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15.5
15.3
윤이는 김준호박사가 준 글리터병을 책상 위에 놓고 바라보면서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겉에서 보면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는 물병이었다. 김준호박사는 그에게 글리터를 주면서 일주일만 마셔도 감정과 기억이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윤이는 처음 다시 1 구역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와 같이 간 곳을 생각했다. 1급 시민을 확인받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기억인지 꿈인지 구분되지 않는 일들을 경험했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1급 시민 자격을 확인을 받을 수 있었다. 윤이는 그때 아버지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하지만 윤이는 어렴풋이 자신의 뇌가 누군가에 의해서 조작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김준호박사가 사람들의 기억을 배양한다는 말을 할 때 그것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주 오래전 윤이가 집을 나와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날 때 기억들은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 더구나 왜 자기가 집을 나왔는지도 이제는 솔직히 기억나지 않았다.
오래전 기억은 그렇다고 해도 불과 몇 년 전 과거도 이제는 기억이 희미했다. 지난번 재영과 함께 3 구역을 방문했을 때 3 구역에서 알고 지낸 이영이나 주사장이 낯설고 어색했다. 이영은 노골적으로 윤이가 자신을 전과같이 대하지 않는 것에 몹시 놀라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윤이는 이영이 놀라워하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윤이에게 이영은 그냥 아는 사이였고 같이 보낸 시간에 대한 기억이 희미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기억이 희미해졌는지 모르지만 윤이는 그게 자신이 그만큼 3 구역이나 그곳 사람들에게 관심이 사라져서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고 지나쳤다. 하지만 준호박사의 말을 들으니 그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어릴 적 친구인 재영이나 형에 대한 기억과는 달리 3 구역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기억은 많이 희미해졌다. 시간적으로도 더 가까운 과거인데도 그 기억은 더 빨리 사라지고 희미해졌다.
윤이는 마침내 결심을 한 듯이 한숨을 크게 내쉬고 글리터 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병을 따서 단숨에 마셨다. 별다른 물 맛은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미지근한 물이 윤이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때 윤이의 스케줄러에서 메시지 불 빛이 반짝였다. 재영이였다. “김준호박사를 만났니?” “응. 좀 전에.” “내일 너네 집에 가도 되니?” “내일은 별거 없어. 휴일이라서 쉬려고 했는데?” “그래? 알았어. 그럼 갈게. 나는 너랑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내일 오후에 올래? 잠깐, 근데 너 3 구역에 있는 거 아니야?” “응, 너를 만나러 잠시 가도 될 것 같아. 나도 시간 여유가 있거든. 물론 이수현경감님은 되도록이면 내가 빨리 1 구역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는 충고를 하셨지만.” “그렇구나. 그럼 내일 4시에 우리 집으로 와. 괜찮지?” “그래, 내일 보자.” 윤이는 재영과 톡을 끝내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물을 마셨지만 금방 변화를 느끼지는 못했다. 기분이 조금 이상할 뿐이었다.
김준호박사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건 이제 저 물을 다 마실 때까지 윤이는 김준호박사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힐 것이 분명했다.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해도 자꾸만 김준호박사의 의도와 3 구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증이 계속 일어났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다시 3 구역으로 가서 김준호박사를 만나서 모든 이야기를 다 묻고 싶지만 그의 의도에 말려들기는 싫었다. 윤이는 김준호박사가 자신을 시험해 본다고 느꼈다. 지금 김준호박사는 중앙정부와 대척점에 있기에 중앙정부의 정보국에서 일하는 자신을 끌어들여서 유리한 정보를 얻거나 이용하려고 한다는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윤이는 이미 김준호박사의 물을 마셨고 자신이 재물이 됨으로써 김준호박사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그가 말하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첫 단추를 끼웠다.
15.4
이수현경감은 계속해서 김준호박사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김준호박사는 어부의 도시 근처에서 계속 신호를 보냈다. 아마도 그가 만든 지하도시에 머무는 것 같았다. 케이가 김준호박사의 몸에 묻힌 단세포추적기는 아직도 김준호박사의 몸속에서 그 수명이 48시간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중앙정부에서는 김준호박사에 대한 이렇다 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분명히 인간과 침팬지의 이종교배가 이루어졌고 그에 대한 증거로 유전자 검사결과가 나와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매일 이수현 경감의 보고를 듣던 경찰 국장은 오늘 아침부터는 바쁘다면서 위급상황에만 연락하라고 했다. “케이, 지금 어디인가요?” “네, 저는 이재영박사님과 예술인 마을에 왔습니다. 지난번에 한번 왔던 곳인데 박사님이 여기 사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려고 시도 중입니다.” “그곳은 별일 없나요? 모니터링되는 데이터 상으로는 3 구역은 지금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만 혹시나 해서 묻습니다.” “네, 별다른 특이 사항이 없습니다. 이곳은 조용합니다.” “나는 오늘 어부의 도시에 다시 가보려고 합니다. 이재영박사와 함께 지난번 갔던 바에서 만날까요? 성대구조가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도 있는지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오늘 같이 이동이 가능할지 박사와 이야기해 보고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케이의 스케줄러에서 이재영박사의 목소리가 나왔다. “경감님, 가능합니다. 이제 여기 일은 끝났습니다. 우리가 여기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서 꽤 일찍부터 왔거든요. 잠시 뒤에 우리도 그쪽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조금뒤에 어부의 도시에서 뵙겠습니다.”
이수형경감이 어부의 도시로 이동하려고 할 때 박진비서로부터 긴급 메시지가 도착했다. “경감님, 김준호박사를 찾아서 중앙정부 비서실로 오세요. 만약 그분이 오기를 거부하면 물리력을 써도 됩니다. 체포 허가서는 경감님의 중요정보 보관소로 지금 보냈으니 확인해 보시면 됩니다. 다른 질문이 있나요?” “아닙니다. 없습니다.” “그럼 비서실에서 뵙겠습니다.” 이수현경감은 바로 체포허가서를 확인했다. 체포목적이 인위적인 생명연장에 대한 사실 확인이었다. 이수현경감은 김준호박사의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어부의 도시에서 벗어나서 4 구역 방향으로 이동 중이었다. “케이, 나는 긴급 상황이 생겨서 오늘 어부의 도시는 못 갑니다. 이재영박사와 다음에 만나기로 합시다. 그럼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혹시 그럼 제 도움은 필요치 않으신가요?” “일단 지금은 필요치 않으나 필요하면 연락하겠습니다. 저는 4 구역으로 갑니다.”
이수현경감은 김준호박사의 위치를 계속 모니터링하면서 초초함을 느꼈다. 자꾸만 그 신호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에어카를 타기 위해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밖으로 해가 환하게 들어왔다. 밖은 조용하고 햇살은 눈부셨다. 이상적인 날씨였다. 잠깐 생각에 잠겨있는데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내리려고 보니 밖에서 제니스가 이수현경감을 기다리듯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었다. “경감님, 오랜만이네요. 바쁘게 어디를 가시나요?”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야 일 때문에 여기저기 항상 돌아다니죠. 그럼.” 이수현경감은 제니스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재빨리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마치 더 이상 제니스와는 이이갸를 하고 싶지 않다는 몸짓이었다. 제니스는 그런 이수현경감을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15.5
이수현경감은 김준호박사의 신호를 찾아서 4 구역 안으로 들어갔다. 신호는 계속 움직이다가 섬처럼 강으로 둘러싸인 숲의 한 귀퉁이 쪽에서 멈췄다. 지도에 표시된 곳으로 천천히 다가가면서 주위를 경계했다. 하지만 주변은 조용했고 보이는 건 나무들 뿐이었다. 이수현경감은 지난번에 이곳을 제이와 함께 왔었다. 그리고 산 위의 바위뒤에서 출입문을 발견했던 기억을 해냈다. 기억을 더듬어서 산 위쪽으로 가서 커다란 바위뒤쪽으로 갔다. 문은 지난번처럼 굳게 닫혀있었다. 이수현경감이 출입문을 두드리려고 다가서자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자 몸을 움찔하고 뒤로 물러나서 허리 뒤쪽에 있던 비상용 총을 꺼내고 겨눴다. 불과 몇 초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만 보였다. 이수현경감은 자신이 너무 긴장해서 총까지 꺼내든 것에 스스로 겸연쩍은지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다시 허리 뒤쪽으로 총을 넣었다.
“경감님, 저를 찾아오셨나요? 여기는 제 연구실입니다. 누구도 경감님을 헤치지 않으니 안으로 들어오세요.” 김준호박사의 목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이수현경감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생각보다 계단은 길었고 안으로 깊이 들어왔다고 느껴질 때쯤 다시 문이 나왔다. 유리문 안쪽으로는 넓고 환한 실내가 보였다. 김준호박사가 문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이수현경감이 천천히 한 발짝 안으로 들어가자 유리문은 다시 닫혔다.
“경감님, 어서 오세요.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경감님께서 저를 찾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제가 찾아온 용건을 여기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수현경감은 문 안쪽에 들어선 그대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서서 김준호박사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손목의 스케쥴러를 켜서 김준호박사의 앞에 체포허가서를 보여줬다.”이제 저와 함께 중앙정부로 가셔야 합니다.” 허공에 띄워진 체포허가서를 바라보는 김준호박사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하지만 이수현경감은 그와는 반대로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다. 아까 출입문을 들어올 때 본능적으로 허리 뒤쪽에 있던 총을 꺼내고 경계를 한 그때의 긴장감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이지요. 같이 가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십 분만 시간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김준호박사의 눈빛은 왠지 차분하고 다정해서 누구도 거절할 수 없어 보였다. 그 눈빛을 마주 보고 있던 이수현경감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했다. “박사님, 지금 그냥 가시죠.” 이수현경감은 들어올 때 서 있던 자리에서 조금도 변함없이 그대로 서서 말했다. 이수현경감이 반드시 김준호박사를 체포해서 가겠다는 의지가 그의 움직이지 않는 발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럼 가면서 하시죠.” 김준호박사는 이수현경감을 지나서 먼저 출입문을 열고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그 뒤를 이수현경감이 따라갔다.
“경감님, 제 뒤에 있어도 제 목소리는 잘 들릴 겁니다. 박진비서는 경감님이 저를 죽이는 걸 원했을 겁니다. “ “무슨 소릴 하시는 건가요?” “제게 물리력을 써도 된다고 했겠죠. 그런데 그 물리력이라는 게 힘으로 저를 제압하는 것 말고는 총밖에 더 있습니까? 그건 곧 죽여도 된다는 것이고 경감님이 그러길 바랐을 겁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사실을 너무 비약하지 말아 주세요.” “어쨌든 저는 아직 살아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마치고 앞에서 계단을 올라가던 김준호 박사는 계단이 열리면서 아래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너무나 짧은 순간동안 일어난 일이라 바로 뒤를 따르던 이수현경감은 미쳐 그를 잡지 못하고 단발의 차이로 손이 허공에서 맴돌았다. 이수현경감은 김준호박사가 사라진 계단이 닫히기 전에 거기로 따라 들어갈 생각으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간발의 차로 계단은 닫혔고 이수현경감은 계단 앞으로 넘어졌다.
그는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순순히 따라가겠다는 김준호박사의 말을 믿고 너무 방심한 자신의 안일함에 대한 후회의 한탄이었다. 그때 이수현경감의 스케줄러에서 케이와 통화가 연결되었다. “케이, 지금 어디인가요?” “경감님, 여기 주사장 호텔입니다. 지금 이곳은 주사장 호텔뿐 아니라 곳곳에서 정전과 통신장애가 몇 번 반복되었습니다. 아까부터 경감님과 소통이 안되었습니다. 경감님, 지금 어디신가요? 잘 계신가요?” “그래요? 음, 알겠습니다. 만약 이재영박사와 같이 있다면 같이 1 구역에 가서 안전하게 대기하기 바랍니다. 저도 곧 1 구역으로 갈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