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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Nov 09. 2024

변화의 시작

8.0-8.2

8.0

공원의 오후는 한적했다. 족히 삼십 년은 넘게 자랐을 느티나무가 경계처럼 주택 단지 사이에 빙 둘러져 있었다. 윤이는 그늘이 가장 넓게 진 벤치로 가서 앉았다. 정면에서 멀리 큰길의 고층 건물과 그 밑으로 모노레일이 보였다. 공장들이 내뿜는 공해로 오염된 3급 지역의 뿌연 하늘에 익숙한 윤이는  시야가 맑은 도시를 보는 게 낯설었다. “벌써 와있네?” 언제 왔는지 재영이 옆에서 윤이에게 다가왔다. “응, 왔구나. 여기 조용하고 좋네. 너도 와서 앉아.” 윤이는 벤치의 끝으로 좀 더 자리를 옮겨 앉았다. “여긴 사람들이 없어서 좋아. 이거 마실래. 네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내가 좋아하는 걸로 사 왔어.” 재영은 윤이에게 음료수를 건넸다. 윤이는 별로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재영은 윤이가 비워준 벤치의 오른쪽 자리에 앉자 온기가 살짝 그의 오른팔에 느껴졌다. “너는 이 동네에 사는 거야 아니면 일 때문에 온 거야?” 재영은 윤이가 예상했던 질문을 했다. “나는 여기 사는 건 아니고 아는 분이 있어서 왔어. 근데 너는?” “나는 저기 학교에 아이들 가르치러 와. 어릴 때 헤어지고 네가 항상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어. 그래서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너를 찾아봤는데 네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윤이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예감이 맞았구나. 네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같아서 길게 설명하지 않았는데.”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온 거니?” “음, 집에 다시 돌아 온건 아니고. 근데 참 이상하구나. 누가 나에게 이렇게 질문을 하는 게 익숙하지가 않거든.” “아, 그래. 근데 나를 좀 쳐다보고 이야기하면 안 돼? 네가 딴 데를 보고 있으니까 나는 그게 더 이상한데.” 재영은 윤이가 자기 쪽을 볼 수 있도록 윤이의 어깨를 살짝 잡고 자기 쪽으로 돌렸다. 


“내가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너에게 질문만 하니까 이상하기도 하겠지, 근데 나는 네가 항상 궁금했거든. 아무튼 그래도 내가 만나자고 할 때 거절하지 않고 이렇게 나와줘서 고마워.” “나도 오랜만에 어릴 적 친구를 만나서 반가웠어. 근데 내가 형하고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하는데.” “아, 미안. 내가 너무 일방적으로 내 생각만 했구나. 그래 오늘은 이만 헤어지는 게 좋겠다. 어디로 가는데? 나도 집에 가야 하니까 같이 가자.” 윤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재영이도 같이 일어났다. “형이랑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녀는 앞에 서서 윤이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앙역.” 윤이의 대답에 재영은 활짝 웃으면서 윤이의 팔을 잡아당겼다. “중앙역이면 나랑 같이 가면 되겠다. 우리 집도 중앙역 쪽이야.” 윤이는 재영이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뭔가 신나는 일이 있는 것처럼 윤이를 살짝 돌아보면서 계속 이야기를 했다. 재영이의 이야기는 윤이에게 반쯤은 들리고 반쯤은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도, 내용이 정확히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윤이는 분명히 그녀와 같은 시간을 살아왔지만 다른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과 살아왔기에 서로 통하면서도 통하지 않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윤이는 그녀의 밝은 웃음과 표정이 계속 자기 옆에 맴돌고 있는 것이 좋았다. 


“너한테 연락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메신저 고유번호 알려줄래?” 모노레일을 기다리기 위해서 승강장 앞에서 기다릴 때 재영이 윤이에게 물었다. 윤이는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윤이도 재영이에게 다시 연락을 하고 싶었다. 어떤 용건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재영에게 연락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윤이는 재영에게 자신의 메신저 고유번호를 알려줬다. 그리고 잠시 후 전차가 정류장으로 다가오자 함께 전차를 탔다. “이쪽으로 앉아.” 재영이 윤이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자리에 앉으라고 끌었다. “왜 이렇게 어색해하는 거야? 내가 불편한 거야?” 재영은 윤이가 어색해하는 것이 자기 때문일 줄 알고 물어봤다. “아니야. 나는 이 전차를 잘 안 타서 그래.” “그래? 너는 무슨 일을 하니? 아침에 보니 출근하는 것 같지 않아 보이던데.” 재영이는 조용히 윤이에게 물었다.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윤이의 대답에 재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윤이에 대한 궁금증이 점점 더 자라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네 개의 정류장을 지나서 마지막 역이 중앙역이었다. 모니터에서는 곧 중앙역에 도착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열차의 시속이 보이고 있었다. 전차는 300킬로미터에서 점점 속도를 줄여서 200킬로미터를 웃돌고 있었다. “다 왔네.” 순식간에 전차가 브레이크를 밟아서 전차는 잠시 멈칫거리더니 작은 소음과 함께 정차했다. 윤이는 이제 형의 집에 걸어가는 길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너무 오래전에 왔던 길이라 잘 찾을 수 있을지가 걱정되었지만 그가 본 지도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내리자.” 재영의 뒤를 따라 전차에서 내려 승강장 밖으로 나왔을 때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지도에서 보던 건물들이지만 실제로 본 건물들은 저녁 햇볕을 받아서 주황색으로 물들어 반짝이고, 이중으로 이루어진 넓은 길은 차들과 전차로 가득했다.  


“윤이 너는 이제 어느 쪽으로 갈 거야?” 건물과 길을 위아래로 보면서 살짝 멍하니 있던 윤이에게 재영이 물었다. “응, 나는 저기 길 건너 박물관 뒤쪽으로 갈 거야. 너는?” “나는 저기 보이는 165번 빌딩. 저기 우리 부모님 하고 같이 살아. 나중에 시간 되면 놀러 와라.” “그래, 오늘 즐거웠어. 연락하자. 잘 가.” “응, 잘 가. 연락해.” 윤이는 재영이 가는 뒷모습을 보고 자신도 돌아서서 길을 건너기 위해서 지하로 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지하의 길은 그가 어릴 적 다닐 때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오래된 중앙역의 전통을 살려서 시설을 보존한 결과였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자 몹시 닳아 보이는 대리석의 돌길이 나타났다. 그는 벽의 기둥에 쓰여있는 길 표시를 따라서 박물관 방향으로 미로 같은 지하길을 따라 걸었다. 지하의 큼큼한 냄새가 살짝 그를 움츠려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발걸음에 맨질맨질하게 닳아 있는 역사를 품고 있는 돌길이 윤이에게 많은 추억을 불러내고 있었다. 윤이는 그 돌길에서 눈을 떼지 않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걸었다. 중간에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 큰 광장 같은 통로가 나왔는데 본능적으로 윤이는 그 통로 중 왼쪽의 넓은 길이 박물관 가는 길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는 이제 완전히 그 길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까 지상에서 보았던 길은 과거와 너무 달라져서 익숙하지 않았지만 이 자하도는 그에게 친숙한 길이었다. 사람들이 제법 많이 다니고 있었지만 박물관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윤이 밖에 없었다. 박물관은 이미 닫을 시간이었고 그쪽 지역은 주택단지가 없어서 인적이 드물었다. “어디쯤 오고 있니?” 지하도를 나와서 박물관의 긴 담을 따라 올라가고 있을 때 제이에게 메시지가 왔다. “지금 거의 다 왔는데 혹시 문이 어느 쪽에 있어요? 어릴 때 오던 길을 따라서 담을 끼고 계속 올라가고 있어요.” “응, 맞게 오고 있는 거야. 그럼 조금 더 걸으면 길이 끝나는 지점에 우리 집 대문이 보일 거야.”


8.1

“십 년간 식량재배 생산성은 겨우 2퍼센트만이 올라갔습니다. 그에 비하여 로봇유지 비용은 매년 5% 이상 계속 늘었고요. 작년에는 감시로봇이 침팬지들 관리에 실패해서 일부 농작물의 수확이 제때 되지 않아서 농사를 망친 일도 있습니다. ” 박진비서는 중앙정부의 각부처 책임자들과 화상회의를 하고 있었다. “생산성을 올릴 수 있고 안정적으로 운영된다면 김준호박사의 시스템을 인정하고 사용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총리님께서 허락하면 일단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통보하고 시간을 갖고 대응전략을 만들려고 합니다.” 박진비서는 총리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3 구역과 4 구역을 자기 시스템으로 관리하는 것에 국한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는 3 구역과 4 구역을 효과적으로 관리해서 양질의 식량과 에너지를 제공받으면 좋은 일이지만 김준호박사를 일단 조사해 보고 결정하기로 합시다. 그가 어떤 사람들과 무슨 목적을 갖고 이 일을 추진하는지. “ 박진 비서의 발언 직후에 총리가 대답했다. 


“총리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합니다. 일단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시간을 들여 그와 그의 사람들을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김준호 박사가 사라진 시간 동안 어떤 준비를 했고 어떤 최종 목표를 갖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 당장은 정보가 부족해서 의사결정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첫 번째로 그의 제안을 거부하고 우리가 그를 추적하여 자유를 박탈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 경우에도 우리는 정보가 부족합니다. 그동안 3 구역과 4 구역의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지 않고 너무 방치했던 것이 우리의 실수입니다.” 총리의 말에 모두 조용히 경청하고 있었다. “일단 박진비서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김준호 박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시간을 버는 겁니다. 그리고 국제적인 협력을 받아서 그를 파악해서 그에 맞는 최적의 대응을 하도록 합시다.” 총리의 말은 거기서 끝났다. 그는 곧 화면에서 사라졌다. 


“이제부터 긴급 운영체제를 작동시키겠습니다. 경창국장님 외에 다른 부서장님들은 다 나가셔도 됩니다.” 박진 비서의 말에 경찰국장을 빼고 화면에 사람들이 사라졌다. “제3 구역과 제4 구역의 시스템으로 받는 모든 정보 이외에 특별 정보 라인을 가동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경찰국의 정보조사요원을 파견하겠다는 건가요?” “네, 수동 작업으로 수집하는 정보가 가장 정확하다는 것을 국장님도 아시잖아요.” 경찰국장의 얼굴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정보조사요원이 가동되는 것은 수십 년 만에 있는 일이라서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시간을 좀 주셔야 합니다. 20년 전 요원들이 파견된 이래 단 한 번도 수동으로 정보를 모집한 적이 그동안 없었습니다.” “베테랑 경찰을 교육한 후에 투입하도록 하세요. 식량 관리나 로봇관리 담당자로 투입하면 그들이 일하는 방식이나 협력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알아낼 수 있겠죠. 아, 그리고 의사들 중에 김준호 박사를 수술한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뭐가 있으려나.” 박진비서는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할 일이 많군요. 일단 김준호 박사의 과거와 주변인들을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정보를 수집할 요원도 곧 선정해서 알려드리지요. 그러고 나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다시 회의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연락 주세요.” 화면에서 경찰국장이 사라지자 어두운 회의실에 앉아있던 박진비서는 잠시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있었다. 잠시 후 김준호 박사의 행방불명에 대해서 보고서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 


박진비서는 김준호 박사에 대한 보고서를 읽는 둥 마는 둥 대충 넘겨보았다. 그의 과거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분명히 김준호 박사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어떤 사람들이 그와 같이 협력하고 있으며 어떻게 그들을 찾아내는지가 관건이었다. 박진비서는 김준호 박사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의 명단을 흩어보았다. 데이터 분석 상으로 가장 관계성이 높은 사람은 그와 같이 회사를 다녔고 지금은 그를 대신해서 호미니드 대표로 있는 김제이였다. 박진은 다시 김제이라는 사람에 대한 프로필을 읽기 시작했다. 그는 상위 1프로의 유전자를 가진 전통적인 1급 집안 자손이었다. 그와 같이 유전적으로 최고의 형질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굳이 욕심이 발현될 이유가 없었다. 다시 리스트를 보았다. 유전적으로 조금이라도 흠이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준호박사는 천재에 속했고 그의 회사는 최고의 인재들이 일하는 곳이었다. 박진 비서는 일단 김준호 박사에 대해 진찰을 했던 담당 의사를 만날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김준호 박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의 식량이나 에너지 관리 시스템의 운영 계획서를 미리 검토해 보고 효율성등이 문제가 없을 때 즉시 받아들이겠다는 답을 보냈다. 지금 들어가고 있는 비용보다 더 비용을 낼 이유도 없으며 로봇이나 사역 침팬지의 비용도 지금과 같이 고정시킨다는 조건이었다. 


중앙정부로서는 식량과 에너지의 생산과 유통에 대해서 효과적인 시스템을 같은 비용으로 사용한다면 김준호박사의 제안을 마다할 리가 없었다. 그가 식량과 에너지의 제공권을 갖고 나중에 또 어떤 요구를 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때였다. 박진 비서가 김준호 박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김준호 박사로부터 답장이 왔다. “운영 계획서를 보내 줄 테니 다음번 회의에서 자세한 운영안에 대해서 합의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합의가 끝나는 대로 저를 중앙정부의 1급 시민으로 신분을 복원시켜 주시고 일상이탈자로 김준호를 조사하는 일을 즉각 멈추기를 바랍니다.” 김준호박사의 메시지를 읽고 있는 박진비서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김준호박사가 1급 시민으로 신분 병경이 되면 뚜렷한 범법행위가 발견되지 않는 한 어떤 조사도 할 수 없고 개인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할 수밖에 없었다. 박진비서는 이제 김준호 박사와 자신과의 두뇌 싸움이 시작된 것에 약간의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8.2

”내 동생 윤이야.” 제이가 윤이를 유미에게 소개했다. 유미는 윤이의 첫인상이 제이와 닮지 않아서 살짝 놀랐다. 제이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닮은 것 같지도 않았다. 작고 하얀 얼굴에 어깨는 넓고 키는 제이보다 십 센티 이상은 컸다. 키나 팔다리의 비율등으로 봐서 신체의 우성인자가 윤이에게 더 많이 발현된 것으로 보였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윤이는 유미를 보고 인사를 했다. “네, 형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편하게 있다가 가세요.” “윤이가 집 구경을 하고 싶어 해서 구경 좀 시켜줄게. 어릴 때 우리가 놀던 할아버지 집이라.” “그럼요. 천천히 둘러보고 있어요. 제가 저녁 식사가 준비되면 부를게요.” 유미는 윤이와 제이가 지하실로 내려가자 주방으로 들어갔다. 제이는 윤이가 가장 좋아했던 공간인 지하실부터 보여줬다. “네가 가장 좋아했던 곳이 지하실이었지. 항상 여기서 책도 읽고 숨바꼭질도 했잖아.” 윤이도 그 공간이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형이 자신이 좋아하던 공간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형이 이 장소를 내가 특별히 여기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지하실의 계단은 과거처럼 오래된 나무 계단은 아니었다. 그때는 삐걱거리며 발을 디딜 때마다 소리가 났는데 지금은 푹신한 카펫이 깔려있었다. “집을 리모델링한 건가? 여기 계단은 나무 계단이었는데.” 윤이가 제이게 뒤를 따라 내려가며 물었다. “응, 그래도 뼈대는 다 그대로야. 내부 자재들만 조금 바꿨지.” 지하실에 다 다르자 특유의 오래된 책에서 나는 냄새가 났다. 그러나 윤이가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냄새들도 났는데 그것은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유미가 기르는 음지 식물에서 나는 냄새였다. 


“이 식물들은 다 뭐야?” “유미가 기르는 음지 식물들이야. 공기정화 기능이 있는 식물들 이래. 여기가 넓고 어둡고 환기도 잘 안되니 이런 식물들을 기르기에 좋은 환경이지.” 윤이는 제이의 설명을 들으면서 화분이 진열되어 있는 벽 쪽을 지나 맞은 편의 책장 쪽으로 갔다. 윤이는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 집에 오면 책장에 꽂힌 책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윤이가 책장에 다가가서 꽂혀 있는 책들을 바라보았다. “뭐 찾는 책이라도 있어? 나는 이 책장에 책들을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어. 아마 네가 어릴 때 본 그대로 있을 거야. 유미는 오래된 것들을 좋아해서인지 처음에는 신기해하면서 좀 보더니 이제는 그냥 장식품쯤으로 여기고 있지. 할아버지나 우리 집안 조상들의 손때가 묻어있는 책들이라 간직하는 것뿐이야.” “내가 여기서 책들을 좀 보고 싶은데.” “그래, 그럼 보고 있어. 나는 올라가서 저녁 준비가 다 되면 부르러 올게. 너는 어릴 때도 여기서 책 뒤적이면서 보내는 걸 좋아했지.”  윤이는 제이가 나가자 책장 가장 밑쪽에서 책을 하나 꺼내서 펼쳐보았다. 윤이는 천천히 책장을 흩어보면서 다른 책들도 하나하나 끄집어내서 펼쳐 보기 시작했다. 한참을 윤이가 책들을 꺼내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제이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몰라서 제가 처음 제이씨네 집에 가서 먹었던 음식들을 생각하면서 해봤어요. 맛있게 드셔주세요.” 유미의 말에 제이는 설명을 보탰다. “신선한 채소들과 해산물은 나도 윤이도 좋아하는 거야. 어릴 때  우리는 식성이 같았어. 그렇지?” “아, 네, 저는 다 좋아합니다. 맛있어 보이네요. 잘 먹겠습니다.” 유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윤이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먹기 시작했다. 유미의 눈에는 윤이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작고 하얀 얼굴이 옆에 앉은 그의 형 제이와 더욱 대조되어 더 작고 하얗게 보였다. 같은 형제이지만 윤이는 누구를 닮아서 그렇게 얼굴이 작고 하얀지 보면 볼수록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제이와 윤이 사이에 나이 차이가 네 살이 난다고 하는데 윤이는 제이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십 대의 얼굴과 표정을 하고 있었다. 유미는 윤이가 제이나 자신처럼 사회에서 일하는 책임감이 없으므로 좀 더 스트레스를 덜 받고 노화가 덜 진행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근데 이제 다시 돌아갈 거니?” 제이가 윤이에게 물었다. 윤이는 선뜻 대답을 하지 않고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윤이가 음식을 삼키고 말했다. “아직 잘 모르겠어. 내가 어릴 때 생각했던 것보다 이제는 여기도 살기가 좋은 것 같아서. 그동안 관심 있던 공부를 좀 더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고.” 윤이의 대답에 제이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래? 어떤 공부를 하려고?” “정보시스템 관리.”  “아버지를 한번 만나보는 건 어때?” “봐서. 아직은 아무것도 결정한 게 없어.” “그래, 천천히 생각해 봐. 너는 뭐든 하면 금방 최고가 될 거야. 나보다 공부도 항상 잘했잖아.”


“아버지를 혼자 만나는 거보다 제이씨랑 같이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윤이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지하실에 책을 더 보겠다고 내려간 뒤에 유미가 제이에게 말했다. “윤이가 알아서 잘하겠지. 자기가 필요하면 나에게 요청할 거예요.” “그래도 몇 년 만에 여기 온 동생이 잔아요. 여기 익숙지 않아서 혼자 아버지 집을 찾아가기 힘들 수도 있어요.” 유미는 왠지 윤이가 마음에 걸리는지 제이에게 다시 말했다. “보기에는 어려 보여도 윤이는 항상 나보다 어른스럽고 독립적인 아이였어요. 뭐든 혼자 하는 걸 좋아하고 말도 잘 안 했어요. 알아서 잘할 거예요. 근데 처음 본 윤이한테 너무 신경 쓰는 거 같아요?” “당신 동생이니까 그렇죠.” 유미는 윤이가 신경 쓰였다. 누구나 윤이를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윤이는 그만큼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매력적인 외모와 매너를 갖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윤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사실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나타나서 너무 낯설어.” 제이는 혼자 중얼거리는 듯 말했지만 그의 진심은 유미가 왠지 잘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을 남편인 자신보다 더 챙기는 게 싫었다. 하지만 유미는 달랐다. 유미는 윤이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고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었다. “오래 떨어져 있었으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너무 경계심을 갖고 있는 것 아니에요? 제이씨 표정이 편안해 보이지가 않아요.” 유미의 말에 제이는 마음속으로 수긍했다. “그렇게 보였나요? 윤이를 만나는데 내가 편안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오래전 아버지는 윤이를 영재 교육을 시키는 특별 교육 수업에 주말마다 데리고 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때의 기억이 살짝 떠올라서 제이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미의 말이 맞았다. 제이는 윤이가 나타난 것이 편하지가 않았다.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은 그가 아무리 형제라고 해도 시기와 질투가 느껴지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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