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5.2
15.0
이수현경감은 중앙정부와의 콘퍼런스 콜을 끝내고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겨 호텔 방에 앉아 있었다. ‘문제는 침팬지 인간이 아니야.’ 이 수현경감의 눈에는 분명히 과거와는 달라진 사람들이 3 구역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중독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더 많은 술과 마약을 사기 위해서 서로를 죽이고 싸우는 사람들은 사라졌다. 이렇게 눈으로만 봐도 3급 시민들의 변화가 느껴지는데 중앙정부에서 모를 리가 없었다. 이수현경감은 중앙정부에서 일부러 3 구역 사람들의 변화를 모른 척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게다가 데이터의 확인을 위해서 자신을 파견하면서까지 시간을 끌며 조사하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특별 위성을 띄우면 며칠 걸리지 않아서 3 구역에서 들어오는 데이터의 오류에 대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자신이 알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느껴졌다.
이수현 경감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방문을 두드림과 동시에 케이가 이수현경감을 부르는 소리가 문밖에서 났다. “경감님, 케이입니다. 이재영박사와 같이 왔습니다.” “들어오세요.” 방문이 열리고 케이가 다른 때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앞서 걸어 이수현경감 앞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앉아요.” 이수현경감은 케이와 같이 들어오는 이재영 박사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얼굴을 살폈다. 케이와 마찬가지로 박사도 평소와 달리 좀 더 기분이 고조되어 있는지 볼이 발그레했다. “두 분이 어디를 다녀왔는지 압니다. 그래서 그 성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나요?” “알고 계셨군요. 호미니드에 가서 제이씨에게 유전자 분석 결과를 듣고 왔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침팬지와 이종교배가 된 것 같다고 더 조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좀 전에 아래층에서 김준호박사를 만났습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김준호박사가 인간과 침팬지를 본인이 이종교배를 했다고 했습니다.” “잠깐만요. 김준호박사가 지금 여기와 있다는 이야기인가요?” “네, 1층에서 술 취한 사람들이 많아서 잠시 시비가 붙었는데 김준호박사가 어디선가 나타나서 저를 복도의 방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래서 좀 전에 잠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케이, 어떻게 해서든 김준호박사의 행방을 알고 있어야 하니 빨리 1층으로 내려가서 찾아보세요. 만약 찾으면 우선 제가 만나자고 한다고 하고 여기로 데려오세요.”
“경감님, 혹시 김준호박사가 사라질까 봐 그러시나요? 그런 거라면 제가 미리 조치를 취했습니다.” “네?” “제가 아까 일층에서 지나칠 때 김준호박사의 손에 바이오 추적기를 묻혔습니다. 1시간이 지나면 아마도 피부 속으로 들어간 추적기가 작동할 겁니다. 그러면 앞으로 72시간 동안은 추적이 가능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죠?” “아무래도 이종교배에 대해서 우리까지 알게 되었으니 중앙정부에 그 정보가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일 때문에 김준호박사가 중앙정부의 추적을 피해 사라질 수도 있을 거라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마침 옆으로 지나가길래 어수선한 틈을 타서 몰래 바이오추적기를 묻혔습니다. 충분히 의심되는 사안이라 바이오 추적기를 묻혔으니 불법이 아닙니다.” “케이, 잘했어요. 저는 이재영박사가 침팬지인간에 대해 김준호박사와 이야기를 나눴다는 걸 듣고 김준호박사가 자취를 감출까 봐 케이 보고 찾아오라고 한 겁니다. 저도 어떻게 해서든 김준호박사가 우리가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려고 했습니다.” 케이와 이수현 경감이 급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있던 이재영박사가 둘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두 분이 말씀하시는데 죄송합니다만 제가 김준호박사와 침팬지 이야기를 나눈 게 잘못한 일인 것 같군요. 제가 먼저 아는 척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박사님이 아니더라도 김준호박사는 곧 우리가 침팬지인간에 대한 정체를 알게 된 것을 알아냈을 겁니다. 아마 이미 모든 게 밝혀진 이후에 대해서도 나름 계획이 있을 겁니다. 그는 정보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제는 김준호박사의 정보력이 자신의 몸속 세포로 들어간 바이오 추적기를 발견할 만큼은 제발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그럼 다행입니다. 그런데 아까 김준호박사가 저에게 연락하라고 했는데 연락을 해도 될까요?” “연락을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안 할 이유도 없다고 봅니다. 아직 중앙정부가 김준호박사에게 어떤 조치를 취한 것도 아닙니다. 김준호박사가 일상이탈자로 사회위협소지가 있는 자로 공표되기 전까지는 그냥 자연스럽게 대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음.” 이수현경감은 말을 하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경감님, 혹시 이 호텔 내부에 보안에 대해 걱정이 되시나요?”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케이가 머뭇거리는 이수현경감에게 말했다. “이 방은 이미 케이가 점검해서 괜찮지만 다른 장소들이 의심스러워서요. 박사님 방도 그렇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오늘 박사님 방을 체크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가 있나요?” “아닙니다. 앞으로 박사님과 케이는 꼭 같이 다니도록 하세요. 그리고 박사님도 잘 아시겠지만 3 구역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던 조심 하셔야 합니다. 호텔 직원 중에도 김준호박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 언행에 조심하시고요. 저는 되도록이면 지금이라도 빨리 1 구역으로 돌아가시기를 권합니다.” “경감님이 걱정하시는 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연구를 중도에 포기할 수는 없으니 며칠 내로 샘플 채취를 끝내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이재영박사의 손목에 있는 스케쥴러에서 메시지 수신을 나타내는 녹색 불빛이 반짝였다. “잠시만요, 지금 김준호박사가 급하게 아래층 바에서 보자고 합니다.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는데요” “케이, 박사님과 동행하세요. 나는 여기서 대기할 테니까 나에게 스케쥴러 코드 오픈을 하고 김준호박사를 만나세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바로 가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박사님 가시죠.” 이재영박사는 케이와 함께 방을 나섰다.
이수현경감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김준호박사의 속내를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이렇게 즉흥적으로 다시 이재영박사를 불러낸다는 게 이상했다. 케이는 이수현경감의 지시대로 자신의 스케쥴러 코드를 이수현경감에게 오픈했다. 그의 눈과 귀로 들리는 모든 세계가 이수현경감의 스케쥴러에 실시간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이수현경감은 스케줄러의 모니터링 화면을 공중에 띄워놓고 그들과 동행하고 있었다.
15.1
“저를 따라오세요.” 김준호박사는 엘리베이터 앞에 있다가 김재영박사와 케이를 보고 곧장 손짓을 하며 길을 안내했다.”지금 밖으로 나가실 겁니까?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지 않으면 같이 갈 수 없습니다.” 케이는 재영의 팔을 잡아서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앞장서서 걷는 김준호박사에게 외쳤다. 케이의 소리를 듣고 김준호박사는 귀찮다는 듯이 돌아보면서 케이를 경멸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멀리 가지 않아요. 이 건물 주차장으로 갈 겁니다.” 김준호박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고 다시 앞장서서 건물을 빠져나갔다. “일단 따라가 봅시다.” 이재영박사는 케이에게 말했다. 김준호박사는 건물을 빠져나가 어두운 주차장 앞으로 가서 에어카 앞에 섰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쫓기듯 급하게 차 문에 손을 대서 차의 시동을 걸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위기 상황이라고 윤이에게 전해주세요. 되도록 빨리 윤이가 저를 만나러 와주면 좋겠습니다. 제가 윤이에게 직접 이야기해야 할 게 있어요.” 김준호박사의 표정은 재영이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굳어있었다. 자신감에 차 있던 말투나 눈빛이 사라지고 눈동자는 불안에 떨고 있었다. 재영은 누구보다 먼저 그것을 알아차렸다. 재영은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주변에서 아무 위협도 느끼지 못했다. “ 알겠습니다. 윤이에게 전해주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박사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찾아가야 되나요? 그리고 지금 위급 상황이라고 하셨는데 혹시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재영은 왠지 지금이 아니면 다시 김준호박사를 만나지 못할 것 같아서 물었다.
“윤이는 저를 찾을 수 있어요. 그때 같이 오셔도 됩니다. 지금은 일단 제가 빨리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김준호박사는 자신의 에어카를 타고 사라졌다. 케이는 한 발짝 떨어져서 이재영박사와 김준호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여기 무슨 일로 나와 계신 건가요?” 김준호박사의 에어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케이가 김재영박사에게 물었다. “아니에요. 잠시 나와봤습니다. 다시 가시죠.” 재영은 김준호박사가 통신 조작으로 케이의 메모리를 부분 삭제한 것을 알아챘다. 그가 에어카의 시동을 킬 때부터 케이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서있었는데 그때 이미 김재영박사는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혹시 제게 시키실 일이 있으신가요? 지금 조사를 하러 마을로 나가시려고 하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러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저는 이수현경감님을 잠시 만나야 할 것 같아요.” “아, 그럼 아까 경감님이 말씀하신 대로 박사님 방의 보안에 대해 제가 점검해 보겠습니다. 같이 가실까요?” “네, 그러세요.”
좀 전에 이수현경감에게 오픈되어 있었던 케이의 스케줄러 코드 셰어가 끊기자 이수현경감은 김준호박사의 짓이란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래서 바로 케이가 있던 로비까지 내려왔으나 이미 김준호박사는 주차장에서 이재영박사와 이야기를 마치고 에어카를 타고 있었다. 이수현경감은 굳이 이재영박사에게 가서 김준호박사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묻고 싶지 않았다. 이수현경감은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 돌아오면서 왜 김준호박사가 급하게 이재영박사를 찾았으며 그리고 또 급하게 어딘가로 돌아갔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분명히 김준호박사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고 있었다. 현재까지 중앙정부 말고는 김준호박사에게 위협이 될만한 인물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까지 3 구역과 4 구역에서 김준호박사는 자신만의 세계를 마음껏 구축했다. 하지만 갑자기 김준호박사가 이재영박사를 먼저 찾은 것도 그리고 짧은 대화를 하고 급하게 떠난 것도 이상했다.
잠시 후 방문을 두르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경감님, 접니다.” “네,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시겠지만 김준호박사가 케이씨의 메모리를 교란시켰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의 스케쥴러가 나와 코드셰어 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케이의 특성상 모든 걸 녹화할 수 있으니 애초에 차단하려고 했겠죠. 근데 급하게 박사님을 찾은 이유가 뭔가요?” “저에게 윤이에게 자신을 찾아오라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긴급상황이라고 했어요.” “긴급상황이요?” “네 무슨 일인지 물었지만 설명도 없이 서둘러 갔습니다. 그 사람의 얼굴 표정에서 자신감이 다 사라져 보였습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군요. 윤이에게 메시지를 전달하세요. 윤이가 만나보지 않는 한 그에게 생긴 긴급상황이 뭔지는 알 수 없겠군요.”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박사님은 윤이에게 전하세요. 저는 제 나름대로 김준호박사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5.2
“무슨 일이죠? 혹시 박사님 건강이 악화되었습니까?” 윤이는 재영에게 김준호박사의 메시지를 전해 듣고 곧 4 구역에 있는 그의 연구실로 찾아갔다. “잘 왔어요. 내 예상이 맞았군요. 나를 찾아올 줄 알았어요.” “무슨 일이 생기신 건가요?” “나는 이제 곧 죽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다시 어디가 아프신 건가요?” “아니요. 수술은 완벽했어요. 하지만 제가 만든 세상이 중앙정부의 총리에게는 눈에 가시인가 봅니다.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어요.”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물론 중앙정부의 원로들 중에는 박사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원로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인간의 다양성을 넓히는 차원에서 그대로 두고 보는 것으로 결론 난 것으로 아는데요.” “네, 그럴지도요. 하지만 내 이야기를 잘 들어봐요.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닙니다. 절대로요. 그리고 만약 내가 갑자기 죽으면 내가 만든 세계도 곧 파괴될 수도 있어요. 지하도시도 그렇고 침팬지인간들도 멸종시켜 버릴 수 있어요. 그래서 나는 이제 최후의 싸움을 할 거예요. 나는 먼저 중앙정부의 시스템을 공격할 겁니다.”
“공격이라고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놀라지 마세요. 이미 알고 있었을 텐데 생각보다 기억이 많이 사라졌군요. 어쨌든 다시 알려주는 겁니다. 중앙정부로 들어가는 데이터에 혼란을 주는 건 이미 진행되고 있습니다. 중앙정부도 알고 이수현경감을 보내서 원천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죠. 그다음 단계가 진행될 겁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 박사님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고요?” “윤이 씨, 이곳을 어떻게 찾아왔나요?” 김준호박사는 윤이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질문을 했다. “재영이가 박사님이 저를 급하게 찾고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나는 윤이 씨의 그런 점이 좋아요. 본능적으로 당신은 여기를 찾아왔어요. 나도 이재영박사도 장소를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기억 어딘가에는 이 장소와 이 장소에서 나와했던 여러 가지 중요한 일들이 있다는 겁니다. 여기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건 다른 기억도 분명히 필요하면 떠 올릴 수 있을 겁니다. 내 계획에 대해서도. 그러니 나에게 묻지 말고 기억해내려고 해 보세요.” 윤이는 김준호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기억을 떠 올려보려고 했지만 기억나는 게 없었다. 하지만 이 연구실에서 사람들과 화상회의를 하고 김준호박사와 실험이야기를 하던 장면이 영화처럼 떠올랐다. “꿈인지 영화인지 비현실적인 그림 같은 장면들만 남아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어쨌든 중앙정부의 시스템을 공격한다니 유감입니다. 저는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윤이 씨, 중앙정부의 시스템은 워낙 많은 미러사이트가 있어서 해킹을 해도 곧 복구됩니다. 그것을 파괴한다는 것은 어쩌면 가능성이 낮은 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히 전달될 겁니다.” 김준호박사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윤이 쪽으로 얼굴을 숙여 그의 눈을 가까이 쳐다보면서 말했다. “박사님이 원하는 것은 사람입니까?” 윤이는 천천히 김준호박사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듣자 김준호박사는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나는 최고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1급 시민입니다. 우리의 정부가 혼란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중앙정부는 사람들을 없애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살아남기를 원합니다. 나에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윤이 씨는 곧 과거를 기억해 내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두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김준호박사는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책상 옆에 있는 냉장고에서 물 한 병을 꺼내서 윤이에게 건넸다. “자, 이걸 마셔주세요.”
“이게 뭡니까?” 윤이는 김준호박사가 건넨 물병을 이리저리 보면서 물었다. “나는 오랫동안 준비했어요. 이건 글리터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 지금 우리 같은 인간에게 필요한 거죠. 혹시 저나 3 구역에서 그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보면서 최근에 뭔가 변화를 느끼지 못하셨나요?” “아니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기억이 생기고 있습니다. 배양된 기억이 아니라 진짜 기억입니다. 따라서 감정도 많이 생기고 있어요. 이 물은 마비된 신피질을 자극해서 활성화시키고 감정과 기억이 살아나게 합니다. 그리고 차츰 자의식도 생기죠. 진짜 인간이 되어가는 겁니다.” “배양된 기억이라.”윤이는 생각에 잠겼다. “당장 제말을 모두 믿을 수 없겠지만 지금 제가 한 이야기는 사실입니다. 중앙정부의 통제안에 들어가 있는 모든 인간들은 기억과 감정을 통제당하고 있습니다. 이성이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감정이 마비되고 기억이 왜곡된 사람들이죠. 이 물을 마셔보면 알 겁니다. 단, 처음에 적응되기까지는 좀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말을 믿고 이 물을 마셔보세요.” “제가 왜 그래야 하죠? 그리고 박사님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기억과 감정을 살려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윤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만요. 나는 윤이 씨가 나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1급 시민이면서도 1 구역에서 나와서 3 구역을 돌아다니면서 경험하고 배웠잖아요. 뭔가 통제받지 않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분명히 마비되지 않은 신피질을 갖고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저 윤이 씨가 정말 온전한 인간이기를 바랍니다. 꼭 이 글리터를 마시지 않아도 됩니다. 한 번만이라도 제게 솔직하게 원하는 것을 이야기해 보세요. 통제받지 않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저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나요?” 윤이의 뒤에 대고 김준호박사는 빠르고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윤이는 선뜻 문을 향해서 계속 걸어가지 못하고 멈춰 서서 김준호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김준호박사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말했다. “이 물 아니 글리터를 얼마나 마셔야 합니까? 박사님의 뜻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제 호기심 때문입니다.” 윤이가 김준호 박사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이유야 어쨌든 글리터에 관심을 가져주니 고맙네요. 이건 매일 한 병씩 일주일만 마셔도 분명히 달라집니다. 감정과 기억이 생길 겁니다.” 윤이는 김준호박사가 건네주는 글리터가 들어있는 박스를 받았다.