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16.2
16.0
케이와 이재영박사는 주사장의 호텔에서 이수현경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호텔은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가 다시 전기가 들어오기를 몇 번 반복했다. 케이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이수현경감과 연락을 취하려고 했으나 통신이 작동하지 않았다. “이건 제 직감입니다. 지금 중앙정부에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우선 저를 수동모드로 전환하고 전력 확보를 위해서 충전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충전을 하겠습니다.” 케이는 스스로 비상체제로 들어갔다. 이재영박사는 이런 혼란한 상태를 처음 겪는 것이 아니었다. 불과 오 년 전까지만 해도 중앙정부의 시스템이 안정화되지 않았던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전력 수급이나 통신 위성의 문제가 발생해서 무정부상태가 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때 가장 큰 혼란은 어떤 지시도 받을 수 없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로봇들이었다.
통신 장애나 방전으로 멈춘 로봇들은 다음 지시 사항을 받을 수 없어서 그대로 고철 덩어리가 되어 모든 업무가 중단되었다. 그 이후에는 정전을 대비해서 최소한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충전을 할 수 있는 태양열 배터리가 탑재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리셋을 하거나 중앙정부의 통신 장애 발생 시를 대비해서 간단하게 자신이 환경을 판단해서 의사 결정을 하고 업무를 수행하는 수동 모드가 만들어졌다. 이재영박사는 중앙정부와 소통을 위해서 스케줄러를 켜고 메시지를 보냈으나 메시지가 도달하지 않고 있었다. 윤이에게도 메시지를 보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재영박사는 최대한 빨리 이곳을 떠나 1 구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왠지 혼자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정전이 되고 중앙정부와의 통신이 예고 없이 불규칙하게 끊어졌다면 뭔가 위험한 일이 외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박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지금 비상체제를 가동해서 통신 가능한 위성을 찾고 있습니다. 위성을 찾으면 일단 이수현경감님과 연락하고 그다음에는 가장 안전한 경로를 찾아서 박사님을 모시고 1 구역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재영박사의 마음을 읽은 듯 케이가 말했다. “지금 통신 장애가 풀렸습니다. 중앙정부로부터 메시지가 왔어요.” 초초해하던 이재영박사의 얼굴이 잠시 밝아졌다. “주 통신위성이 고장을 일으켜서 지금 다른 보조 위성으로 우회되는 통신이 갑자기 많아지면서 일시적인 장애가 있었답니다.” 박사는 중앙정부의 공지를 소리 내어 읽었다. “박사님, 그래도 빨리 1 구역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오늘 1 구역의 김윤씨집을 방문하신다고 했으니 지금 가장 안전한 이동경로를 받았습니다. 지금 가시죠.”
“네, 가기 전에 이수현경감님에게 연락을 해보겠습니다.” “경감님은 지금 4 구역에서 업무 수행 중입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박사님과 함께 최대한 빨리 1 구역으로 가라고 지시했습니다.” “케이, 혹시 저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나요?” “아니요.” “그럼 가기 전에 작별인사 겸 이수현경감과 잠시 통화를 할 테니 기다려주세요.” 이재영박사는 이수현경감에게 라이브 메시지를 넣었다. 이수현경감이 기다렸다는 듯이 답을 했다. “박사님, 아직 3 구역을 안 떠나셨나요?” “네, 이제 가려고 합니다. 경감님은 어디신가요?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일단 1 구역으로 케이와 같이 가세요. 저도 곧 거기서 뵙겠습니다.” 이수현경감의 메시지는 짧지만 확실했다.
이재영박사의 의문에는 긴 설명보다 이수현경감의 자신감에 찬 짧은 대답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박사님, 어서 1 구역으로 가시죠.” 케이는 박사를 재촉했다. 이재영박사와 케이는 호텔을 나와서 주차장으로 가는 동안 제니스나 이영을 만나지 못했다. 평소와는 달리 호텔의 바에도 리셉션에도 제니스나 이영은 없었다. 케이는 주차장으로 가서 에어카를 탈 때까지 긴장한 표정을 짓고 주변을 경계했다. “윤이한테 메시지가 왔어요. 이수현경감과 같은 이야기를 하네요. 1 구역으로 빨리 오라고.” “지금 출발했으니 1시간 안에 도착할 겁니다. 여긴 평소와 달리 조용해 보입니다.” 케이와 이재영박사가 탄 에어카는 조용히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16.1
이수현경감은 김준호박사가 계단에서 사라진 직후 중앙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전과 통신장애가 있다는 짧은 메시지만 들리고 계속 통신이 끊겼다. 이수현경감은 곧 계획을 수정했다. 일단 연구실을 빨리 빠져나간 뒤 다시 중앙정부와 소통하여 지원을 받아 돌아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김준호박사의 연구실 출입문이 잠겨서 꼼짝하지 않았다. 케이나 중앙정부에 연락해서 지원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통신이 되지 않았다. 전기적인 문제인지 아니면 김준호박사가 그렇게 짜놓은 것인지 모르지만 이수현경감은 그의 연구실이라는 덧에 걸려들었다. 이수현경감은 그제야 문득 여기까지 자신을 유인한 것은 김준호박사의 철저한 계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통신이 끊기자 김준호박사에게 심어 놓았던 단세포 추적기도 소용이 없었다. 어쩌면 그 단세포추적기도 김준호박사가 알고 있으면서 이수현 경감을 유인하기 위해서 그대로 작동하게 놔둔 것일지도 몰랐다.
이수현경감은 천천히 김준호박사의 연구실 내부를 둘러봤다.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김준호박사님, 이건 너무 하지 않나요? 이렇게 저를 여기 고립시키는 이유가 뭡니까?” 이수현경감은 김준호박사의 연구실 안에서 김준호박사의 책상 앞에 앉아서 차분히 허공에 대고 대화를 시작했다. 분명히 어디선가 김준호박사가 연구실을 모니터 하고 있을게 분명했다. “제가 여기 갇혀 있다고 해서 중앙정부가 박사님을 추적하는 걸 멈추지는 않을 겁니다. 저를 여기 가둬두는 건 타인의 자유 침해입니다. 저는 제 임무를 수행 중이었고 박사님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았습니다. 저를 여기서 나가게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이수현 경감은 천천히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김준호박사의 연구실 안에서 이수형경감의 외침과 침묵의 반복 속에서 시간은 계속 흘렀다. 이수현경감은 꼬박 세 시간 동안 출입문을 두드리고 다시 연구실을 들어와 소리치기를 반복했다. 점점 이수현경감이 지쳐가면서 화가 나려고 할 때 김준호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감님, 이제 지친 겁니까?” 이수현경감이 김준호박사의 목소리가 나는 쪽을 찾았다. “여기입니다. 제 자리에 앉아보세요.” 이수현경감은 김준호박사의 책상에 앉았다. 책상 앞의 여러 대의 모니터에는 김준호박사가 보였다. “겨우 세 시간 만인데 얼굴이 많이 지쳐 보이네요. 저 쪽 안으로 들어가면 물도 있고 음식도 있으니 좀 드세요.” 모니터에서 나오는 김준호박사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이수현경감은 자존심도 상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수현경감은 김준호박사의 호의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말에 아무 말도 안 하고 계속 김준호박사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경감님, 제가 사라져서 저한테 화가 나셨군요. 중앙정부에서 가장 신임받는 경찰을 제가 물 먹일 수 있나요. 그래서 잠시 통신 장애도 만들고 정전도 만들었습니다. 여기만 그런 게 아니라 전국이 다 그랬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박진비서는 지금 저나 경감님에게 신경 쓸 겨를도 없답니다. 그리고 저를 다시 만나고 싶으시면 3 구역 어부의 도시에 있는 지난번 식당으로 혼자 오시기 바랍니다.”
“지금 중앙정부의 시스템을 해킹하고 있나요? 박사님의 표정을 보니 저를 여기 유인한 것부터 철저히 준비를 했군요.” “너무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저를 잡을 기회의 문은 닫힌 게 아닙니다. 저는 그럼 이만.” 김준호박사는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기다리세요. 두 번은 속지 않습니다. 제가 곧 당신을 찾아갈 겁니다.” 이수현 경감은 김준호박사가 사라진 후 주먹을 꼭 쥐고 김준호박사에게 말하듯이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김준호박사와 동행해서 박진비서에게 가는 것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이수현경감은 현재의 상황에 대해 박진비서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하지만 박진비서는 답하지 않았다. 김준호박사의 말대로 아마도 중앙정부의 통제에 문제가 발생했으니 지금 그의 메시지를 읽고 바로 답할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혼란을 만드는 장본인인 김준호박사의 체포가 중요하지 않은 사안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박진비서의 방관적인 태도에 동의하지 않던 이수현경감은 이제 점점 더 박진비서에 대한 부정적 경험이 한층 더 쌓였다. 이수현경감은 서둘러서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언제 다시 출입문이 닫히고 통신이 끊겨서 고립될지 몰랐다.
16.2
“케이 씨하고 같이 왔어.” 이재영박사가 윤이의 집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래, 잘 왔어. 케이, 어서 오세요.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이수현경감님도 곧 오실 겁니다.” “1 구역은 거리에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어.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중앙정부로부터 정전과 통신장애가 완전히 해결되기 전까지 모든 시민은 집으로 돌아가서 기다리라는 안내가 내려졌거든.” “그랬구나.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해 줄 수 있어?” “미안, 나도 중앙정부에서 공지한 내용 이외에는 더 아는 게 없어서. 정확히 무슨 이유로 정전이나 통신장애가 일어났는지 모르겠어. 어쨌든 나보다는 이수현경감님이 더 잘 아실 거야. 경감님이 오시면 같이 이야기해 보자. 우선 좀 쉬고 있어.” 이재영박사와 윤이가 이야기하는 동안 케이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충전할 장소를 찾고 있었다.
“케이, 나랑 아래 지하층으로 내려가면 박물관 수장고가 있는데 거기 충전할 곳이 있어요. 그리고 과거에 쓰던 충전용 배터리도 많이 있을 거예요. 그 외에도 만약을 대비해서 쓸 수 있는 물건들이 많을 거예요. 오래되어서 작동할지 모르겠지만 괜찮은지 한번 같이 점검해 보시겠어요.” “네, 좋습니다. 2070년 이후에 쓰던 배터리라면 아직도 문제없이 작동될 겁니다. 그 시대의 배터리 기술력은 지금보다 더 좋았거든요. 대부분 수명이 100년일 겁니다.” “그렇군요. 아마 지구열대화 이전의 배터리일 겁니다.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물건들이 있는데 저보다는 케이가 더 잘 알 것 같네요. 거기 있는 물건들 중에 앞으로 쓸모가 있는 물건이 있는지 같이 가봅시다.” “윤이 너는 마치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처럼 이야기하네.” “꼭 그런 건 아니고, 이런 일은 처음이라 잠깐 대처법에 대해서 조사해 봤어. 2070년 지구 열대화가 일어나서 무정부 상태가 되었던 때는 최대한 수동 모드로 멈춰진 정부를 살리면서 과도기를 넘겼데. 그때를 참고해서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보려고 하는 거야."
“네, 좋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제가 도움이 된다면 윤이 씨와 같이 가서 필요한 물건을 찾아보겠습니다. ” “그럼 나도 갈래. 나도 오래된 물건이라면 알아보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야. 게다가 나는 이런 비상사태를 다른 여러 나라에서 많이 겪어봐서 어떤 물건이 필요할지 잘 알지.” 이재영박사가 윤이와 케이를 따라나서려고 했다. “아니야. 너까지 갈 필요는 없어. 필요하면 너에게 메시지 보낼게. 우선 너는 여기서 편하게 쉬고 있어.” 윤이와 케이는 박사를 두고 나갔다. 윤이의 집의 거실에서 번화한 거리 너머 높은 빌딩들이 보였고 그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재영은 소파에 편히 앉아서 햇살을 받으면서 조금 전까지 긴장했던 마음을 내려놓자 자신도 모르게 깊게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