미난 일은 없었어요. 설마 저를 기다리신 거라면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시간이 지나가 버린걸요.” “아니에요. 모처럼 나도 업무 감각을 되살리느라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이제 내 몸도 다 나은 것 같고 오늘이라도 데려다줄 수 있으니 원하면 이야기하세요.” “지금은 돌아갈 계획이 없습니다. 여기서 다시 살아볼까 생각하는 중입니다. 곧 결정을 하는 대로 집으로 들어갈 겁니다.” 윤이가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이 수현경감은 깜짝 놀랐다. “잘 됐군요. 그럼 곧 윤이 씨의 아버지도 만나겠네요?” 이 수현 경감은 혹시라도 윤이의 아버지가 자신이 윤이를 데리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면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이곳에 살게 된다면 곧 보게 되겠죠.” “그렇다면 제가 윤이 씨 이야기를 아버님한테 먼저 해도 될까요? 저는 내일 일 때문에 윤이 씨 아버지를 만날지도 모릅니다. 모른 척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나중에 저와 윤이 씨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서요.” “네, 그러셔도 됩니다. 근데 아버지는 은퇴를 하셨는데 경감님과 일 때문에 만날 일이 있나요?” “내일은 좀 중요한 회의가 있는데 원로분들도 나오십니다.” “아, 그렇군요. 아버지께 이야기하셔도 됩니다. 저도 곧 아버지를 찾아뵐 겁니다.” “근데 앞으로 윤이 씨는 어떤 일을 하려고 생각해 두신게 있나요? 형처럼 유전자 분석자가 된다거나 아니면 아버지와 같이 중앙정부의 일을 한다거나.” “아직 결정한 건 없습니다. 당분간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여기는 정보가 많아서 이제까지 제가 부족했던 부분을 먼저 공부하고 그다음에 생각해보려 합니다.” “잘 된 일이군요. 혹시라도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하세요. 물론 당분간 제가 바빠서 연락을 못 받을 수도 있지만.” 이 수현 경감은 진심으로 윤이를 돕고 싶었다. 


8.6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 쿼터 침팬지 인간을 찾아낼 수는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저들에게 단 하나 우리와 다른 점은 목소리뿐입니다. 말을 시켜보기 전에 외관상으로 쿼터 침팬지 인간을 구별하지는 못합니다. 게다가 성대 성형 수술을 시키면 인간과 같은 목소리로 말하므로 인간과 구별할 수 없습니다.” 김준호 박사는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사람들을 향해서 설명을 하고 있었다. “지금 로봇의 문제는 과다한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죠. 결국 에너지가 공급되지 않으면 로봇은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의사결정시스템도 마찬가지고요. 여러 군데 분산하여 가동한다 해도 에너지 공급이 안되면 문제가 생기죠.” 김준호 박사의 설명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조용히 고개만을 끄덕이고 있었다. “제가 만든 쿼터 침팬지 인간들이 중앙정부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대체하게 되는 날까지 앞으로 3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잠깐만요. 지금 중앙정부는 제3 구역에서 수집되는 데이터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추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예측했듯이 에너지와 식량의 공급에 대한 부분으로 관심을 끌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박진비서는 그 이상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원천 데이터가 잘못 수집되고 있다는 정보도 박진비서에게 알려줬고요. 생각보다 시간이 많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중앙정부의 추적에 대해서 구체적인 대비책을 의논할 것을 제안합니다.” 김준호 박사와 라이브 대화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경박사의 발언에 느슨해진 자세를 바로 잡고 김준호 박사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좋은 지적이십니다. 저도 그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제3 구역에 들어와서 정보수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쿼터 침팬지 인간보다 물리적으로는 강할 수 없습니다. 물론 물리적으로 제압하게 되면 그다음에 더 큰 문제가 생기니 그것은 최악의 방법입니다. 그전에 최대한 시간을 끌고 데이터 수집을 방해할 계획입니다. 누가 들어오는지는 우리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중앙정부의 원로로부터 정보를 받을 것입니다.” “그 원로가 누구지요? 반대로 우리의 계획이 새어 나갈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잘 믿지 않는 김수지 박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그 원로에 대해서는 나중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빨리 중앙정부의 의사결정시스템을 마비시킬 수 있는 키를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 그 원로가 누구인지 궁금하네요. 우리보다 빠르게 중앙정부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와해시킬 수 있다면 천재 해커이거나 아니면 정보를 관장하는 사람이겠군요. 그렇지만 원로 중에는 해킹 실력을 가진 사람은 없으니 연상되는 사람이 한 명 있네요.” 이경박사는 김준호 박사가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챈 것 같았다. “박사님의 추론 능력은 너무 빨라서 우리가 따라가지 못하겠네요. 일단 그 원로에 대해서는 제가 곧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다른 논의 사항을 없습니까?” 김준호 박사의 말에 스크린에 보이는 5명의 사람들은 모두 수긍하는 듯이 고개만 끄덕이고 말이 없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마치는 게 좋겠습니다.” “아, 잠깐만요. 제가 거주지를 옮긴 것을 알려드려야 할 것 같군요. 저는 앞으로 제1 구역에서 정보를 수집할 겁니다. 혹시 제가 더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지금 알려주세요.” 윤이가 빠르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현재 상황을 이야기했다. 모든 사람들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윤이의 발언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윤이 씨는 어떤 일을 하던 그만한 능력은 타고났으니 수행 능력에 대한 의문은 없습니다. 그러나 중앙정부에서는 돌발적인 사람을 주시하게 마련입니다. 지금 시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텐데 윤이 씨가 갑자기 나타나서 주목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혹시 우리와의 관계가 노출되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김수지 박사는 냉정한 표정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물론 김수지 박사님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반대로 윤이 씨의 과거 행적이 중앙정부의 시스템에는 공백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윤이 씨는 현재 시스템 상에는 어떤 전문 지식도 없는 사회 초년생이므로 우리보다 활동이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또한 제3 구역이 이제 어느 정도 우리의 관리 체계로 자리 잡혀가고 있어서 윤이 씨는 중앙정부에 투입되는 게 효과적일 겁니다. 윤이 씨는 이경박사와 함께 현재 중앙정부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해킹하는 일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제 의견보다 더 좋은 의견이 있으면 지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준호 박사가 말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윤이 씨가 원한다면 저는 얼마든지 같이 협업을 하고 싶습니다. 시스템 해킹 시간을 조금이라도 앞당기려면 사람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경박사가 김준호 박사의 말에 찬성했다. 다른 사람들도 반대하는 의견은 없었다. “제가 그럴만한 실력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불러주시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물론 저는 아직 1 구역 내에 거처를 정하지도 않았고 신분을 정하지도 않아서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어떤 식으로 정착할지 정해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윤이 씨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은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서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는 게 우리의 프로젝트에도 이득이 되는 게 아닐까요? 중앙정부로부터 별다른 의심 없이 여러 가지 정보를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얻어 올 수 있는 길인데요. 물론 우리의 계획대로면 6개월 안에 중앙정부를 우리가 대신하게 되겠지만 만일을 위해서 차선책을 만들어 놓을 필요도 있지요. 윤이 씨가 알아서 선택하시겠지만.” 김수지 박사는 좀 더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방법을 윤이에게 제시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